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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민중신학은 성서의 재발견과 한국 민중의 재발견이 마주침으로 생겨난 것이다. 딴말로 하면 한국의 민중의 현장이 성서의 민중적 성격을 발견하게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래에는 성서를 한마디로 하면 그리스도론으로 봤다. 이에 루터가 성서를 "어린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누운 것이 성서"라는 명언을 남겨 성서의 문자주의에서 해방되는 계기를 주었을 뿐 아니라 성서의 해석권을 "성서를 성서로 하여금 해석하게 하라"고 하여 사실상 성서 해석의 특권층을 제거함으로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서 해석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성서의 해석 영역이 교회에서 대학으로 옮겨짐으로 성서를 역사학의 대상으로 삼아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이 파문을 일으키고 교회의 탄압이 있어 많은 곡절이 있는 관계로 그러한 자유가 실제로 실효하게 된 것은 불과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따름이다. 그 결과의 소극적인 점을 한 가지로 집약한다면 역사의 예수에 대한 불가지론에 빠진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마침내 역사의 예수는 의미가 없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결론에 고착되었다. 그러나 그런 결론에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까닭은 케제만의 말대로 역사의 예수를 뺀 그리스도론은 결국 가현설(Docetism)에 빠지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결코 이념사가 아니라 역사의 한 사건에 의해 발단이 되고 그를 원천으로, 중심으로 지속되어 온 것이다.

바울은 이 사건을 십자가 사건에 집약했다. 그러므로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노라고까지 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사건을 바울이 역사의 한 인물 예수에게 이러한 단독사건화했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객체가 되고 그것을 향한 사람들은 주체가 되어 이른바 주체의식이 함정에 빠져 그것을 뛰어넘지 못해 몸부림쳤다. 그런데 이것은 일부 헬레니즘의 책임도 있지만 다분히 인격(Personality)이라는 가공적 객체를 극대화하고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해석한 서양에 책임이 있다. 어떻게 2천 년 전 팔레스틴의 한 청년의 운명이 오늘 여기 사는 우리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가?

이 질문은 우리의 70년대의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서 철저한 물음, 아니 절규가 됐다. 그 상황은 단적으로 신 부재적 고난의 현장이었다. 그런 현장에서 예수를 찾는 일은 익사상태에 있는 자에게 주어진 장식품 이상의 의미를 넘지 못하거나 아니면, 물속에 뛰어들어 나를 건지던 자와 더불어 익사하는 그런 이어야 한다. 이런 정황에서 예수를 재발견하고 민중을 발견하게 한 것은 마가복음이다.

 

1. 마가복음은 바울의 모든 편지에 대해서 극적 전환을 한 새로운 문학서다. 그 사이에는 역사의 단절이 있었기 때문에 삶의 자리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서술법에서, 언어에서, 그리고 내용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그것은 불트만 등이 말하듯 결코 확대된 케리그마가 아니라, 케리그마화한 그리스도교에 제동을 걸고 마가의 선 삶의 자리와 예수 전승 중 마가가 쓴 그 현장과 호응되는 것을 선택했다. 바울은 헬레니즘 영역의 지식층의 세계관을 의식하므로 변증적 논리를 전개하는 데 대해 마가는 얘기에서 시작해서 얘기로 끝낸다. 그 얘기는 전형적인 민중언어이면서 그 내용은 개념적 설득이 아니라 하나의 산 삶을 통째로 제시한다.

