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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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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정치범?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많은 강연행각을 했다. 힘의 한계를 알아 내 딴에는 굉장히 사양했는데도 …

어떤 지방의 청년연합회가 주최하는 모임에 갔더니 큰 강당에 청중이 보잘 것 없었다. 주최측은 여러 가지 변명을 했다. 광고가 잘 되지 않았느니, 장소가 급작히 바뀌어졌느니. 청중의 다수는 그리 문제 아니다. 나는 준비한 이야기를 끝내고 그 밤으로 서울을 향해 버스정류장에 나왔다. 전송하는 한 목사님이 지나칠 정도로 이 밤의 강연을 높이 평가한다. 약간 민망할 정도로!

그런데 그는 문득 예수가 정치범이라는 강연을 했다는 보도를 신문에서 읽었는데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으니 해명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오늘 저녁에 바로 그 때문에 나오지 않은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을 이단자라고까지 합니다"라고 한다. 나는 약간 놀랐다. 그게 문제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된 것은 성서를 읽으면 곧 알 수 있는데 왜 그런 사실을 외면하며 왜 정치범이라는 말이 그토록 모독스럽게 들릴까?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됐다. 첫째는 이른바 정교분리라는 주장에 단단히 세뇌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권자들은 독재적일수록 국민의 적극적 참여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길든 짐승처럼 하라는 대로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만있기를 바란다. 그저 조용히 하라는 것이나 하면 된다. 적극 참여는 남의 제사상에 감놔라 배놔라는 격으로 들린다. 그건 모든 것이 제 것이라는 주인의식 때문이다.

일제는 물론 그랬다. 저들은 종교를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 적극적인 의미를 두고 참여하면 큰 일이다. 그러므로 단서가 붙었다. 그것은 종교와 정치의 분리이다. 그러면 정치가 모든 것을 장악한 마당에 갈 길이나 향할 곳은 이 땅에는 없다. 그러면 결국 타계로 탈출할 데는 동경만이 남는다. 일제는 이 길에 대해서는 방해도 없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후원했다—미소를 보이면서—그렇기에 그 불길처럼 이는 부흥회운동을 방해한 일이 없다—그 많은 군중의 움직임을 왜 그렇게 내버려 두었을까? 까닭은 그 자리에서 하는 설교는 이 세상은 죄악의 세상이니 허무하므로 저 천당만 생각하고 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스리기에 얼마나 편리한 도움을 주느냐! 타계까지 다스릴 흥미도, 능력도 없는 판이니 타계행로를 방해할 까닭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럼 민족적 의분이 없었는가? 그렇지는 않았다. 저들은 계속 "이 죄악이 찬 세상",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표현으로 이 세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비록 추상적인 표현이나 그 속에는 그 당시를 재배하는 일제의 비판도 포함시킨 것이다. 그것으로 민족의식을 표현했다. 그런데 죄의 규정을 개인의 윤리적인 것에만 국한하는 것으로 풀이하므로 정치적 압력을 잘 피해 왔다. 그러나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정말 구조적, 정치적 죄를 보는 눈은 흐려지고 자기 죄를 자백하는 데로 기울이게 했다. 그 죄는 이 세상의 어떤 것과의 관련에서 생긴 것도 다 포함된다. 이래서 결국 자학 운동이 회개운동이 됐고 이 자학성은 속죄행위로 선행주의 아니면 경건의 표현으로 헌금이라도 많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습성이 정치적이라면 아예 타락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듯하다. 또 하나는 '정치적'이라는 개념에 우리 나라에서 얻은 경험이 작용한 데서 온 것이 있다. '정치적' 하면 권모술수를 일삼고 협잡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도록 우리 나라의 정치하는 사람들이 더러운 인상을 뿌렸다. 나도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싫어하며 또 저 사람은 정치적이라면 곧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진다. 까닭은 사실 그런 의미로 쓰고 있으니까? 그런 이해에서 예수를 정치범이라고 하면 분개할만 하다.

그런데 정치의 본뜻은 그게 아니다. 희랍 말에서 온 'Politik'(정치)이란 뜻은 공동체의 질서 보존 또는 방향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뜻과 분명한 목적을 향한 계획적인 행위(실천)라는 뜻이 있다. 여기 중요한 것은 공동체라는 전제이다. 사람을 개별적으로만 보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의 운명은 이 공동체의 방향이나 체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르므로 그 개인의 바른 길을 위해서도 이 공동체의 방향이나 체질을 바로 잡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비록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도 정치적이 아닐 수 없다.

정치라는 정(政)은 바로 정(正)이다. 정치란 바르게 다스리는 것 즉 바른 질서를 위한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정치적이란 공동체의 올바른 질서를 위한 행위라는 뜻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가 정치범이었다는 것은 절대로 모독이 아니며, 또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한마디로 해서 예수의 설교의 중심인 '하느님의 나라'는 공동체적 실재 아닌가? 하느님의 나라가 이 역사에 온다고 하면 그게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또는 가난한 자, 부한 자라고 하면 그게 벌써 정치적 개념 아닌가? 가난하고 부하다는 것은 집단 속에서의 비교에서 오는 개념인 즉 그건 공동체를 전제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의 불균형을 전제한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 그 게 정치적 발언 아닌가? 또는 "화 있을 진저 바리사리인과 서기관들아!" 하는 경우 벌써 그것은 계층개념 아닌가? 그들을 그렇게 책망한 것은 저들이 윗자리에 앉아서 남을 억압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면 벌써 정치적 책망이다.

