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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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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순율
마르 8, 34-38
1. 죽어야만 산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원할 것이다.(마르 8, 34-35)

이 본문은 한마디로 하면 죽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니 이것은 제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이 때는 바로 어떤 예수전을 쓴 이(르낭)의 표현대로 하면, 갈릴리의 평화적인 설교의 때는 지나가고 고난과 슬픔의 단계에 들어선 암흑의 때입니다. 예수는 비장한 결심으로 예루살렘 돌입 도상인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로마 총독의 주둔지 지역에서 세상에 반영된 자기 그리고 제자들이 자기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 묻고, 자기의 수난을 예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후에, 예수가 수난을 예고하는 데 당황해서 예수의 결심을 만회하려다가 극언으로 힐책받은 후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수난이 닥쳐올 때,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라고 합니다. 결국 죽을 각오, 순교의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왜?

"자기 목숨을 건지려면 잃고, 버리면 얻는다." 이 말의 원래 뜻은 순교를 도피하면 하느님에게 배신자로서 버림을 받고, <참>을 위해서 (나와 복음) 목숨을 내대면 참을 찾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런 뜻만 포함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의 뜻을 살려서 고쳐 읽으면, 제 힘으로 제 목숨을 건지려고 하면 오히려 잃고, 그 목숨을 하느님께 내맡기면 살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한다면, 제 힘으로 자기 삶의 보장을 평면상에서 구하면 잃을 것이요, 그 삶의 근거를 세상 밖에서 구하면 주체로서의 자기를 확보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삶의 모순율을 봅니다. 살려면 죽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게 되는 모순율! 여기서 삶은 확연히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동물적인 삶과 다른 하나는 주체로서의 삶입니다. 그 차이는 자기 극복 내지 자기 초월의 여하에서 옵니다.

신약성서에서 뚜렷한 인간관은 다음의 두 점입니다.

첫째, 신약성서(특히 예수)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사도 동물도 아닌 순수 인간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 구실을 할 때, 그 인간은 순수 인간입니다. 이것을 딴 말로 하면, 주체적 존재로서 인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유아독존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과의 옳은 관계에 있어서만 주체적 존재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삶의 거점을 세상 밖에 가질 때만이 주체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런 인간의 이해를 어떻게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까?

2. 인간소외

현대인이 가장 문제로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세계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이미 헤겔(Hegel)이 한 소리입니다. 그는 인간 정신의 활동으로써 나온 여러 개념들이 마침내 인간 정신에서 독립된 객관적인 것이 되어, 인간 정신에 대립되어 마침내 인간 정신을 부정해 버리는 현실을 말합니다. 즉, 주체로서의 사람이 스스로 살기 위해 만든 것이 비대해져서 인간 자체에 대립하여 인간을 예속하거나 몰아냄을 말합니다. 이것을 그들은 소외(Entfremdung)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현대 인간 세계란, 인간의 주체성을 찾아 도달한 역사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주체성을 찾기 위해서 전통사회 그리고 형성한 낡은 종교의 권위를 거부한 것 자체는 신약성서에서 봐서 잘못된 출발이 아닙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둘은 인간의 주체성을 추구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출발한 현대 인간은 소외 의식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자기 주체성을 찾아서 만들어 놓은 것에서 소외당하고 고민합니다.

