크리스마스의 첫 선고는 여자에게 주어졌다.
왜 하필이면 여자에게?
사람은 오래 여자를 멸시해 왔다.
심한 독설가는 여인은 혼이 없다고 했다. 그럴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자는 신비한 사실을 그 몸에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 생명을 그 몸에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신비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여인은 생리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이다. 기다림은 피로 엮어진 하나의 요람이 되었다가 기다림 이 지치면 자기를 파괴해 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기다림의 새 요람을 구축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림이 피를 먹은 간절함이라도 아무것이나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마침내 기다리는 대상이 올 때 피의 요람은 그를 영접해 온 생리가 동원되어 생명을 감싼다. 기다림은 사랑으로 바뀌어 그 생명을 감싸고 보호한다.
한 생명을 몸에 지닌 10개월, 그의 겉모습은 초라하다. 그것은 수난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랑을 하기에 온몸으로 자신을 내 바치는 수난자,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한 생명의 창조의 역할에 자기를 내댄 거룩한 모습이다.
내 몸 밖에서 들어온 생명을 밴다. 이처럼 신비한 사건이 또 어디 있으랴! 그래서 첫 크리스마스의 선지를 받은 여인은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반응했나 보다. 핏덩이 같은 어린것이 성인이 되기까지의 엄마의 정성! 그것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리까이다. 모성애! 그것은 개념이 아니라 피로 쓴 역사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감돌아서 생겨난 것인지 모른다.
마리아에게 잉태했던 어린아기는 말구유에 태어났다. 그것은 역사에 잉태한 순간이다. 그는 험악한 세계 속에 알몸으로 났다. 그를 감싸서 기른 요람은 유다교이다. 그러나 거기서 탄생해서 다시 작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리 속에 잉태했다. 그 무리들은 그를 피로 물들인 강보에 감싸서 길렀다. 오늘에 난 새 생명을 감싸서 보호할 품은 어디 있는가?
(197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