 

2. 마가는 예수의 교훈집이 아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도그마(Dogma)를 뛰어넘고 어떤 인간 집단과 더불어 행진하는 예수다. 석가처럼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입산해서 도통함으로 날마다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에 이르는 그가 아니라 처음부터 민중 속에 들어간다. 그가 있는 곳에 민중이 있고, 민중이 있는 곳에 그가 있다. 처음에 나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오클로스라고 이름 부른 것에 충격을 받았다. 마가에 36회나 이 단어가 적용된다. 그런데 이 오클로스가 노예, 고용병, 농노 등 가장 비천한 자들에게 적용되는 명사다. 그래서 오클로스가 예수에게 대하는 자세와 예수가 이에 대하는 자세를 분석해 본 글을 썼다. 이 관찰에서 발견한 것은 예수는 오클로스에게 대해서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무조건적이란 과거에 대해서 묻지 않고 미래에 대해서 어떤 윤리적 보장을 다짐하지 않고 단지 현재 상태를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현재 상태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억압 또는 버려진 상태다. 그런데 예수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들과 사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양면으로 부각된다. 하나는 도대체 그런 자들만이 예수에게로 물려왔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사흘씩이나 먹지 못한 5천여 명 같은 그런 자들 만이 그에게 몰렸다. 이에 반해서 그렇지 않은 계층은 그를 경원했다. 그런 계층은 서기관 또는 바리새파라는 이름으로 자주 대신하여 등장한다. 등을 돌리는 부자, 여자를 산 사람, 밭을 산 사람 등은 그런 것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그에게 오는 것을 거절했다. 반면에 예수의 행태에서는 이 점이 뚜렷하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2:16)고 한다.

바리새 체제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면 여러 규율 중 음식 먹을 때 하는 정결예식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암하아레츠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예수는 오클로스를 불러 모으고 무엇이든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귀가 있는 사람들은 들으라(7:15)고 한다. 이것은 히피족 지지성명 아닌가? 화이트칼라족에 대한 무시 아닌가. 그는 바로 굶주린 집단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겼다. 누가 저들을 정죄하나? 예수는 단 한 번도 저들을 정죄하지 않고 저들을 정죄하는 자들만을 비판했다. 이런 편애적 자세는 큐(Q)자료에서 여러 비유 등에서 잘 나타나 있지만 마가에서는 실제로 그런 무리와 더불어 함께하는 예수가 걸어갈 뿐이다.

 

3. 이와 관련해서 지적해야 할 또 다른 특색이 있다. 그것은 예수가 바리새파들이 율법체제를 만들고 민중을 그것에 맞게 살도록 강요하고 에세네파가 엄격한 공동체의 규율을 만들고 그것을 찾는 자를 훈련했고 현대에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 설정을 하고 역사를 계급투쟁사로 봄으로 프롤레타리아에게 정신적으로 의식화시켜서 총을 메고 전선에 나가 죽게 하는 것을 혁명의 길이라고 하고,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신학자 중 일부가 어떤 투쟁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민중을 투사로 몰므로 사령탑과 희생자가 구별되며 혁명은 인간을 위한 것인데 어느덧 인간 하나하나의 인권이 무시돼 버리는 현상에 대해서 예수는 저 민중에게 어떤 투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이른바 의식화 작업을 하므로 혁명의 완수를 위한 희생의 제물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어떤 이데올로기도 제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과 싸우며 투쟁이라는 안목에서 볼 때 거의 무의미할 뿐 아니라, 장애가 되는 병자, 약자, 그리고 벼려진 자 등 이른바 인간들이 찌꺼기처럼 아는 저들의 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잃은 양 한 마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99마리를 내버려 두고 그를 찾아 떠나는 목자의 비유에서 보여 주듯이 했다. 하나님의 급속한 도래라는 선언은 바로 민중의 희망의 집약이었다.

 

4. 계속 질문을 받는 문제에 언급하겠다. 그것은 도대체 민중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대답에 직접 응할 흥미가 없다. 까닭은 그것이 민중의 정체를 흐리게 할 뿐 아니라 나가서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개념이 실체로서의 민중을 가두어 버리는 게토 역할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개념화하려는 것은 지식인의 버릇으로서 왕왕 지적 유희에 빠지게 한다.

