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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사상의 힘
1. 종말사상의 배경

이우식 : 1월호 인터뷰를 할 때 교수님과 함께 올해가 우리 민족에게는 크나큰 고난의 해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제는 629선언을 국민의 힘으로 쟁취한 후라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그때처럼 암울하게만 보이지는 않는군요. 교수님께서는 그 당시 당장 먹고살기 힘든 사람이 아니면 종말론적 희망을 품을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먼저 유다교 안에서 종말사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주십시오.

안병무 : 구약에서는 역사가 완전히 없어진다든가 완전 종말이 일어난다는 사상은 없습니다. 다만 역사의 끝이 온다는 사상이 있는데, 여기서의 끝은 완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전환점 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죠. 즉 새로운 시기가 시작한다는 의미에서의 끝인 겁니다. 그러니까 연속성은 언제나 있죠. 그러다가 이란 계통의 고대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역사만 아니라 모든 정치가 완전히 끝장난다는 묵시문학 사상이 유다교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에서 들어온 묵시문학 사상에서 중요한 것 하나가 역사의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끝이 있다는 사상은 역사관에서 보면 거의 유일한 것입니다. 역사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는 목적론적 역사관이죠. 종말론에 의해서 형성된 목적론적 역사관은 유다교와 기독교에서 확실해지지요. 역사가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관은 헤브라이즘밖에 없다고 봐요. 다른 역사는 목적이 없이 그 냥 생성 발전되는 것이죠. 종말론은 역사에 목적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거지요.

2. 예수의 종말의식

이우식 : 종말사상은 역사의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면 예수의 말씀 안에 종말론적인 가르침이 많이 담겨 있다는 것은 곧 예수의 역사의식이 투철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말씀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안병무 : 묵시문학적 영향권 안에서 예수를 이해하기로 하죠. 초대 교회도 그렇게 이해했으니까. 그런데 유다교에 있어서 묵시문학은 언제든지 유다 민족주의와 완전히 결합되어 있어요. 다 망한 후에라도 메시아가 와서 모든 것을 재건하는데, 그 메시아가 바로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따라서 편파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에 언제나 긴장관계가 형성됐어요. 역사의 종말이라면 보편적인 역사 곧 온 인류에 해당되는데, 유다인들은 그것을 유다 중심적으로 생각했으니까 그 둘 사이에 긴장감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데 예수에게 와서 유다 민족주의라는 것이 지양되었죠. 따라서 보편적인 종말사상으로 선포되었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 15)는 것이었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만이 수립되는 것을 의미하죠. 예수 시대에는 온갖 주권들이 있었어요. 로마제국을 위시하여 그 밑의 헤로데, 또 그 밑의 특권층 등. 그런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주권만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선포한 것은 사실상 기존 로마제국을 위시한 모든 주권은 끝났다는 반주권 선언과 다를 바 없어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말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무서운 정책적인 배경이 숨어 있는 거예요. 무서운 소리입니다. 사람의 나라들에 대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이런 전통은 고대 종족동맹으로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지요. 그들이 내세운 기치가 '야훼만'(모노 야훼이즘)입니다. 에집트에서 들어온 하삐루들이 가나안 군주 밑에서 예속되어 중노동을 하는 농노 들과 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열두 지파라는 종족 동맹,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야훼만'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결성되었습니다. '야훼만'이란 것은 종교적으로 우리 종교가 제일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체의 군주 세력에 대한 투쟁 선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200년 동안 군주 없는 평등사회를 유지해 왔어요.

그러니까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때 설명을 안 한 이유가 유다인들에게는 그 소리가 곧 하느님만이 우리의 정권이 되어야 한다는 걸로 들렸기 때문이죠. 동시에 그 소리는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온갖 권력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던 겁니다. 싸움으로 볼 때 종말론이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 예수가 특별히 야훼만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라고 주장한 것은 부정한 권력이 사람을 지배해서 사람을 노예화시키는 것은 없어져야 한다는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3. 초대교회의 종말 의식

이우식 :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예수의 선포에 그토록 힘찬 종말론이 깔려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쳐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있게 선포된 종말사상이 초대교회에서는 어떻게 계승되는지 궁금합니다.

