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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예속
마르코 3, 31-35
1. 성인된 자식과 부모

인생에는 졸업이란 없다. 그것은 제도상에만 있다. 굳이 인생에 있어서 졸업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죽음>이 졸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신입이란 따로 없고 인간이 세상에 나는 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제도상으로 여러 형태의 신입의 과정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인위적으로 제정한 것이 인간의 사고와 삶에 큰 변동을 일으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성인이 된다는 말이다. 법으로서 그것은 뚜렷한 구별을 지어 준다. 이 때부터 세상은 그를 법적으로 성인 취급한다. 따라서 영화관에 숨어서 다닐 필요도 없고, 데이트를 뒷골목에서 할 필요도 없다. 자유다! 대학은 원래는 정말 자유의 세계다. 서구의 대학은 경찰도 간섭 못 했다. 저들의 지성을 존중해서 그들의 자주, 자치권을 인정했다. 그래서 그들 자신들이 재판하고, 학생감옥을 만들 정도였다. 한국의 대학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고등학교와는 판이하다. 어느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며 옷이 어쩌느니, 품행이 나쁘니 따위를 간섭하지도 않고, 공부를 하고 않는 것도 간섭하지 않는다. 제가 알아서 하게 마련이다.

오늘 성서를 통해서 성인이 된 여러분을 생각하면서 가족과의 문제, 더 좁히면 부모와의 문제의 일부를 생각해 보자.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성인된 때와 더불어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다.

대학에 입학은 확실히 가정을, 나가서는 부모에게 독립하는 구체적인 첫걸음이다. 물론 그전에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제도상으로나 관습으로나 거의 일률적으로 자율화되는 계기다.

우리는 아직도 가족제도의 전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언제까지나 자기에게 예속된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다. 자식은 부모에게 예속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상 여기서 가정에 문제가 온다. 고등학교 시기까지는 그래도 부모가 간섭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면 그 이상 더 제재할 길이 없다. 있다면 자각에 호소하는 길뿐이다. 우리는 과거 가족제도의 전통에서 몽상할 때는 아니다. 그러나 거기 많은 문제가 온다.

또 하나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족 또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2. 출가한 예수

본문에는 예수와 그 가족 특히 그 어머니와의 관계가 기록돼 있다. 예수가 공생애에 들어서면서부터 가족과의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예수는 가족, 그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그 어머니는 이 아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어머니가 이 아들의 행위를 옳게 보지 않았다는 말이 되며 그 아들은 어머니의 뜻을 거슬렀다는 말이 된다. 그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것은 주변 사람들이 예수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기에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성서는 그 어머니인 마리아를 이상화한 흔적은 없다. 자식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그의 반응도 전형적이고 자연스러운 어머니다. 그는 제 아들이라는 관념, 내 낳은 자식, 내 사랑하는 자식, 내가 지켜야 할 자식으로 걱정하는 어머니 이상으로 반영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해서 예수는 바로 이러한 가족개념, 이 자연적인 가족 관계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씀을 한단 말이다. 더욱이 내 자식, 내 생명으로 아는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선언은 반드시 예수와 그 어머니와의 관계만을 말하지 않고, 아주 다른 차원의 가족관을 선언한 것이다. 즉, 이제는 혈연적인 부모, 자식관계는 끝났다. 이제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가족, 즉 하느님의 뜻을 중심한 공동체 앞에 자연적 유대관계는 그 이상 가족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본문대로 하면, 바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그 아들을 보지 않고, 내 낳은 자식이란 측면에서만 그 아들을 대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 된다.

외적 상태에서만 보면, 이러한 부모와 자식과의 균열이 우리 현실이기도 하다. 부모는 여전히 내 자식, 내가 돌보고 내가 간섭하지 않으면 안 될 자식, 영원히 내 집, 내 품에 있어야 할 자식으로 생각한다. 그런 전제에서 자식을 간섭하면 자식들은 곧 "이젠 나를 간섭하지 말아요. 난 어머니의 밑에 예속된 자식도 아니며 이 집이 내 세계가 아니란 말이오. 내게는 친구가 있고 사회가 있고 꿈이 있소. 날 아이로 생각지 마시오. 난 어른이란 말이오! 그리고 내 인생은 내가 살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태도나 말을 들을 때, 그 부모는 가슴 아프리라. 마리아도 그 아들의 말에서 그러한 아픔을 당했으리라.

