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수난의 각오
마르 8, 31-38
1. 수난은 희망의 저울

화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불화와 속박의 현실 속에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사랑", "사랑" 함은 오히려 그만큼 증오가 차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 자체로 보아서 절대로 낙관할 수 없다. 기계 문명을 찬양하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 자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는 뿌리깊은 악과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역사 자체의 필연으로, 즉 역사 자체의 귀결, 역사의 저 끝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이라는 생각은 비성서적이다. 까닭은 그것은 성서의 본 뜻은 무시하고 헤겔-마르크시스트들 또는 미국의 낙관주의적 역사관에 서서 하느님 나라를 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역사의 구원은 그 자체의 필연에로 촉구하는 데서 온다고 본다면, 적어도 성서를 버려야 할 것이다. 아니 나는 이 역사의 자율적 회전에 브레이크를 거는 손에서만 구원이 온다고 믿는다. 이 역사의 바퀴는 그대로 두면 자멸할 것이다. 누가 그 방향을 저지하고, 바꾸어 놓아야 한다. 이 역사와 맞서야 한다. 역사를 가로막고, "아니다!"고 해야만 한다. 거기서 역사 안에 구원의 사실이 실현된다.

우리는 자신을 이 역사의 흐름에 내 맡긴 사람들이 아니다. 아니, 바로 이 역사와 마주 선 하느님의 사자들이다. 역사와 마주 선 하느님의 일꾼들이 할 일은 긍정보다 부정이다. ja보다 nein이다. 역사는 긍정 안 해도 그것대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긍정자는 필요 없다. 예수는 결국 이 역사의 바퀴에 맞섬으로써 수난당하는 것이 아닌가! 요한은 예수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니,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세상에 공명한다면 대세대로 움직이면 수난이 왜 올 것인가! 하느님의 종으로서 우리들이 할 일은 긍정이기 전에 부정이다. 그런데 복종하는 것을 긍정하라고 강요하는 불의한 사회 속에서 부정에는 반드시 수난이 따른다. 수난 자체가 의미가 있어서 수난을 당하거나 십자가를 지라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세상이 지우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아니>라고 하니까 오는 수난이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하느님의 세계,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수난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교의 실현을 위해서이다. 이 역사의 미래는 세계의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수난의 각오를 하느냐에 있다. 적어도 지금 우리는 그러한 처지에 있다. 우리에게 수난의 각오의 농도는 우리 나라의 희망의 저울이며, 또 기독교가 이 민족에게 참 관심과 기대의 초점이 될 수 있는 일차적인 조건이다. 이런 각도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성격을 보자.

2. 예수의 수난

마르코복음 8장 27절은 마르코의 분수령이라고 한다. 이것이 수난사의 돌입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예수에 대한 세평을 물은 다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음에 대한 제자들(베드로)의 대답이 이번 대회의 주제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대답을 예수는 긍정했나? 또는 부정했나? 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만일 예수가 베드로의 대답을 옳다고 했더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영광의 몸으로 심판에 임한다는 신화적인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과 전혀 달리 예수는 그리스도는 역사 안에서 역사의 문제를 걸머진 수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관이 비신격화되었다. 혹은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정하고 단지 자기의 갈 길이 무엇인가를 자각한 것이 된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대답 안했다고 해도 어떤 다른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다.

고난을 자각한 예수는 역사 밖에서, 역사를 향해서 어떤 간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인류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하는 이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할 때, 자꾸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의 수난의 의미를 등한하게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가 많은 기적을 베푼 얘기나 또 그가 부활한 얘기를 읽는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그 자신에 대해서, 그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기적도 보도돼 있지 않다. 땀 흘리면 목말라하고, 배고파하고, 울고, 흥분하고, 낙심하는 그의 모습을 전하지, 가령 칼로 찔러도 피가 안 난다든지, 홍길동처럼 하늘로 획 날아다닌다든지, 그의 적대자들이 그에게 접근하려다가 무슨 변고 앞에서 도망쳤다든지 하는 따위의 보도는 없다. 아니, 예수는 모든 인간과 같이 자연 법칙이나 역사 법칙 앞에서 그대로 제약당하는 존재인 것이다.

3. 예수는 왜 수난을 각오했는가?

