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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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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물음

편지로, 구두로 받은 질문 중에 성서에 대한 물음과 신학에 대한 물음이 제일 많았다. 내가 성서를 최종 기점으로 한다면서 성서를 그처럼 비판적으로 분석하는데 어떻게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가라는 질문과, 많은 사람이 당신은 불트만(Bultmann) 밖에 모르며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가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의 대답은 몇 마디로 할 수 없으며, 이 그 연륜을 쌓아감에 따라서 그 대답이 떠날 것이며, 언젠가는 자세히 설명해야 할 과제로 알지만 우선 여기서 간단히 대답할 의무를 느낀다.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객관성은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참 신학자는 성서에 그 생명을 건다. 성서는 연구해 보기 전에 하느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리고 그 뚜껑을 열라는 말에는 복종할 수 없다. 아니! 성서는 연구해서 이해할 때만이 그 뜻에 복종할 수 있다. 성서의 성자는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그것은 원래 단순한 '책'이다. 그 책은 사람의 말로 쓰어졌다. 그러니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전에 하나의 사람들의 글이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작은 유다 민족의 역사와 그리스도인이란 소집단의 자리를 통해서 형성됐다. 따라서 적어도 이천 년 전의 세계관, 개념, 문장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성서를 읽으면 우선 이러한 수천 년의 시간적인 장벽에 부닥친다. 이 장벽을 뚫고 들어가기 전에는 거기에 담겨 있는 참 뜻을 만날 길이 없다. 전에는 '교회'라는 권위를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래서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 신부가 성찬의 떡을 입에 넣어 주듯이 교회에서 제공해 주는 것을 눈감고 입 벌려 받아먹으면 됐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우리에게 책임지고 골라 먹여 주는 권위도 없거니와 우리들 자신도 그런 권위를 승인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이 장벽을 뚫기 위해서 괭이를 든 것은 불과 200년도 안 된다. 그러한 용기를 얻는 것은 계몽주의 덕분이다. 저들은 텍스트비판, 역사비판학적 방법 등을 통해서 오늘날은 마침내 통로를 뚫었으며, 지금도 그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래서 발견한 단층은 여러 겹이었다. 헬레니즘적인 겹을 뚫으니 초대 그리스도인의 역사적 상황, 그것을 뚫으니 케리그마, 그리고는 일단 이 작업이 정지되었다. 그 겹까지 뚫고 예수에게까지 이를 수 있는 통로는 막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또다시 편집사적 연구 방법이라는 괭이를 들고 복음서 기자들의 사상을 파헤친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노고에서 전에 모르던 많은 것이 발견됐고 무한한 서광이 비추었다. 우리는 저들이 파놓은 길을 따라가는 길밖에 없다. 광맥은 발견된 것이다. 또 괭이질에서 작고 큰 금덩이도 많이 찾아냈다. 그래서 성서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직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어떻게 이름지어야 할지 모르나 성서는 나를 잡고 놓지 않는다. 성서에서 밝혀진 말씀은 남의 이야기 책 읽듯이 '오 그랬구나!' 해지지 않고 바로 내게 하는 물음으로 들리며,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할 의무를 느낀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이 바로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내게 향한 물음이 된다. 즉 성서는 내게 결단을 요구한다. 나는 그 요구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성서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은 외적 권위보다는 바로 내 실재의 물음과 대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신학이 열어 준 길이다. '그러면 불트만만 따르면 되나?' 천만에 나는 불트만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가 파고 들어간 길을 따라가 본다. 그는 결코 혼자 그 길을 뚫은 게 아니다. 아니, 짧게 잡는다고 해도 마르틴 루터가 첫 괭이질을 한 후에 계속된 수많은 학자들이 파고 들어간 그 광로를 진일보한 것뿐이다. 그는 하나의 광부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성실한 광부다.

그러나 그가 파낸 금 부스러기로 금반지를 만들 것인지 이를 고칠 것인지는 불트만이 명령할 권리도 없고 복종할 의무도 느끼지 않는다. 또 그가 파 나가던 방향이 그 다음의 광부에 의해서 달라질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의 성서 해석의 방법이나 분석에 나는 많이 의존한다. 그러나 그의 신학자적 결론(그를 실존 신학자라고 한다)은 내게는 절대가 아니다. 그것은 가변적인 것이다. 또 그 자신도 그런 고집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신학자적 결론에 영향받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결론이 내게는 가장 납득이 가기 때문에 나는 많은 부분 그에게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말을 했다거나 또 그의 대답이 완벽한 대답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아니! 아직 못 한 대답, 아직도 불투명한 대답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나는 학생들에게 신학적 계보를 따라 파고 들어가기를 권한다. 산중에서 홀로 여기저기를 한 번씩 삽질해서는 안 된다. 우물은 계속 한 곳을 파야 한다. 물줄기가 보이는데 왜 다른 데를 파랴!

그렇다고 내가 이미 불트만이 파 놓은 데까지 도달한 것도 아니다. 그가 파 놓은 길 따르기도 요원하다—그랬으면 좋게—그러나 나는 불트만의 노예는 아니며 그럴 마음도 없다. 나를 명령할 권리는 없다. 그런 뜻에서 성서는 내게 지상의 명령권을 가졌다. 그러면 '성서는 당신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요?'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답을 꺼린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해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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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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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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