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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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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화하는 손

이제라도 새해 인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옥중에 있은 10개월 동안 국내외 여러 친우들의 성원을 어떻게 다 보답하리까! 옥중에서도 듣고 있었지만, 나와서 자세한 소식을 듣고 보니 감사한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줄 알면서도 각 사람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낼 겨를도 없어서 우선 지면을 통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선 본지를 계속 성원, 애독해 주신 지우(誌友)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계속 제 글도 한 편씩 실릴 수 있었던 것은 전에 설교한 초고를 다듬어 성문화가 송기득 선생과 그밖의 몇 분의 헌신적 손질이 있어서 가능했으며, 본지가 그대로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준 박사를 위시한 여러분들이 자진해서 글을 계속 보내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위에서 부끄러운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내 한 일이 부끄럽다는 것이 아니고, 내 한 일에 비해 너무도 과분한 사랑의 성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풀려난 이틀 후인 31일, 기독교회협의회 주최로 이해동 목사와 나의 출옥을 환영하는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얼굴을 내밀기가 싫었습니다. 환영이 다 뭡니까? 무슨 대수로운 일을 했다고, 더욱이 함께 갇혔던 동료들 태반이 아직 옥중에 그대로 남아 수난을 당하고 있는데 먼저 나왔다고 해서 어떻게 그 환영을 기뻐하겠습니까.

그 모임에서 김정준 박사가,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나온 요나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우리가 나오게 된 것은 하느님이 고래에게 토하라고 명령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이 모인 이들을 감격케 했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요나가 하느님의 명령을 회피한 죄를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출옥 환영예배니 그랬을 터이지요. 그러나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까닭을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가라!", "해라!"라는 하느님의 뜻을 번연히 알면서도 비겁하여 도망치려 했던 요나! 그래서 그에게 죽음의 고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벌이라기보다는 비겁하고 약한 그를 담대하고 강하게 만들기 위함이었지요. 그의 말씀 뒤에 날더러 이야기하라더군요. 그래서 전혀 준비도 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옥중에서 늘 생각하던 것이었기에 여기에서 그 골자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제 심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나는, 하느님의 호령에 놀란 고래가 다 토하지는 않고 겨우 재채기를 했는데 삼키운 이들 중에 가장 가벼운 두 사람이 밀려 나왔다고 했습니다. 아직 고래는 다 토해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호령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스스로 입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러분들의 줄기찬 노력과 외침을 그의 입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고래가 다 토하지 않는 것은 그 목소리가 작은 까닭입니다. 그러니 보다 더 줄기차게 외쳐서 다 토하도록 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재판은 종교재판을 방불케 했습니다. 까닭은 이번 사건이 명동성당에서 신구교 합동예배 때 했던 선언 그리고 원주 가톨릭교회에서 일치 예배 때의 설교, 그 밖에 다른 모임에서 한 설교 또는 기도 내용이 문제 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소된 18명 전원이 모두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판정에서 '해방의 신학'이 문제 되고,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문제 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준이 문제 됐습니다.

그런데 재판 도중에서, 정부를 대표한 검찰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얼마나 몰이해한가를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시작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인 우리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보도된 대로 우리가 한 일이 민중을 선동하여 폭동을 도모한 것이라고 기소했습니다. 그들에게 종교는 현실 문제와는 무관하고 단지 정신적 또는 피안적인 것만이라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어떤 종교도 권력 또는 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에 요직에 있었던 한 사람이 로마서 13장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움직임을 비판하는 것을 회상하면서 옥중에서 그 대목의 문맥을 세심하게 더듬어 봤습니다. 그 결과 문맥상으로 12장 14절부터 13장 10절까지는 연결된 한 항목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4절은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복을 빌고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시오"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과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를 밝히고 있습니다.