교권에 의해서 형성된 이해대로 하면, 그가 고난받은 이유는 <하느님의 각본에 의해서>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실상은 역사의 필연성 앞에 피할 수 없다는 인간적인 자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고난을 역사의 평면에서 이해해 보자. 31절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내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그가 당한 고난의 성격이 표출된다. 그 고난은 여러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첫째, 자기 잘못 때문이거나,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나약함 때문에 당하는 피동적인 고난이 있다. 이런 고난은 우리의 삶에서 자주 일어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 때문에 스스로를 사회 혹은 주변으로부터 격리시키고, <혼자>이기를 고집해서 당하는 고난 또는 일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사람들에게 <범죄>로 이해되어서 또 벌로서 받는 고난 등이 다 이런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둘째, 이에 대해서 자각적인 즉, 뚜렷한 목적의식 또는 행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다.

예수는 이 중에서 어떤 고난을 받고 있는가? 공관서는 예수가 스스로 죽임을 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당한 죽임으로 이해한다. 그는 죽임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그 예를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그의 기도 장면을 통하여 본다. 그는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 알려고 몸부림친다. 그는 고난 자체에 의미를 두는 고행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난에도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고난 자체가 하나의 영웅적인 행위로서 찬양의 대상이 되고 뭍 사람의 환호와 감격 속에서 당하는 수난이 있다. 이런 경우에 그의 고난의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간에 패배가 아니라 그 영웅성의 완성으로 추앙된다. 그럴 때 군중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나, 동시에 그를 영웅화하고 신격화하므로 봉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둘째로 수난을 당하나 목격자들의 눈에 하나의 패배자로, 실패자로 보이는 수난이 있다. 존경하지 않고, 동정이나 살 그런 나약한 자로 드러날 뿐 아니라 나아가서 "저가 무슨 잘못 때문에 저런 수모를 당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하여, 적대자는 물론 그를 따르고 무엇인가 기대하는 사람들마저 실망하고 그의 무능을 원망하고 마침내 버리고, 저주하는 그런 수난이 있다. 수치스러운 고난이다. 이사야 53장의 <수난의 종>이 바로 그런 수난자를 드러낸다. 예수는 바로 이 최후의 수난을 말한다.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말한다.

4. 예수 고난의 역사적 측면

예수는 왜 이런 수난을 당해야 했나? 이것을 역사적 측면에서 이해해 보자. 첫째,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 때 이스라엘 민족의 길은 완전히 막혀 버렸다. 나라를 잃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됐다. 저들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은 야훼의 종교뿐이다. 저들은 <야훼의 선민의식>에서 살았다. 그러나 저들의 선민의식은 병들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다>함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위함이 아니고 역사, 세계,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 하느님의 뜻일 것이다. 그러나 저들의 선민사상은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굳어버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선민인가?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위한 선민이 됐다.

그러나 저들은 점차 선민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러한 자신 없는 선민 사상을 보강하기 위해 나은 사상이 <거룩한 남은 무리>라는 사상이다. 그 결과, 많은 그룹이 생겨서 자기들만이 거룩하게 구별된 선민이라고 해서 배타적이 되었고, 그래서 또 그 민족 안에서도 각자들 배타적인 그룹으로 분열됐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네파 등도 자기들만 구원받는 자로 자처했다. 그 결과는 그 외의 사람들을 죄인들로 구성하고 소외하게 된다. 그 그룹들도 결국 자기들 만을 위한 존재로 그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는 길도 자기만을 위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남을 위해 있는 존재>만이 <참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에서 스스로를 차단하면 역사에 반역하는 것이며, 자살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타락을 슬퍼하고 경고한 시인적 예언자들이 있었다. 이사야가 그이다. 저는 이스라엘의 수난을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남의 짐을, 남의 죄를 지는 그런 세계사적인 의미로 상승하려고 한 것이다. 이사야 53장은 고난은 타인을 위한 것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야훼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매 그 날은 길 것이요 … "

그러나 이스라엘은 남을 위한 이 질고를 짊어지려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당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러한 사명 즉 "남을 위해 자기를 내어 놓음으로만 자기가 살 수 있다"는 이 예언을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들은 세계사에서 고아가 됐다. 저들은 세계사를 위해서 선택된 본분을 잊고 이기적이 됐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저들은 역사의 앞을 보지 않고, 옛 것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를 이끌고 가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너희는 이런 것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다"고 했다. <새 것>, 즉 <새 역사>, <어제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은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과거에 고착되어 그대로 시들 뿐 아니라, 여호와를 독점하고 역사의 길을 막고 있다.