사회학자 밀즈가 그의 『화이트칼라』에서 현대인의 고민으로서 월급쟁아 즉, 소시민의 모습을 분석했습니다. 월급쟁이는 고도로 발전한 경제정치 구조에 의해서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으나, 그것의 순환에는 아무런 간섭도, 발언권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차로 소외된 자기에게도 무관심해지고 그렇다고 스스로 자기 생활 근거를 가질 수 있는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어떤 회사의 고용인으로 들어서서 극히 부분적인 일을 완수하면 그 대가를 얼마 받는다는 계약을 맺습니다. 그는 그 계약 안에서 기계처럼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니 그에게 충성을 바칠 대상은 없습니다. 그는 그의 노동력을 팔고, 인격마저도 매도해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한가한 오락이나 일시적 흥분제에 자기를 떠맡깁니다. 월급쟁이! 그것은 절대다수를 차지했건만, 그리고 지성인들이건만 실제에 있어서 이 사회구성의 중심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습니다. 그래서 밀즈는 이들을 시정인(市井人)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인간은 전통적(종교적) 타부 때문에 차단돼 있었습니다. 만져도, 보아도, 접근해도 안 되는 영역을 맹목적으로 믿도록 강요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런 것을 박차 버렸습니다. 내 손으로, 내 눈으로 보고 직접 실험해서 그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성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도 제 손으로 만든 타부, 그것을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타부가 넘을 수 없는 성벽이 되어 가로막음으로 그 문 밖에 쫓겨나서 처분만 기다리는 형편이 됐습니다.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에 뒤이어 산업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자꾸 기계만 커 가고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대홍수에 밀리게 됐습니다. 그 결과는 동시에 도시화로 자꾸 집단이라는 것이 커 감으로써 그 안에서 개성은 자꾸 후퇴되고 무명의 존재로, 그 기구의 부분품으로 전락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일면으로는 관료제, 다른 한편으로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개인은 자기가 자기 결정을 못하게 되고, 마치 카프카의 소설에서 보는 큰 악한 성벽만 보이고 인간은 그 성 밖에서 빙빙 돌게 됐고, 거기서 어떻게 해서 내던지는 떡덩이나 주워 먹고 연명하는 꼴이 됐습니다. 이제는 경제니, 정치니 하는 것은 국제적 또는 일당(一黨)의 손에서 요리되고 있으나, 소위 전문화분업화라는 이유에서 맡은 부분적인 일에만 관여하지 그 외의 것에는 관여할 수 없는, 정말 거대한 타부가 됐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유행 가수, 배우들을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그 애들에게는 저들이 세계의 중심 인물들이 돼 버렸습니다. 마치 저들이 역사의 주인이고 정신세계의 사건이나 인물은 아랑곳 없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든 것입니까? 매스컴이 한 짓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도 전파를 타고 방에 들어앉아 주인 노릇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판단력에 개입하고 인식을 만들어 갑니다. 내 머리에 형성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습니까? 누가 판단합니까? 나는 아닙니다. 매스컴이 합니다. 신문들을 보고 TV를 보면 볼수록 내 판단력은 약화됩니다. 아니, 이미 판단을 유보하고, 반납한 현대인들에게 매스컴이 대학입시 답 불러 주듯이 판단해 주고, 정답을 불러 주곤 합니다. 이 때 이미 인간은 <인간>으로 매스컴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보그>로서 지시를 받아들이는 존재로 있을 뿐입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보면 볼수록 난 내 정신 차릴 기준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안 듣고, 안 보면 난 살아 나갈 수 없다고 해서 또 듣고 봅니다. 그러나 듣고 볼 것뿐, 모든 일이 결정되는 데는 난 언제나 결석자가 되고 맙니다.

<자유인> 하지만, 엘리옷의 「프로후르크의 연가(戀歌)」에서 나오는 핀에 꽂힌 나비처럼 내 자리는 완전히 고정돼 버립니다. 내가 계약으로 선택해서 출발한 것이니, 규정에 완전히 규정당하고 그것에 맞추지 못하면 밀려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내게 자유를 준 듯하나, 핀에 꽂힌 나비가 표본당하듯이, 나는 어느 지점에 꽂힐지 팔 다리를 놀리는 그런 정도의 자유만이 있습니다. 경제질서, 정치질서 해서, 그 자체의 법칙은 절대인 양 고조되고, 고도화의 발전이라고 해서 전문화해 버리니, 내가 주인이어야 할 이 사회에서 "세상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유" 할 수밖에 없는 인간 군상만이 늘어납니다. 인간! 그는 자기가 살기 위해 자기가 만든 피조물에게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공포가 인조 로봇에의 공포라는 환상을 낳게 합니다.

세상이 분명히 잘 안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세상이 그러니 그것에 적당히 맞추어 살아야지" 하는 식의 체념을 하게 됐으니, 주인은 어디 갔으며, 그러면 누가 그것을 바로 잡는다는 말입니까! 이런 체념적인 비겁한 처세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생존적 타협안데 그러면서 자꾸 자기 상실에로 줄달음치게 됩니다.