그런데 내가 예수께서 정치범으로 처형됐다고 한 강연에서는 그런데까지 전개한 것도 아니다. 단지 역사적 사실을 규명한 것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됐다. 이건 부정할 수 없지? 예수를 처형 한 것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예수의 죄 명은 "유다인의 왕"이라고 성서에서 전한다. 이것은 그가 유다 나라를 독립하기 위해 싸운 반도라는 죄명이다.

그 죄명을 빼고 생각해도 좋다.

십자가에서 처형됐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처형 법이다. 그런데 로마가 십자가에 처형하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국내적으로는 큰 죄를 범한 노예를 처형하는 데 적용했고, 국외 즉 식민지인들에게는 로마에 반역하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데 썼다. 그러면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됐다는 데 이론이 있을 까닭이 없으며, 그것이 그렇게 불명예한 일일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예수가 정말 유다독립운동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유다독립운동을 했다고 보지 않는다. 더욱이나 예수가 폭력으로 로마에 대항하려고 꾸민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로마 정부가 오해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비록 폭력으로 로마 전복을 꾀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의 행위가 정치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고 하는 결론은 말도 안 된다.

예수의 말씀이나 행위가 그저 "기도하시오, 하나님을 믿으시오"라는 정도라든지 윤리적으로 바로 살라는 정도였다면야 왜 로마의 눈에 그처럼 위험한 인물로 보였겠는가? 비록 폭력으로 정권을 뺏으려는 운동이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의심받을 정도라면 그만큼 집권자의 눈에 그 권력이 위협을 당한다고 보였기 때문이었음은 틀림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른바 정교분리원칙에 서서 하느님을 설교 한 정도라면야 종교의 나라 유다 땅에서 왜 하필 그가 많은 독립운동 가들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었겠는가? 가난한 자들의 억울함을 돕기 위해 저들의 입이 되어 주고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을 대신하려다가도 권력자의 눈에 거슬려 투옥되는데, 그 사회가 정죄하여 모든 권리를 박탈한 죄인들이나 투옥된 자들을 의로운 자로 영접하고 눌린 저들을 해방하려 왔다고 선언하는데, 그리고 그런 우리들의 친구로서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했는데 그래도 정치범이 되는 것이 이상한가?

왜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됐다는 데 그렇게도 놀라는가?

사실 그런 강연 후에 어떤 사람은 일주간을 두고 전화공세를 펴다가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내 동료들까지 괴롭히면서 나를 죄인 취급한 일이 있었고, 그밖에도 편지로 전화로 '친절'한 항의를 받았다. 그런데 난 저들이 그리스도가 정치범이라는 규정 때문이기보다는 자기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정치범으로 처형됐으니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반정부운동에 나서거나 아니면 정당에라도 가입하거나 만들라는 말을 한 일은 없고 또 그런 논리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묻고 싶은 것은 불의한 것은 불의하다고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안된 것은 안됐다고하고, 억울한 자는 도와 그의 편이 되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이냐 아니냐? 아니라면 그대로 있으면 된다. 그런데 불의한 걸 증언하는 행동을 비성서적이니, 비그리스도교적이니 하는 일은 그만 두라. 그러려면 당신들이 들고 있는 성서의 예언자들의 글부터 찢어버리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반기를 들어야 한다. 아니 신약에만 해도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불륜을 비판해서 처형됐다는 기사가 있는데, 다음부터는 그가 권력에 무조건 복종하지 않고 비판했으니, 마땅히 죽을 죽음을 했다고 하거나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반 한 장본인이라고 규탄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정치 단체'는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역시 '사랑'을 바탕으로 했으며 평화의 궁극적 '나라'를 지향한다. 그런데 근경에 정치적 의식이 높아가서 정치신학, 혁명신학이라는 것까지 나오게 됐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가 변했단 말인가! 아니! 그리스도교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변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가령 여기 물이 있다. 물은 고유의 성격이 있다. 그 성격을 지녀 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평면에 자리하면 생물들의 안식처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언덕에서 내리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폭포 같은 무서운 힘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물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물은 폭포라고 하는 것은 그 전체를 포괄한 규정은 아니다. 여기 첫덩어리가 있다. 첫덩어리는 그 자체의 성격이 있다. 그런데 그것에 어떤 강한 고체가 충돌하면 불꽃을 일으킨다. 그것은 그 속성의 일면에서 오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렇다고 첫덩어리는 곧 불꽃이라는 규정은 그 성격을 다 포괄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저항의 불꽃을 튀기는 것은 상황에 의해 생기는 일이다. 권력이 충돌하면 저항의 불꽃으로 되는 것은 그 속성에서 오는 필연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어떤 권력과 같은 것과의 충돌에서 복수나 증오의 화신 이 되면 그 때는 이미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권력에 개입하는 것은 사랑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체가 권력체가 되어 그것이 정좌하면 이미 그 본성을 잃어버린다.

예수는 정치폭력에 의해 처형됐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권좌에 앉기 위해 저항하지 않았다. 그런 뜻에서 그는 정치범은 아니었다.

(1975. 1.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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