예수는 바로 "옛 것을 생각지 말고,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다"라는, 바로 그것을 바로 저들에게 선포하고 그렇게 행위한 것이다. "새 것I 오고 있는 역사의 발자취에 너희들의 거점을 옮겨야 한다. 그래야 너희는 참 세계를 위한 선민이 될 수 있고, 그 때만이 산다. 그러니 그 성전 위의 낡은 것을 헐어 버려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너 바리새인이여! 서기관이여!"라고 예수는 말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낡은 것에 집착한 화신들이었기에, 그래서 하느님의 오늘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힘을 부정하는 자리에서 있기에, <어제의 야훼 고백>을 <오늘의 여호와 고백>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새것, 새 질서가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옛 것, 지나간 것, 낡은 질서에 그냥 버티고 있었다. 이 거센 새 물결과 낡은 바위가 부딪히는 이 틈바구니에서 예수는 수난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민중의 민족적 염원에 대해 배신이다. 해방과 더불어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민중은 그리스도교에 일말의 기대를 갖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625, 419 등의 커다란 민족적 사건 앞에서 그 무능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랬던 까닭은 한마디로 수난의 각오를 완전 포기했기 때문이다. 제가 질 십자가를 안지고 2천년 전 예수의 십자가만 팔아먹은 탓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자신이 사형선고 받은 자임을 아는 자'의 길이다.

그 민족의, 세계의 새 가능성, 새 창조를 위해서, 그 역사의 진통을 그는 그 몸에 짊어진 것이다. 부활(새 세계)과 죽음(낡은 세계), 이 사이에서 깔려 죽은 그는 수난당했다.

5. 수난과 그리스도인

"나를 따라 오려거든!" 여기서 "나를 따르려거든"이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Imitation Christ)이 아니라 "그와 함께, 그의 일을 실현하려면"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 말은 자해(自害) 또는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 못하고 예수의 길을 가로막은 전형이다. 그는 자기 비전, 자기 소원에서 일보도 못 나선 자로서, 과거에 형성된 것을 절대화한 자니까 예수의 길을 볼 눈이 없었다. 자기를 부인한 예는 예수의 겟세마네 장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자기의 이해, 자기 집착을 과감히 차고 나와 하느님의 뜻에 복종한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다" 함은, 역사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대의(大義) 앞에 굴복하고 새 역사 앞에 낡은 자기를 버리는 일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시작된 그 반열에 선 제자리에서 제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다는 쥐의 각오가 있는 자에게 가능하다.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등장했을 때 왕권은 쇠잔할 대로 쇠잔했고 그것은 이조 500년을 이끌던 이데올로기였던 유교가 맥을 못출 때마다 이미 외세의 침범이 시작됐을 때 동학, 농민봉기가 일어났으나 외세를 등에 업은 정부군에 의해 좌절을 거듭했다. 동학은 가톨릭의 상륙을 크게 의식했다. 그것은 반발과 모방으로 대응했다. 이 동학운동의 바람과 조직을 타고 농민의 봉기를 일으켰다. 패배의 한을 안은 민중은 그리스도교에 많아 가담했다. 저들에게는 그리스도교가 그들의 뜻을 이룬 하나의 새로운 장이었다. 그 결과가 31운동으로 응집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막히자 교회 지도층은 피안의 종교로 맥을 이어갔다.

6.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사명

이제 기독교가 질 십자가는 무엇인가!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특히 교회의 젊은 세대들일수록 공공연하게 한국 교회는 무능하다고들 말한다. 왜? 조직이 튼튼하지 못해서, 무식한 사람들의 집단이어서 그런가?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교회의 울타리에 안주하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수난의 각오가 없어서 무능한 것이다.

수난받을 그 각오만 서면 우리는 반드시 산다. 하느님이 새 길을 주실 것이다. 만약 이제 우리가 참 화해와 자유를 위한 투쟁에 선다면 어떻게 될까? 영웅으로 추대되지 않는다. 딴 누명으로 치욕적인 수난을 당할 수 있다. 오늘의 정치적 술수는 순교자를 내지 않는다.

하느님의 선교는 절대로 군왕직, 영웅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오히려 죄인으로 몰리고, 침뱉음을 당하고, 구걸하는 초월자 같은 모습으로, 즉, 억울한 수난의 액체처럼 숨어들면서 그의 구원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1969. 10. 기장총회 기조강연)

TAG •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