안병무 : 예수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가 현재적인 것이냐 아니면 미래적인 것이냐에 대해서 학자들끼리 논란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이 둘 중에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내 현재 삶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결정 납니다. 누구든지 내적 희열이 느끼고 있는 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하느님 나라의 현재를 주장하게 되어 있고, 염세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 나라는 오지 않았으며 앞으로 올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말할 수가 있죠.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복하는 대신 예수의 의미를 부각했죠.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인데, 예수가 곧 메시아였다고 주장하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다는 쪽으로 기울어지지요.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이 연결이 되는 거지요. 그리스도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현재화하는 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예수의 말을 반복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수의 내림'이 미래에 실현되는데 그때가 종말 때라는 생각도 버리지 않았어요. 때문에 성서에 각기 다른 양상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이게 초대교회의 고민이었죠. 현실을 긍정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고, 현실을 부정하면 예수의 의미가 없어지고, 하여간 자신의 현재를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애썼지요. 그래서 예수가 다시 온다는 긴장은 언제나 있었어요. 하느님 나라, 종말하고 예수가 오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데에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70년에 전쟁이 일어나서 완전히 망해 버렸던 것이 큰 변수로 작용했죠. 바로 이것이 종말이 아니냐는 생각으로 각성하여 이것을 분기점으로 마르코복음서가 예수의 수난사를 종말적 시각에서 서술하게 되는 거죠.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돼서 마지막에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비명을 질러도 하느님께서 대답을 안 해 주시는 철저한 암흑의 시대. 이렇게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종말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종말론은 다시 말해 철저한 심판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 종말론은 예수 이후로 자꾸 퇴색해 갑니다. 왜 퇴색해 가냐하면 종말신앙과 소유체제는 양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정착을 해서 재산을 갖고 가정을 갖고 하면 예수가 말하는 종말론이 성립이 안 되지요. 가진 자일수록 언제든지 종말론하고 거리가 멀죠. 그런데 기독교가 정착을 하고 그리스도인들도 정착을 하니까, 종말론을 순수하게 설명 안하고 번거로운 이론을 갖고 자꾸 우회하게 되어서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었죠.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예수 당시에는 예수 자신이 아무것도 안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순회하며 설교하는 떠돌이 생활을 했지요. 주로 농촌 지역에 다니면서. 그런데 바울로가 선교할 때는 그 장소가 모두 도시였기 때문에 농촌의 도시화라는 것이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까 예수의 기본 생각이 무뎌져서, 이미 자기 손안에 주어진 것을 되도록 하느님 나라와 연결시켜서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은 허공에 뜬 얘기로 변질된 거예요.

4. 피안 사상과 종말 사상

이우식 : 교수님 말씀을 듣다 보니 요즈음 각종 신흥 종파들이 득세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군요. 실제 생활과 유리된 현 제도권 교회가 주지 못하는 생동감 및 현장감을 신흥 종파들이 제공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종파에 많이 빠져드는 것 같던데, 그런 종파에서 말하는 말세론과 성서의 말세론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안병무 : 그것은 종말론과 피안 희망을 혼동하는 데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났던 오대양 사건을 비롯하여 미국의 예수 피플은 피안 표상을 근거로 해서 수백 명을 한꺼번에 죽였지요. 피안 표상은 인간을 영과 육으로 이원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자연적으로 생긴 거지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육체가 지배하는 세계라 하며, 육체적인 역사가 끝나는 게 종말이고, 그다음에는 본격적인 삶이 온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시키지요.

그런데 피안 표상은 개인이 단위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고, 선한 일을 하면 어떻고,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았으니 어떻고 등. 피안 신앙이라는 것은 개인주의와 연결되어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종말론은 절대로 개인적이 아닌 집단적인 기다림입니다. 또 하나는 피안적인 사상은 그 전개 방법이 우주론적입니다. 어떤 주기가 있어 언제쯤 다시 봄이 오고 겨울이 오고 하는 자연 현상과 개인의 운명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즉 역사 의식이 없는 거지요.

역사 의식은 집단 의식인데, 한 사람의 운명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를 파악한 후 거기서 내 자리를 찾는 것이죠. 종말론은 개인의 운명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느님의 주권만이라고 말할 때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전체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종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의식입니다.

바울로는 내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비단 동족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참 구원으로서의 종말적인 새 역사를 갈망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기독교인의 기본 자세여야하지요. 우리도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이루시려는 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해야겠다는 자세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어쩐다하는 종교적인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지요.

우리는 오랫동안 후자의 종교적인 이기주의에 빠져들어서, 종말론을 악용해서 사람들을 협박하고 복종하게 하는 도구로 사용해 왔지요. 그러다 보니까 종말론은 개인적으로만 적용시켜서 역사 의식도 흐려졌고, 종말적인 하느님의 구원의 과정에서 내가할 일이 뭐냐는 책임 의식도 사라지게 되었죠.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역사에서 버림받은 과정이죠. 이런 생각이 한국 교회에 80-90%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것이 비극이지요.

5. 초기 한국 교회에 있어서의 종말사상

이우식 : 종교를 앞세워서 무지한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는 것과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 하느님의 나라를 펼치는 것은 그 시초에 있어서는 종이 한 장 차이와 같이 유사하군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지만서도요. 그러면 그리스도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 왔을 때, 한국인이 생각했던 하느님의 나라는 피안적인 희망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종말론적인 희망에 가깝습니까?