증오하거나 복수하는 따위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19절은 "복수하지 마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악이든 불의이든 눈감아 버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아니 복수를 "스스로"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겨 두시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악하고 불의한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는 신앙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20절)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이고 악이고 가리지 말고 덮어두라고 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뒤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시오"(21절)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투쟁의 목표이며, 방법입니다. 그리고나서 13장에서는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이 말씀으로 '권세'와 정권을 일치시키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권세'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권세'를 자신과 일치시키는 사람은 자신을 신격화함으로써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사람입니다. 통치자란 악과 불의를 막고 선과 의로움을 수호하라고 명령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불의한 자에게는 두려운 대상이며, 의로운 것을 위한 싸움을 하는 이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 통치자는 하느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인이 그대로 침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권세', 곧 하느님의 권세를 배신하는 것이 됩니다. 이럴 때 정권과 그리스도인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라도 복수와 저주로써 싸울 것이 아니라, '사랑'의 분노로써 싸워야 한다는 것이며, 그 '사랑'은 악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써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간청, 충고, 비판, 경고를 할 수밖에 없으며 그 소리가 귀에 들어가게 하는 길이 막힐 때는 성명 또는 행동으로 시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통치자가 "하느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려는 마음에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피를 흘리게 될 폭동 따위를 원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기본 입장을 모르는 것이 비극이며,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이제는 이 민족에게 깊은 뿌리를 박았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이 민족을 사랑하고 어떤 행동이라도 성서에 입각할 줄 알기 때문에 제발 간섭하지 말고 믿어 주거나 내버려 둬 달라고 했습니다. 까닭은 몰이해로 정부와 그리스도교가 대립되면 민족적으로 큰 비극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까지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정권에 도전한 일은 없고, 단지 정권을 비판하되 그것도 선한 채찍질로 한 정도였습니다. 이번 31절 사건도 이 이상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의 충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욱 슬픈 일은 우리들이 시작한 '갈릴리교회' 설립을 반정부 운동단체로 규정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가난한 자, 눌린 자와 더불어 웃고 운 예수를 흠모해서 '갈릴리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신에서 바울로는 "기뻐하는 자와 더불어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오"(로마 12, 5)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보기 위해 이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해방의 신학으로, 산업선교로 나타났으며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9절에서 13장 10절까지의 정신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옥중에서 되풀이해서 읽고 생각하면서 위로와 힘을 얻은 것은 필립비서였습니다. 필립비서는 옥중에서 쓴 편지인데, 줄곧 "기쁘다"는 말로 일관돼 있습니다. 그는 왜 옥중에 들어갔는지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그 때문에 슬퍼하거나 억울해하는 흔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이유는 극히 간단합니다. 그것은 그의 투옥이 '복음 전진'을 위한 사건이 됐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투옥한 것은 예수의 경우처럼 오판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 투옥된 것을 자랑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의 결과로 바울로는 관원들 앞에서 복음, 즉 '참'을 알려 줄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이미 감옥은 감옥이 아니라 설교의 장이 된 셈입니다. 그러니 복음전파에 미친 바울로에게는 기쁨 밖에 있을 게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밖의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그가 선교 전선에 섰을 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수동적인 자세였는데, 그가 투옥됨으로 책임을 느끼고 선교 전선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 명의 바울로'가 투옥됨으로 '여러 명의 바울로'를 배출한 셈이니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그와 라이벌 의식이 있던 자들은 그가 전선에 섰을 때는 뒷전에서 냉소나 비판만 일삼았었는데, 마치 그가 투옥된 것을 절호의 기회인 양 선교 전선에서 열심히 뛴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일 바울로가 대의에 도취한 사람이 아니라면 저들의 불순한 동기에 분노 아니면 슬픔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로는 그 소식에도 기뻐했습니다. 까닭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통해서도 복음이 전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연히도 투옥 직전, 이 본문에서 '사건의 신학'이란 주제를 발견하고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이 신념은 체험으로 굳히게 됐습니다.

