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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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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은 내가 전공하는 책들 외에 나를 오래 점령한 키에르케고르의 글들이었다. 그 중에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손에 잡을 듯이 해명해 주었다.

이 책을 쓴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 덴마크에서 나서 43세의 짧은 생애를 통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는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했으며 레기네를 일생을 통해서 사랑했으나 결혼에까지 이르지 못했고, 그의 피나는 내적 고민은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을 따름이었고 복음에 대한 그의 정열은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얼마 전 코펜하겐에 갔을 때 나는 그의 무덤 앞에 그 자신이 지은 비문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

잠시 잠깐 후면
나는 싸움을 이기리라
그러면 모든 싸움은 깨끗이 사라지리라
그때 나는 장미의 전당에서
예수와 끝없이 영원히 속삭이리라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분석하는 데 어떤 학문적인 의욕이나 흥미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메스를 대는 의사와도 같은 걱정과 진지함으로 한다. 이것은 한가하게 생각해 본 것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박한 사실이기 때문에하는 일이다. 이렇게 분석한 그는 사람은 지금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것은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린 것을 모르고 있으며 또 그 병이 어떠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육체적인 병과 그것에 따르는 생리적인 죽음을 무서워한다. 그러나 그런 죽음은 곤충에게도 한결같이 있는 죽음이다. 사람에게는 사람에게만 있는 영원한 죽음이 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있다. 나사로는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해서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말씀으로 사람에게 생리적인 죽음 말고 영원한 죽음 이 따로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 죽음은 바로 그러한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발견한 병도 이러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그 병이 어떤 것인가? 그 이름은 '절망'이라는 병이다. 그러면 그 병은 어떻게 오는가?

절망의 계기

늘 내 안에 분열이 일어난다. 내 의지는 선하기를 원하나 내 행위는 그것과 반대되는 일을 저지른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미워하는 마음이 마주선다. 나는 이웃에 대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 그런데 내 한 일을 내 마음이 좀처럼 인정하지도 않고 용서하지 도않는다.

이러한 내 안의 대립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할 때 나는 알 수 없는 우수에 빠진다. 무엇인가 꺼림칙하다. 그러나 그 도가 심하면 그냥 불안해진다. 이래도 저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그는 내 사는 꼴을 고소하고 비판하는 무엇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럴 때 그는 내 삶을 비판하는 것은 그것이 마음이건 양심이건 받아들여서 새 길로 갈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그것을 억눌러버린다. '이따위 양심이 다 뭐 말라죽은 것이야!'라고 하며 양심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는데도 그는 '세상이 다 그런데 뭐' 하고 핑계를 다른 데서 찾는다. 이럴 때 그는 잠시 마음에 안정을 찾는 듯하나 실상은 그 순간 자기가 자신을 포기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절망의 계기가 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비판하는 또 하나의 나를 눌러버린다. 그런데 그것으로써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에서가 아니라 내 밖에서부터 나를 비판하는 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 또는 이래야 한다'라고 나를 못살게 한다. 그것이 정의거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이러한 밖에서 오는 소리는 나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그때 그는 그 뜻 앞에서 잃어버린 자기를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가 다 뭐냐, 하나님이 다 뭐냐, 그 따위 것은 없애버려라! 이렇게 그러한 간섭을 거부함으로 자기하는 일을 관철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어머니의 젖가슴을 물리치고 어떤 고도에 떨어진 어린애처럼 관계를 잃어버린 절망에 빠지게 된다. 아니, 사람과 자기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산다. 또 나와 너와의 옳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이러한 긴장된 관계에서 줄타기하듯 자기를 형성해 가야하는 것이다. 그런 자기를 버릴 때 그는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절망은 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지는가?