한편 현대적 이 시점, 새 시대 등을 특별한 의미를 주어 강조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흔들 수 없는 우상이 되어 버리고, 사람들은 그것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뜯어 맞추며 아부하다가 소외자가 돼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존귀성을 위해 출발한 길은 인간은 결국 하나의 기계의 부분품이 되고,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으로 전락되어 가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3. 살려면 죽는다

정말 살려면, '난 망해도'라는 과감한 결단이 없으면 상실의 홍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미쳐도, 몰려나도, 낙오자가 되어도, 패배자가 되어도 좋다는 결심이 없이는 즉, 죽을 각오가 없이는 나는 주체로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은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사는 일, 그것은 동물적인 생의 연장이 아닙니다. 주체로서 설 때 삶은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이런 나와 바꾸어도 좋다는 것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계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할 것이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위에서는 목숨을 버리라 했으니,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물론 동물적인 생을 말함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자기를 찾아 가지는 일보다 더 중한 것이 없습니다. 온 천하로도 이것을 바꾸거나 흥정할 수 없으며, 온 천하를 잃어도 이것을 지켜야만 합니다.

참 나! 참 생명! 그것에 대한 존엄성을 가장 귀중히 여기는 예수가 참 삶을 위해 자기를 버리라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존엄성 그것을 예수같이 높인 이가 있습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 99마리를 희생해도 할 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로 그 양을 찾아 나서는 목동의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대선언에서, 어떤 이름의 고귀한 것이나 높은 것, 비록 신의 이름으로 후광을 삼은 것이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침범할 수 없다는 극명한 입장표시가 나타납니다.

4. 왜 사람은 자기를 상실했나?

인간의 자기 상실은 이른바 자아의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현저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자아의식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나를 지키는 것, 내 것은 내가 수호하는 것, 내 권리는 내가 보장해야 하는 것을 자아의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자아의식은 <소유 의식>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영어에서 '갖는다'라는 have가 어디에서나 적용되는데 특히 존재(be)도 소유(have)와 결부시키는 용법이 이런 의식을 잘 드러냅니다. 존재하는 것이 존재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존재하지 존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Have been had 같은 구문은 마치 존재를 소유로 보장하고 또 한다는 의식의 노출로 보입니다. 그것은 저 어리석은 부자처럼 풍년이 들어 곳간을 더 짓고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그리고 지키는 사람들을 둘러 세움으로 결국 자신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 감금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렇게 보면 have가 조동사도 아니고 동사도 아닌 주격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성서에서는 채운다, 충만한 것(pleroma)도 있지만 비운다, 버린다, 헛되게 한다(kenos)는 말뜻이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빌립보서에는 예수를 하느님이 자신을 비운 결과로써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예수의 최후 수난은 바로 케노시스의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계속 충만케 한다는 말과 뜻에 강조점을 둠으로 예수사건의 다른 면을 희석해 왔습니다. 이것이 신론이나 그리스도론 나아가서는 기독교 문화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당이 하늘을 찌르듯 드높은 전통도 이에 연유된 것이 아니며 예수를 왕 중의 왕으로 금 포장한 것도 그런데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요?

신이나 그리스도를 온갖 만능적인 개념이나 표현으로 드러냄으로 동양적 시각에서는 오히려 천박하게 보이게 만든 까닭이 모두 그런 것으로 자기를 보장하는 방패로서 소유하려는 욕구에서 온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보면 기독교는 신을 믿는 게 아니라 소유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이 됩니다. 이른바 구원의 교리가 정교하면 정교한 만큼, 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 짙으면 짙은 만큼 불신의 노출이 아닙니까? 이에 대해서 무(無), 빔(虛)을 내세우고 어떤 상(像)도 개념으로 표상하려고 하지 않고 그 이름조차 떠올리지 않고 또 자신을 비우되 무의식에로까지 추방하려는 자세가 오히려 철저한 신뢰, 내맡김의 자세가 아닙니까?

여기서 중요한 물음으로 위의 모든 뜻을 집약하겠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죽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전능한 신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공(空)입니다. 네 가진 온갖 교리적 지식은 거짓입니다. 구원은 없다는 사실을 수긍하라면 그것이 바로 자기를 죽임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것들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1968. 2. 11.)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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