안병무 : 저는가톨릭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개신교를 보면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지도층은 놀랍게도 피안적인 것으로 종말론을 대신해요. 지금은 괴롭지만 이 다음에 피안에 가서는 행복하다는 식으로 가르치기도 했지요. 현실을 체념시키는 쪽으로 기능을 했어요. 이조 말엽에도 나라의 정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무마했고 일제 시대에도 그렇게 해 왔습니다. 아편 노릇의 역할밖에 안했습니다. 마르크시즘이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주장한 것도 종말론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밀려온 민중도 그랬냐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제가 짐작하기로는 무엇보다 동학란에 참여했던 많은 농민들, 의병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들어 왔을 겁니다. 뭐 홍경래의 난에서부터 시작해도 좋겠죠. 이런 사람들에게는 민족적인 염원이 팽배해 있었어요. 새벽 기도회 때 보통은 믿으면 천당 간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이 나라가 언제 일제에서 해방되는가 하는 게 서려 있어요. 간도가 우리 독립운동의 본거 지여서 더 심한지 몰라도, 삼엄한 감시 속에 목사들이 새벽 기도에 모여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가 언제입니까?' 하고 기도했지만, 그 말은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언제 우리가 나라를 되찾을 수 있습니까?' 하고 통하는 거였어요. 사탄이라고 할 때에는 늘 마음 속에 일본 제국주의를 직결시켰어요.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듣고 있었어요. 다시 말해서 민중들은 새 세계를 간절하게 열망하였는데, 그것이 종말론에 훨씬 가까운 것이었지요.

이우식 : 초기 한국 교회의 신도들의 많은 수가 민란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말씀 인상깊게 받아들였습니다. 민란의 발생 경위를 볼 때 장두가 나서서 주도하고 민란이 끝난 후에는 장수만 참수형을 당하고 농민들은 그대로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런 민란의 연장선상에서 최근의 6월 혁명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러한 민중의 움직임은 종말 사상과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안병무 : 한국의 동학란을 대표적으로 들어보면 그들이 들고 나은 기치가 '인내천'이었는데, 철학이 있어서 내걸은 것이 아니라 싸우는 과정에서 나온 것 같아요. 하지만 나는 종말을 지향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민중사건이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동학을 비롯한 모든 민란이 억눌리고 억눌려서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들고일어나는 거지요. 그 점에서 '야훼만'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고대 종족 동맹과 상통하죠.

'하느님만'이라는 사상은 하느님과 민중 사이에 사이를 두지 않아요. '인내천'이란 것도 난 그렇게 봐요. 우리말에 국민이라는 말처럼 위험한 말이 없어요. 하늘하고 사람 사이에 국가라는 지배 체제가 생기거든요. 이걸 거부하는 것이 '야훼만'이라는 사상입니다. 그런 면에서 비판하면 동학은 그때 왕권을 부정하지 않았어요. 전략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왕권을 인정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싸움이 진전 되었으면 그런 것이 없어졌을지도 모르지요.

'하느님만'이라고 할 때는 비단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중간에 가로채는 정치 권력만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독점을 비롯하여 모든 독점제의 형식을 배제하는 것이죠. '하느님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했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죠. 이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상과 같은 것이니까. 제가 하느님 나라와 종말론을 연결시켜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당면과제가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세력과의 투쟁이라는 점입니다.

부정한 독점 세력과의 투쟁이란 점에서 민란과 종말론은 같은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한 온갖 세력과의 투쟁, 이것이 종말론적 도상에 있는가장 구체적인 싸움이지요. 그건 예수 때나 민란 때난 지금 현재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난 소급해서 고대 종족동맹까지 올라가죠. 화산맥이라는 것이 있어서 활화산이 그 맥을 따라 터 지는데, 지금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예수 사건과 같은 맥에 있다는 것이죠.

6. 종말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

이우식 : 우리 시대는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종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핵무기, 공해 현상, 자원의 고갈 등 여러 가지 현상은 지구의 종말을 생각케 만드는데, 이러한 종말은 하느님의 주권만을 선포하는 종말사상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안병무 : 묵시문학은 맨 마지막 사건에 대해서 굉장히 사변적이고 서술적입니다. 그래서 우주가 어떻게 무너지고, 하늘의 별이 어떻게 떨어지고, 바다가 빨간 피로 변하고하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그것에도 실제로 자연주의적인 서술이 있고 역사적인 것을 상징화해서 그렇게 서술한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묵시문학은 예수 당시의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사색하면서 이러리라 짐작하거나 그것을 설명하거나하는 것이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올 것이라는 설명이 전혀 없죠. 이런 걸 서술하는 것은 일단 자기와 객관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객관화하면 그렇게밖에 서술이 안 될 겁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객관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저 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싸움을 떠나서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거지요. 싸움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 싸움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사변을 펼치지를 못하지요.

뭔가 눈앞에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종말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은 예수에게서 없습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수만 아니고 그 후에도 없어요. 그러나 발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종말의 도래는 사람을 통해서 오겠죠. 그러니까 책임은 사람이 지도록 되어 있죠. 사람이 악하게 되어 가지고 전쟁 위험에 몰아넣는 것도 결국은 자본의 독점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죠. 한 국가 안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소련 등 블럭화된 독점 세력이 팽창해 가지고 마침내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결코 착오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정말 종말을 사는 사람은 단순히 이런 사태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종말이 온다 그런 것이 아니라, 종말 한복판에서 그런 독점 세력과 싸워 나가지요. 그것을 끝장이 나도록 싸우는 것이 하느님 나라 곧 종말로서의 하느님 나라 현실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거죠.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독점 세력과의 투쟁, 그것이 종말을 사는 사람의 삶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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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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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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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절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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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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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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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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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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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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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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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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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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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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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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