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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회의 도전
마태 4, 1-11

그리스도교가 받는 오늘의 도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수한 것에 도전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새것이 아니다. 이미 그런 도전을 예수 자신이 받았다. 우리는 마태복음 4장 1-11절에서 오늘의 그리스도를 도전하는 원형을 찾아보자.

1.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과 예수가 받은 유혹

예수가 유혹을 받을 때는, 40일간 금식 후 주릴 때이다. 유혹의 미끼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이다. 이렇게 예수에게 꼼짝할 수 없게 올무를 친 후에 악마는 서서히 구체적으로 유혹을 한다. 첫째,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라. 돌에 발이 부딪히지 않을 것이다. 셋째, 높은 산에서 천하의 권력과 영화를 보이면서 이것은 다 당신 것이 될 것이오. 단 내게 절만 하시오.

우선, 이 유혹은 이스라엘 역사가 받은 유혹, 모세가 당한 도전을 압축한 것이다. 첫째, 이스라엘은 광야 40일 동안 광야에 있었다. 둘째, 저들이 굶주릴 때에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야훼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굶어죽게 한다"(출애 16, 2-3)라고 원망으로 협박했다. 예수가 살고 있던 시대의 민중들의 삶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예수를 따라 다니던 무리들은 예수에게 '떡'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고, 예수의 말씀 중에도 '떡'에 대한 말씀이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셋째, 목마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야훼를 시험하여 야훼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했다'(17장)고 전한다. 넷째,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 어찌 됐나?' 그는 신의 이름을 등에 업고 군림했지만 그의 무능은 신이 없는 증거다. '우리가 신을 만들자.'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만들었고, 그래서 결국 그 시험의 패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2. 예수를 시험했던 것들

굶주린 이스라엘은 이 도전에 패배한 데 대해서 예수는 어떻게 했나!

첫째, 사탄이 광야에 끌고 갔다. 사람이 갖고 있는 모든 힘이 자신을 반역하는 상태에 있을 때, 내 이웃, 나의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내 힘에서마저 격리된 상태에 있을 때 시험 즉, 도전이 온다. 예수가 무방비 상태였을 때 도전은 왔다. 바로 그것은 그가 어디까지나 고독하게, 즉 홀로 싸워야하는 상태다. 이와 같이 예수가 무방비로, 홀로 있는 장면이 성서에 여러 차례 전해진다. <겟세마네>, <십자가> 처형 현장이 그 절정이다. 여기는 아무런 보장도, 지원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개인의 대결이면서 그 승부는 인류 전체 대열 첨단에 섰다.

둘째, 예수의 내적 상태는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의식이 뚜렷할 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말이냐?"는 도전을 받게 됐다. 십자가의 경우처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냐? 그렇거든!"이라는 도전이 예수를 휘몰고 있었다.

셋째, 예수는 40일 동안 굶주렀다. 이 경우도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는 의식 때문에 그 굶주림이 도전이 된다. 즉, "네 자의식에 맞는 능력을 과시하라"라는 도전이다. 비교형 안에 드는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오지 않는다. 그것은 "사느냐, 죽느냐?", "유냐, 무냐?", "과거냐, 미래냐?", "빛이냐 어둠이냐?", "하느님이냐, 사탄이냐?"의 양자택일의 상황이다. 그런데 이 양자는 거의 비슷한 정당성을 지녔을 때, 하나의 도전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상황에서 유혹의 내용은 세 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첫째, "돌이 떡이 되게 하라" 지금 생명의 위기에 있다. 이 마당에 그 처지를 구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또한 신이다. 굶주린 처지에 있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가 신이며, 신의 아들이다. "자! 돌이 떡이 되게 하라." 이렇게 유물론, 물질주의가 구원자로 등장한 것이다.

둘째, "높은 성전에 올라가서 떨어져 봐라. 그래도 상하지 않는 능력을 보여야 신자(神子)며, 그렇게 하는 이가 신이다" 높은 데서 떨어지면 상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그래도 안 상한다면 그것은 피조성을 극복한 증거다. 힘이 있는 게 신이다. 무슨 방법으로든 인간의 초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신이다. 이것은 신을 싸잡은 유혹이다.

