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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성서해석의 문제

서독에서 늦게 도착한 신문(Die Zeit)을 읽다가 고소를 금할 수 없는 기사를 보았다. 소련의 한 대학강사가 그리스도는 보다 문화수준이 높은 타성(他星)에서 온 우주인이라는 주장을 논문으로 발표해서 물의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퍽 넓은 파문을 던진 증거로는 대학에서 추방당할 뿐 아니라 소련의 공산당 기관지(Iswestija)가 그의 주장에 대응해서 반그리스도교 선전을 펴야 했다는 사실이 말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모양이다. 보다 높은 문화를 이룬 타성에서 벌써 오랫동안 지구상의 발전을 관찰해 오다가 이 인간이라는 종족이 그 문화를 발전시키는 능력이 어떤 성분의 것이며, 이 인종 중에 어느 민족이 가장 우월한지를 탐구할 사명을 지녀서 보낸 것이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성서로 뒷받침하고 있다. 가령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계가 아니다.'라고 한 말은 타성에서 왔다는 증거이며, 그가 세상에 올 때 동방의 현인들이 별을 보았다는 것은 우주선을 타고 온 증거이며, 그가 부활한 것은 다시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 버린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성서의 기사들을 우주시대상으로 합리화한다. 그 다음의 내적인 증거로서는, 그의 설교는 당시 지구상의 노예제도적 풍토에서는 용납될 수 없을 만큼 관용하고 자비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주적인 교육'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이쯤 되면 고소를 금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는 우주시대인이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풀이하려는 많은 시도 중의 하나다. 이 사람에게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관심이 아직도 그리스도에게 집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는 분명히 인간 역사상에 나타나는 이질적인 출현이었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그는 종교를 탄압하는 상황에서 비종교화 내지 비신화화해서라도 그리스도를 재인식해야겠다는 집요함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더 주목되는 것은 그가 거의 예언자적 정열로 여러 모양의 박해를 무릅쓰면서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갖는다고 하며, 소비에트 민중이 그에게 많은 호응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이다. 이것은 밖으로부터의 탄압 때문에 외적으로는 절단된 저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심이 내적으로 간직되어 신음하면서 하나의 돌출구를 찾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대학강사의 성서관이다. 그의 성서 이해는 적어도 200년 이전에 머물고 있다. 즉 그의 성서 문자주의가 그를 이러한 희비극적인 신념에 빠지게 한 것이다. 그의 성서 문자주의가 합리주의(과학주의?)와 야합함으로 반이성적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외계에서 온 우주인이었다는 상상은 반드시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주개발의 초보에 있는 오늘날 그 상상을 아니라고 말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런 상상을 성서로서 뒷받침함으로 신념화하는 것이 한심한 일이다.

오늘날 테크놀로지에 놀란 그리스도교 해석자 중에는 이와 비슷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 않나? 그런데 이 사람과 논쟁을 편 소련의 반그리스도 주장도 가관이다. 저들의 그리스도 비판은 성서에 무식한 '레닌'의 주장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판단한다면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도그마적이다. 『이즈베스티 야』지는 우선 그리스도에 대한 비판으로서 가진 자는 더 받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뺏기게 되리라는 말을 들어 이것을 계급투쟁의 입장에서 비판하면서 '베트남 민족에 맞선 침략적인 미국주의에 가담한 수백의 목사들'과 같은 착취자의 소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착취자의 앞잡이 역할을 한, 한 수염을 기른 설교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소위 '주의'(ism)라는 것은 사람에게 무서운 안질을 가져온다. 저들은 이런 구절을 보고 그처럼 해석할 눈을 가졌어도 예수가 오히려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의 편에 섰다는 무수한 기록은 볼 수 없었다. 얼마나 과학을 말하는 비과학적인 독단인가? 예수를 '한 수염을 기른 설교자'라고 하나 그가 수염을 길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적 무신론'을 방패로 하는 모양이다. 저들은 특히 영국 로빈슨 감독의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저들의 재래적인 무신론을 재확인한 모양이다. 하기는 이러한 맹목적인 그리스도 비판은 소위 과학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영국의 러셀의 그리스도교 비판을 보면 사실상 중세기적 그리스도교에 목표로 겨누고 있다. 저들은 잘못된 그리스도교사의 일면과 그리스도의 본질을 분류할 줄 모른다. 나는 러셀의 글을 읽다가 숨바꼭질하는 어린애들의 말투가 생각났다. '용용 죽겠지. 난 여기 있는데.'

과거에는 그리스도교가 그 입장에서 세계를 일원화하려고 함으로써 산 인간에게 주어진 산 물음과 대답의 성격을 가진 성서를 불도저와 같은 기계적인 도구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실패했는데, 오늘날은 과학주의가 모든 것을 그 입장에서 일원화해 버림으로써 다시 세계를 기계화하려고 하고 동시에 인간 소외의 비극을 가져오고 있다. 과거의 그리스도를 종교 제국주의라고 비난한다면 오늘날에는 과학 제국주의가 등장했다. 이 과학주의는 모든 것을 객관화함으로써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데카르트를 정점으로 하는 근대철학은 '나는 생각한다. 그런고로 나는 있다'는 공식으로 주체를 객체에서 고립시켜 버리더니, 오늘의 과학주의는 객체를 주체에서 빼냄으로써 고립시켜 버리고 있다. 성서 문자주의가 사랑, 인격, 하느님을 말하는 성서를 도구화함으로써 그 산 내용을 질식시켜 버리더니 오늘날의 과학주의도 성서에 대해서 꼭 같은 범죄를 감행하고 있다. 문제는 일원화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성서가 과학 자체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일원화주의이며, 과학이 성서를 침범하는 것도 일원화주의이다. 과학은 사랑이나 인격 또는 하느님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 그러면 과학의 자기 부정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196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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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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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축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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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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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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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상도'(常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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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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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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