선언문 발표 동기는 31절을 기념하여 이 민족의 얼에 호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문에 찬동할 수 있었던 사람은 겨우 12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발표하기 전에 찬동을 받은 것은 9명뿐이고 나머지 세 분은 사전 승인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8명이 한 덩어리로 기소됐습니다. 그 중에 가톨릭 신부 다섯 분이 포함됐습니다. 이것은 10개월간 20여 회에 걸친 재판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가 염원하던 가톨릭-개신교의 일치운동에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같은 쇠사슬에 묶인 수난 속에 가톨릭-개신교의 차이 따위가 어디 있어요! 거기는 한 몸, 한 형제라는 같은 정과 신념만이 있고, 이 정과 신념이 더욱 확고해졌을 따름입니다. 누가 가톨릭-개신교의 그리스도인만 골라 한 운명 속에 넣었나?

하느님이 하신 일로 고백했습니다. 옥중의 바울로가 "기쁘다!"는 그 기쁨에 이처럼 몸으로 동참할 수 있은 것은 처음 일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 재판과정에서 우리로서는 재판의 장을 진리 전파의 장으로 삼았습니다. 모두가 진심에서 그리스도의 진리와 그의 뜻을 밝히는 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누가 말하든지 한 몸으로 고백하는 "아멘"을 연발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관원들에게 선교할 절호의 기회를 가진 셈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27명의 변호사들!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도 또 아닌 이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후반기부터 저들과 우리가 꼭 같은 호흡과 꼭 같은 진리의 증인이 된 듯한 일체성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밖에서는 밖에 대로 그 동기야 어찌 됐든 신구교 모두 '참'을 위해 전선에 나섰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온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찍이 원래 없었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그리스도 안의 형제적 유대성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한국의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꿈도 못 꾼 일입니다. 극히 미미하고 허술한 우리의 행동을 이렇게 사건화한 이는 하느님입니다. 사건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느님! 이것은 결국 나의 신학적 노력의 주제가 되게 했습니다. 정말 진흙을 가지고 사람을 만든 격이 됐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천 명을 먹이는 격이 됐습니다.

그러니 환영이 다 뭡니까? 위로가 다 뭐입니까? 수고는 무슨 수고!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을! 계속 반복한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의 심정을 이제 알 것 같아요.

또 하나 고백할 것은 "네가 나를 따르려거든 너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을 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부정하라고 했나? 저는 이 말씀을 거듭 생각하면서 자아를 지나칠 정도로 찾고 그것을 전제하고 전개한 서구의 신학적 전통이 크게 잘못됐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난 오히려 동양에서 불교나 도교 등의 무아지경에로의 노력이 "자기를 부정하고"란 말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통로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에 그것을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네 십자가를 지라!"고 했나 하는 것을 거듭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란 로마 정권이 식민지에서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틀인데! 우리는 "십자가를 진다"는 말도 극히 추상화하거나 남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제가 잘못해서 진 빚도 십자가를 졌다고 하고, 오래 앓아누워 있는 식구도 내 십자가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원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행동과 오해에 의한 박해라는 뜻이 내포돼 있어요. 선한 행동이 악의로 받아들여져 수난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 아닐까요? 이것도 여기서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그것을 밝혀서 성문화해 보겠습니다.

 

쓰다가 보니 편지도 아니고 논문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상은 제게 집요하게 생각됐던 문제와 신앙에 대한 고백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때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의 계산으로는 이 어려움을 극복할 승산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하느님이 이 민족과 그리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굶주린 5천 명 앞에 놓인 적은 두 마리의 생선이거나, 다섯 덩이의 떡 정도일지 몰라요. 그러니 계산만 하면 실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산해서 움직이지 않아요. 우리는 스스로 굶주린 5천 명 앞에 하나의 적은 생선으로 알고 있는 그대로를 겸손히 내바칠 따름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도 그것을 들어서 역사적 과제를 극복케 하는 이른바 모든 것을 사건화하는 하늘의 손을 믿기 때문입니다.

(1977. 2. 『현존』)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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