이러한 구별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니고, 벌써부터 있었던 것을 루가복음서 기자는 전한다. 예수가 12세 때 성전에 함께 갔다가 없어졌다. 의레 부모 곁에 있으면서 그의 보호를 받아야 할 아들이 없어졌다. 그 부모들은 아들을 찾다가 3일 만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그 아들은 울면서 부모를 찾지 않고 오히려 성전의 어른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단다. 그 때 그 어머니가 "아이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이에 대해서 이 소년 아들은 "왜 나를 찾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릅니까?"고 냉담하게 응수했다.

"왜 나를 찾습니까?" 이런 반응은 3일을 애타 찾는 부모의 가슴에 화살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느냐'는 질문은 동고동락을 같이하고, 애지중지 키워 왔던 어머니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으리라. 한편 이 질문은, 벌써 예수는 그 집에 있으면서 이미 그 집에 예속되어 있지 않음을 말하며, 여기서 그 부모와 아들 사이의 단절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자연적 가정이란 궁극적인 본향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 자신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아니!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해당시키는 말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 부모, 아내, 자식, 형제, 자매를 버려야 한다."(루가 14, 26)고 하며 또 "누구든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가 9, 62)고 한다. 즉, 그는 혈연적 가족을 버렸고 또 버리라고 권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것은 성장한 아들의 입장으로서 박수를 받을 만한 말인가?

가족을 버려야 한다고 믿었다. 모든 구도자나 특별한 사명감에 선 사람들은 사실상 이렇게 해야만 자기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족 또는 부모, 혈연에 의존하는 한, 개인의 장래도 또 그 사회나 국가의 발전도 생각할 수 없다. 가족중심주의는 인류의 공동사회에 치명상을 준다. 공자는 아비와 아들이 남의 물건을 훔쳤더라도 그것을 감춰 주는 것이 '부자유친'이라고 했다. 이것은 가족주의에서 지당한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가족주의에는 법도, 정의도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권력구조도, 경제구조도 이 친족주의 때문에 부패해 가고만 있으며, 군대도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돈을 쓰면서 따돌린다는 사실이 최근 병무청의 추태가 여지없이 폭로됐다. 혈연관계가 우선될 때에는 옳고 그른 것은 엉켜서 판가름나지 않고, 더러운 편싸움으로 번지는 것이 십상이다. 따라서 가족적 맹목은 부서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의가 선다. 더욱이 세대적으로 축적되는가족적 질병에서 해방돼야 한다. 과거에 귀족사회가 망한 것은 바로 대가족의 망령 때문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가족을 다룬 『까마라조프의 형제』에서 각기 다른 성격을 지니고 주의를 받을 까마라조프 종자라고 저주한다.

3. 탈혈연

그러나 그런데서 해방된다는 말은 반드시 집을 나가거나 부모를 반항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비록 외적으로 떠난다고는 해도, 내게는 오랫동안 요람으로 되어 있는 그 가족, 그 부모의 영향이 내 삶에, 내 사고가 배어 있다. 따라서 이런 것에서 해방되기 위한 싸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네 자신도 부정해야 만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해 보려는 주의들은 우선 가족제도부터 들부수고, 그 성분을 들추어 자가비판을 철저히 시키려고 하며, 공산당은 그 자식으로 소위 반동분자인 아버지를 죽이도록 하며 원수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

소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라도 그것의 극복 없이는 새 질서, 참 정의의 세계는 이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젊은 세대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말할 필요가 없는지 모른다. 지금 젊은 세대의 추세로 보아서는 가족제도라는 것은 뿌리가 뽑혀 버릴 기세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의식적인 반항을 의무처럼 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부제도도 근본적으로 흔들려서 소위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일부일처제는 해체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예수는 분명히 혈연관계로써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누가 내 어머니냐?"라고 함으로써 그 맹목성을 거부했다. 그 자체는 반항과도 같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부모요 형제라고 한다. 무조건적인 반항, 비판 또는 자유가 아니다. 파괴를 위한 파괴가 아니다. 아니! 혈연관계로 형성된 가족에서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새로 형성되는 가족 공동체를 위해서였다.