절망의 여러 모습

사람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다. 그것은 무한도 유한도 아니란 말이다. 이 둘의 긴장된 관계에서 자기를 형성해가야 한다. 즉 이 둘이 내 안에서 옳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자유의 입장에서 보면 가능성과 필연성의 긴장 속에서 자기를 형성해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 관계를 옳게 이끌지 못하면 사람은 절망에 빠진다. 이제 그 모습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유한성을 무시해버림으로 절망한다. 사람은 사랑이나 종교에서 쉽게 유한성을 무시하는 경지에 빠질 수 있다. 사람은 공기와 사랑만 먹고 살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쉽게 잊으므로 절망에 빠진다. 반면에 무한성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유한한 것에만 사로잡힐 때 자기를 주판의 한 알, 한 장의 지폐, 기계의 부분품처럼 만들어버린다. 그럴 때 담벼락과 마주 앉은 무기형을 받은 죄수처럼, 둥지 틀고 들어앉은 누에처럼 절망 속에 죽어가게 된다.

사람은 끝없이 자유를 찾는다. 나를 '가능성'으로만 볼 때 나는 끝없이 자유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때 나는 무거운 제한된 육체를 가졌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를 허공에 증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절망에 빠진다. 이 절망은 사람은 가능성만 아니고 필연성과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잊은 데서 오는 절망이다.

반대로 필연적인 것에만 사로잡혀서 새로운 가능성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이것은 '내 팔자야, 이런 경우는 귀신도 별 재간이 없다'라고 체념해 버림으로 말뚝에 매여 죽기를 기다리는 도살장의 짐승과도 같이 죽음에 이르는 절망에 놓이게 된다.

이상의 상태는 무엇인가? 키에르케고르 이런 것들이 성서에서 말하는 죄 그것이라는 것이다. 죄가 바로 절망에서 오는 것이며, 절망 그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죄에 빠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 죄는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거기서 구제의 길은 어떤 것인가?

죄와 구원

소크라테스는 죄란 바로 무지라고 했다. 그래서 아는 것이 이 죄에서 놓여나는 길이라고 했다. 범신론에서는 비도덕이 곧 죄라고 보아서 자기를 수양해서 완전한 도덕적인 인격을 이루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아는 것이나 자기 힘으로 수양해서 구원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 까닭은 절망으로서 죄는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를 갖지 못한 데에서 왔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참 죄는 어떤 실수를 했다거 다 또는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절망적인 죄는 아들로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린 것이다. 아들의 죄는 다음의 두 가지 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그때 나 같은 죄인은 더 희망이 없다. 나는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체념하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새 가능성을 믿지 않는 죄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절망적인 죄에 빠져 그대로 죽음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무조건 용서한다. 그럴 때 이 아들은 그 아버지의 용서를 믿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를 믿지 않으므로 마지막 새 가능성도 버려버린다. 이처럼 사람의 죄란 윤리적인 잘못이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이 궁극적인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죄에서 놓여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믿음 하나뿐이다. 나는 다시 솟아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믿는 일, 내가 비록 파탄에 이르렀으나 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용서와 은총을 믿을 때만 나는 이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결론은 결국 성서의 본뜻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비추어 보면 그의 이해를 밝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떠나 버렸다. 그러나 그는 가능과 필연, 무한과 유한의 규칙을 잃어버림으로써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버렸다.

이제 그의 일은 후퇴만으로는 되지 않고 그렇다고 과거를 보상할 길도 없다. 그때 그가 솟아날 수 있는 길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되찾는 일이다.

그는 어떤 관계에서도 자기 안에 새 가능성이 있는 것을 믿었다. 또 어떤 형태로나 자기를 받아 줄 아버지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절망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인 구원의 길은 아버지가 모든 과거의 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아들로서 받아들이는 용서와 새로운 은혜였다. 이때 이렇게 용서하는 아버지의 뜻을 그가 만일 믿지 않는다면 그는 죽음에 이르는 궁극적인 병에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모든 모순을 극복하고 무조건 아들로 받아들이는 용서의 뜻을 믿을 때만이 새 삶 이 가능했던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그 당시에 극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는 많은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있다. 그의 여러 저서 중에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이 세대가 혼란하면 할수록 한번 엄숙한 마음으로 읽어 주었으면하는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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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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