셋째, 높은 산에서 천하를 보이면서, "이것을 다 주겠다"라고 한다.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실재한다. 이 구체적 권력, 구체적인 영화를 봐라, 추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 막연한 것을 버리고 이렇게 구체적인 것을 선택하라. 그것에는 오직 한 가지 조건만이 있다. 이 구체적으로 보이는 힘 앞에 굴복하라. 이것은 '인간이라는 너를 포기하라'라는 것이고, '네가 믿는 신을 포기하라'라는 유혹이다. 즉, 물질, 구체적인 실험 가능한 것이 정신이니, 믿음이니, 신이니 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3. 오늘의 기술문명—우리들을 향한 시험

2000년대를 내다보는 오늘에 두 가지 비관론이 있다. 생태학자들은 지구의 미래를 이렇게 전망한다. 2000년대가 되면 인구가 폭발하는데, 하루 30만, 1년 7,000만씩 늘어나서 2000년에는 70억에 달한다고 한다. 식량문제도 현재 굶는 자가 지구 전체 인구의 20%에 달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60%인데, 그때는 2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기아선상에서 놓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에너지 문제도 지난 백 년 사이에 쓴 에너지는 과거 2000년 동안 쓴 것의 배가 되고, 이대로 나가면 30년 후 완전 고갈되어 인류는 바야흐로 새로운 대체 에너지를 시급히 개발하여야하는 시점에와 있게 된다고 한다. 환경 오염의 문제도 날로 심각해지는데, 공기, 물 등의 오염으로 생수 고갈 위기를 맞게 되고, 모든 생물의 생활 원천인 물이 죽어감에 따라 생태계의 파괴로 30년 후 즉, 2001년에는 인류라는 종족이 전멸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돌로 떡을 만드느냐?, 누가 높은 데서 떨어져도 상하지 않느냐?"는 예수에게 향한 물음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등장한다. 이에 대해서 과학기술은 대답한다. "내가! 바로 그 해결사다."

핼러시(D. S. Halacy)의 『21세기』라는 책은 2001년에 될 세계를 소개한 것이다. 우선 그는 1930-70년까지 된 일은 점진적인 발전 이 아니라 돌연변이적 과학혁명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것으로는 컬러 텔레비전을 가진 자가 40년 전 목욕실을 가진 자보다 더 많아졌다는 점과 컴퓨터, 레이더, 우주비행선, 원자력발전소, 스테레오, 플라스틱, 트랜지스터, 태양전지, 미사일 등을 든다. 그런데 30년 후인 2001년에는 그 발전의 속도와 내용이 지금까지의 4배가 되리란다. 그때를 전망해서 자연 자원은 인공위성으로 탐색하므로 지금까지 우리들이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 물질을, 새 동물을 만들어 낸다. 바다, 공기, 달과 혹성에서 자원이 채굴된다. 오염은 제거된다. 바다의 염분을 제거하여 물 걱정 없이 살 수 있고, 기후는 핵 대폭발로 마음대로 변동하게 된다. 핵융합 에너지로 바닷물에서 전력입수(電力入收)하고, 송전하면 전선은 필요 없게 된다. 자동차는가솔린이 아니라 전력으로 가게 되고 도로가 필요 없는 공중차가 나오 고, 기차는 공기쿠션으로 시속 500km, 헬리콥터도 발전하여 수직이착륙기가 나오고, 비행기는 시속 8천으로 세계를 6시간 이내에 일주, 경제발전은 컴퓨터가 전담하여 그것이 모든 계산을 담당하기 때문에 주부는 돈을 만질 필요 없고 교육까지도 그것이 한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전신능력(電信能力)이 생긴다. 모든 심부름은 로봇이한다. 인간수명은 훨씬 길어지고, 육체는 냉동했다가 다시 깨어나게 한다. 선천적 육체 정신의 결함을 치료하고, 숙면기 사용으로 언제나 짧게 자도 된다. 인간의 장기는 자동차 부속품처럼 바꿀 수 있다. 수입(收入)은 오늘의 7배, 노동시간은 지금의 40시간에서(1900년에는 53시간) 30시간으로 단축되고 그러면 월, 화, 수, 목, 일, 일, 일이 된다. 주말여행은 달나라로 간다. 이때, 유명한 인간은 바로 등산가, 월탐험가(月探險家) 등이 된다.

이러한 기술발전의 미래상을 볼 때, 모든 인간들은 이 기술과학의 시위에 현혹된다. 이제 우리의 살길은 그것밖에 없다. 우리의 신은 우리들을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먹여주고, 입혀주 고, 자연의 한계를 넘으면서도 우리의 한계성을 극복해 주는 것, 그것이 기술과학 외에 더 있느뇨! 저만이 나를 살린다. 저가 돌이 떡이 되게 하고, 저가 내 한계를 극복하게 하고 그 미래를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것처럼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 따위를 내동댕이치고 그것에 모두 절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소외, 비인간화의 실제 동기가 되고 있다.

5. 기술 문명의 악마성

이렇게 될 때, 예수에게서 유혹하던 그 사탄이 마침내 같은 유혹적 내용으로 승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유혹적인 전시에 감추어 둔 것이 있다. 그것은 기술 과학적 사회가 지니고 있는 악마성(Damonism)이다.