이것은 역사의 전환점을 앞당긴 것이다. 예수의 이 자세가 확실히 야훼의 신앙을 유대 민족주의에서 구출했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 후에 가정은 파괴되지 않았다. 예수는 "가정은 해산하라 또는 자식은 부모에 대해서 반항하라, 부모에 대한 아무런 의무도 없고 그들에게서 자유하라"고 말한 데는 없다. 아니! 예수는 새로운 가족, 새로운 의미에의 어머니, 아들, 아버지, 아들 관계를 말씀한다. 예수가 비판한 것은 혈연적인 동물애다.

그러나 그 대신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중심한 어머니, 아들의 관계를 이룩하는 새로운 가족을 이룰 것을 말한다. 예수는 정말 하느님께 의존함으로써, 하느님께 예속됨으로써 혈연적, 맹목적인 사랑에서 자유한 새 공동체로서의 가정을 말한다. 즉, 예수는 어머니의 머리에 있는 낡은 것, 낡은 개념, 낡은 혈연적인 맹목성을 배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 자신에 대한 불효, 반항을 뜻하지는 않는다. 기점을 옮긴 새 관계의 가족관계를 말한다. 찾아온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를 낳고 나를 길렀기에 내 어머니라는 관계에서부터 전환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관계로서의 내 어머니, 내 형제라는 말이다. 즉, 예수는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가족에 그 어머니나 형제를 제외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내 어머니와 아들과의 관계를 위한 선언이다.

이것을 위해서 가족관계에 혁명이 필요했다. 예수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 생각하느냐? 아니,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 이 셋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눅 12, 51-53)고 한다. 세계 혁명과 가족 관념 혁명아 한데 엉킨 말이다.

이것은 외형상 미가엘이 한 말과 같다. 그런데 미가엘은 악마가 세상을 지배할 때 가정에 분열이 오리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가족의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고 한다. 마태오는 예수가 가족 사이를 끊을 칼을 주려고 왔다고 한다(마 10, 34).

이것은 단순한 내분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과거의 혈연의 줄 이 끊어지고 진리가 판가름하는 데서 오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내 자식이 하는 것이니 옳고, 내 부모가하는 것이니 다 옳다고 하는 공자적 가족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이러한 철저한 전환이 없이는 그 개인, 그 가정에 정의도, 진리도, 하느님의 말씀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맹목적인 분쟁, 자기 권리의 쟁취 따위에서 오는 분란을 말하지 않는다. 참 가족의 연결의 줄이 전혀 달라짐을 뜻한다.

4. 끝말

서양의 혈연의 연대관계는 정말 약해졌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자리를 경제라는 것이 자리 잡았다. 이것은 비극이다. 서구 젊은 세대가 가족이라는 것을 반항하고 뛰쳐나왔다. 그래서 자유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무엇을 위한 그 자유라는 심각한 문제에 대한 대답 없이 뛰쳐나와 최근에는 환각제에 마취되어 자기를 버리거나 아니면 잔인한 살인행각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끊는 것, 반항하는 것,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가 분명치 않으면 결국 망한다.

주님은 이 혈연적 관계를 끊음으로 자유한다. 그러나 그 자유를 바로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 나에게 '우리'를 위해 새 공동체, 새 사회를 형성하라는 것이다. 내 자유, 내 권리, 내 마음대로라는 것에서 성인 됨을 나타내려는 것은 참 어리석다. 그것은 동물성의 연장이다. 짐승도 성장하면 그 부모를 반항하고 떠난다.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가족, 하느님 뜻대로의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우리는 혈연적 관계에서 자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 스스로 내 자유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데서 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춘기만 지나면 부모와 자식 간의 마찰이 있는 것을 본다. 그 마찰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대체로 맹목적, 혈연적 사랑과 또 맹목적인 자유의지의 충돌이다. 이제는 부모를 거역하느냐에 관심해서는 안 되고, 그가 참 주의 뜻, 참 바른 인간이 되는 길을 거역하느냐에 관심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의 말이 정말 무엇 때문인가? 제 욕심, 제 가문의 명성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정말 진정한 인간, 하느님 앞에 설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인가?"를 분별해야 할 것이다.

이 가족에서의 독립은 사회의 모든 관계에 적용될 것이다. 고질적인 인습, 더러운 풍토적 죄악이 요구하는 강압에서 나를 끊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앞설 것은 참 옳은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한 자주적 노력의 사람으로 서야 한다.

내 주변의 악습에의 반항 없이 나는 나를 지킬 수 없다. 반면에 이 반항은 보다 높은 이, 참 너와 나와의 아버지에게 예속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1979. 2. 22.)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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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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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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