그 대신 다른 측면에서 이 안에서 찾아보시오 할 수 있는 울타리를 그어 볼 수는 있다. 나는 마가복음에서 민중을 찾아보시오하고 싶다. 나는 전에 마가의 오클로스를 일일아 찾아서 그 성격을 표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다음 단계로 마가가 전한 예수라는 사건 전체에서 민중의 상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이 말은 예수와 오클로스를 주객으로 구별 말고 그것을 통째로 더불어 사는 그 세계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갈릴리의 민중과 예루살렘의 민중 중 어느 것이 민중이냐? 예수도 민중이냐? 하는 질문 따위는 무의미하다. 마가에 등장하는 예수는 서구에서 발달한 개별 인격 등에서 말하는 유아독존적 개체가 아니라 집단성을 지닌 명사다. 마가에 서술된 전기적 요소는 그의 이력서가 아니라 사회전기다. 그러므로 그의 생에서 민중을 떼어 놓고 보면 그의 참모습을 알 수 없으며 반대로 그 민중을 예수와 떼어 놓고 고찰해도 민중의 참모습을 모른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와 그리고 민중을 대하는 그 관계까지도 제외될 수 없다. 대립관계에도 민중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틀어서 그 모든 것이 민중의 모습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중에 대해 고정화되는 개념정립을 거부하는 것이다.

 

5. 위의 전체의 구체적 예로서 예수의 수난사를 일부러 구별해서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암중모색한 한두 가지를 언급하겠다.

예수의 수난사는 한 개인의 수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민중의 애환을 극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우리는 마가의 수난사를 읽으면 놀 랠 것이다. 이유는 그 안에 어떤 종교적 초월 현상도 완전히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판을 치는 것은 **리와 물리적 힘이다. 겟세마네에서 억지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 처형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배신, 배반, 그리고 음모, 위증, 야합, 처형이 있을 뿐 그것을 구경하는 유신론자나 어쩌면 도망친 제자들도 기대했음직한 신의 개입 따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은 희랍문학에 나오는 한 비극적 영웅의 최후로 서술되지도 않는다. 그저 힘 앞에 꼼짝못하고 다소곳이 죽어가되, 오직 하나님만 찾다 죽어 가는 것이다. 이게 한 개인, 한 유대 청년의 고유한 우발적 비극이냐? 그렇다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아니 복음편자는 그것을 이사야의 수난의 종의 표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그 수난의 종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 개념인 것이다. 바울이 아담-그리스도 유형론을 말했는데 근본적으로 그러한 상황에 있는 집단이 역사를 통해 계속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바로 그런 집단이 당하는 현장에서 현재적 사건으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다.

 

6. 이렇게 무능한 죽음, 그 민중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나? 아무 저항도 없이 손에 바늘, 돌 하나 갖지 않은 예수 그가 로마 패권을 한 손에 쥔 빌라도 법정에서 초라하게 당하기만 하는 마당에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으니까 침묵을 계속하던 예수는 당당하게 "네 말대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무력한 게 무슨 왕이냐? 그렇다! 그는 왕이다. 왕이란 현대적 개념으로 하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 즉 민중이라고 번역하면 된다. 그 왕은 칼은 칼로의 악순환을 제 목숨으로 내댐으로써 단(斷)하는 의미에서 왕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악의에 찬 뜻에서 민중신학은 폭동신학아니 운운했다는데 그것은 무지의 소치로 해버리고 분명히 말하는 것은 민중신학은, 눈은 눈으로, 복수가 복수를, 되는 되로라는 악순환 속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수난만 당한 민중이 더 이상 그런 도가니 속에서 희생물이 되기 싫어 몸을 내대어 그 악순환을 단 한 것이 민중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 한 일이 옳다!

이들이 새 역사의 주인이다. 이들이 이겼다고 하느님이 오른손을 번쩍 치켜든 사건이 부활사건이다. 이 사건은 바로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민중의 서(書), 마가의 민중사회 전기의 결론이다.

(1981. 9-10. 『교회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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