그 첫째는 이 기술 문명 자체가 지닌 파괴성이다. 기술과학이 개발한 힘은 구체적으로 일시에 인류 전체를 파괴할 만한 위력이 되어 있다. 그리고 기술과학을 등에 업은 산업구조는 파괴를 하지 않으면 유지 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생산은 무제한이고, 소비에는 한계가 있기에 제가 만든 것은 계속 파괴하여 폐물화해야 한다. 그래서 기계의 수명을 짧게 하고 부속품 제작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생산품을 다 소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쟁 따위를 일으켜 파괴를 촉진한다.

둘째는 이 고도화된 기술은 일반에게는 동화의 세계처럼 미지의 것이 되고 극소수의 기술자, 그것을 운영하는 자본가가 독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한 손에 잡는 것은 권력구조의 한 그룹 또는 개인이 된다. 이 권력구조는 기계처럼 궤도만 있고 예외는 없기에 부분품은, 전체의 방향대로 움직여야하는 개인은 무시하게 된다. 부분품이 기계 전체에 항거할 수 없듯이 전체의 열쇠를 한 손에 잡은 자는 비판 정신을 마비시킨다. 이래서 결국 인간을 절하게 한다. 즉, 비인간화한다. 이것이 바로 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Horkheimer)는 기술과학은 거기 잘 적응만 하면—절하면— 걱정, 불안은 제거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대신 종교, 철학 그리고 미래, 신, 마침내는 자유라는 개념도 없이할 것이라 본다. 그런데 오늘의 정치, 경제, 외교에는 도덕적 계산은 없다. 앞으로 자유라는 의식이 그대로 있고 민족 간의 차가 있는 한 더욱 강력 정치가 무력 경쟁을 가속화 할 것이다.

아도르노(Adorno)는 경제적 생산력의 향상은 일면 정의로운 세계를 만드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기술적 체제와 그것을 장악한 사회적 집단에 절대권이 주어진다. 그것은 대중을 완전 지배하며 이 체제 앞에 개인은 완전히 거세된다고 한다.

미첼리히(Alexander Mitscherlich)는 "설득의 기술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판의식을 공격한다. 그리고 행동과학과 심리학을 동원하여 개인을 마음대로 지배한다"라고 말한다. 이들이 전망한 대로라면 인류의 종말이다.

그러나 바로 『21세기』쓴 핼러시는 "2001년의 세계는 오늘날 잊히고 있는 것이 다시 기억되리라. 그것은 정신적, 도덕적 가치다. 참 인간성의 진보는 물질적 혜택을 어떻게 현명하게 사용하느냐의 인간 정신 문제에 귀착한다. 그것은 가치 기준 문제다. 신뢰, 희망, 사랑, 정직 등의 인간 행위의 법칙이 영원히 변치 않는 동력 법칙처럼 그가 치는 유지된다. 국민총생산이 높여져도 인간의 마음이 함께 커진다는 법은 없다. 지구를 5-6시간에 일주하고 달에 이틀 사이에 도달한다고 해도 인간 자체가 현명해지지는 않고 정신적으로 커지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여 결국 인간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요는 '누가 이 개발된 것을 바로 사용하느냐?'가 큰 문제인 것이다

토인비는 "오늘의 비극은 기술과학에 비등할 도덕 정신이 발달하지 않는 데 있다"라고 했다. 그럼 누가 이 책임을 지느냐?

5. 오늘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대답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만일 예수가 굶주림을 면키 위해 돌을 떡으로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순간 기술의 힘에 굴복하고 그것에 노예가 됐을 것이다. 돌은 돌대로 있어야 한다. 그 한계를 넘으면 노예가 된다. 떡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떡에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는 것은 인간은 제가 만든 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길이다. 말하자면 물질에서 해방의 길이다.

둘째, 높은 데서 떨어지라는 도전에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시험 말라. 그것은 창조자를 피조물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한계 존재로 있어야 한다. 그가 그 한계를 넘을 때 신의 자리에 서서 악마화한다.

셋째, "내게 절하라"라는 악마의 유혹에 오직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것은 온갖 절대권력에 대한 분명한 저항이다. 상대적인 것이 인간을 절대로 지배하려는 데 항거한 대선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그리스도교는 권력과 야합하거나(중세기), 자본과 야합해 왔다. 그러므로 마침내 공범자가 되어 물질 절대화, 권력 절대화의 구조악 구축에 참여했다.

여기서 오늘 그리스도인의 투쟁의 대상은 바로 물질지상주의, 권력절대화의 구조 사회에 노예가 된 인간을 해방하는 전선에 서는 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투쟁의 길이다.

(1973년 서울여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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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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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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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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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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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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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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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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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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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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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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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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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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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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