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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와의 투쟁
마르 8, 34-38
1. 역사 안에 나타난 전체주의—개인과 전체

사람이 온 세계를 얻었다고 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원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초점이 있다. 첫째는, 한 사람의 삶이 천하와도 바꿀 수 없이 고귀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산다는 일은 스스로 제 힘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해 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사를 생각해 보면, 전체 또는 전체주의에 대한 투쟁이다. 개개인의 민중들이 구조화되어 자신들을 옥죄는 전체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혹은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던 것이 역사를 이룬다. 이런 투쟁의 역사에서 문제는 전체와 한 사람의 삶, 인격 또는 주권과의 관계이다.

고대 희랍은 개인은 전체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다. 폴리스(polis)의 사상이 그것이다. 폴리스란 한 도시를 뜻하나, 오늘의 국가라는 형태와 같다. 이 폴리스는 이데아(Idea)의 세계의 지상의 구현이다. 이 폴리스라는 완전한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 개개의 존재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의 가치의 척도는, 그가 이 폴리스를 완성하는 데 얼마나 그리고 무엇으로 기여하는가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한 개인이 폴리스라는 전체에 공헌할 수 있을 때만 존재 가치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스파르타 같은 폴리스가 생겼다. 거기에서는 한 개인이 폴리스에 유용하지 않을 때는 없애 버리는 것이다. 노인, 병자 등이 그렇다.

이러한 형태의 국가는 역사상 계속적으로 나타났다. 가까운 예로 볼 때, 나치와 파시즘 그리고 공산 세계가 그것이다. 히틀러는 게르만 천년왕국을 수립하기 위해서 온 국민에게 그것을 위해 존재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것에 저해되는 개인은 해충처럼 생각했다. 그런 전체주의 국가 관념에서 그는, 그것에 방해되는 이질적인 피인 유대인은 사정없이 학살한 것만이 아니라, 유전적인 병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다 죽여버렸다. 정신병, 간질병, 천치 따위는 전부 끌어내어 죽여버렸다. 반면에 외형으로나 지능상으로 우량하다 고생각되는 사람들을 골라서 저들의 씨를 퍼뜨리기 위해서 인위적인 피의 번식을 꾀했다.

공산주의는 전체주의에 거슬리는 사고를 하는 자들을 반동이라고 숙청해 버리고 개인의 자유는 다 전체를 위해 바칠 것을 강요했다. 처음에는 개인이란 것을 없이 하기 위해선 개인의 재산, 가정, 애정까지도 뿌리 뽑기 위해서 그런 모든 요람을 박탈하고, 아이들을 국가보육원에 수용하고, 모두 전체만을 위해서 살기를 강요했다. 중공은 현재 그러한 강경책이 완화된 소비에트에 반기를 들고 인민공사 따위를 만들어서 가정을 뿌리 뽑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많은 호응을 받을 것 같다. 아무리 총검으로 위협한다고 해도 호응하는 군중이 없으면 그렇게 밀고 나아갈 수 없다고 보면 그렇다. 세계 제1차 대전에 패전함으로써 도탄에 빠진 독일, 국가적으로 볼 때 구라파에서 가장 불행했고 뒤떨어졌던 독일 국민은 이러한 히틀러의 정책에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그러한 정책으로 독일 민족에게 온 세계에 가장 빛나는 미래가 올 것 같은 환상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고, 서구 문명권 안에 있으면서도 가장 빈곤하고 부패한 러시아 국민은 이 공산혁명에서 어떤 비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러한 경향은 요새 후진국에서 팽창한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공산혁명에 추파를 던지는 것은 국제경쟁의 마당에서 앞선 나라를 뒤따라 잡기 위해서는 그 길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머리에도 그러한 사고가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우리 역사를 뒤돌아보거나 또 현재 우리의 상태를 보면, 우리도 머리에는 쉽사리 이런 충동에 빠질 수 있다. '아무리 개인이 우수해도 소용없다. 튼튼한 국가가 서야 한다.' 우리는 튼튼한 강대국아 못 돼 봤기 때문에 이처럼 짓눌려 살았다. 우리는 빨리 강한 국가가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를 위해서 그것에 방해되거나 쓸모없는 것은 속속 제거돼야 한다. 거리에 나가면 깡패가 우글거린다. 그것은 법의 질서를 파괴하는 해충이다. 이런 것은 모조리 굵어서 없애야 한다. 부정을 저지르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망한다. 그따위는 모조리 즉결 총살해야 한다! 이러한 심정이 전번에 깡패를 재판도 없이 수천 명을 잡아서 강제 노동을 시켰을 때, 박수를 보내게 했다.

그런데 이러한 심정은 소위 강력한 리더십, 강력한 정부를 요구한다. 이런 요구는 마침내 우리를 독재 세계로 이끌게 한다. 우리 민족이 모두 잘살기 위해서! 이러한 대전제를 기독교도 그대로 뒤따르는 것이 옳은가?

이러한 사고나 충동이 올 때 적어도 몇 가지 크게 반성할 것이있다.

첫째, 전체라는 말은 우선 에고이즘에 상반되는 것으로 생각할 때 매혹적이다. "우리는 전체냐 개인이냐, 다수냐 소수냐?" 이렇게 물으면 쉽게 "전체를 위해, 다수를 위해"라는 결론에 가게 된다. 루터를 낳고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진 독일 민족도 히틀러의 전체라는 말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독일 국민 전체"라고 할 때, 그것은 실은 주권을 갖고, 감정을 가진 독일 국만 하나하나의 총합 즉, 독일 국민 자체가 아니다. 아니! 하나의 개념, 히틀러의 머리에 있는 <게르만>이라는 이데아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유령이 실은 독일 국민 개인 개인을 제물로 희생시킨 것뿐이다.

공산주의도 다수를 위해 또는 인류를, 전체를 위한 혁명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총화로서의 전체가 아니라 계급적인 반발을 위해서 고조시킨 역사관의 관념이다. 지금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키며 인간 혁명을 외치는 것도, 실은 중국 인민이 아니라 모택동의 머리에 있는, 소위 보다 나은 사회라는 추상적인 관념이다. 이 관념이 인민을 제물로 강요한다.

한국에서 근대화라고 하는 것도 그럴듯한 매혹적인 슬로건이다. 우리 국민 전체가 잘살기 위한 것! 그런데 소위 근대화 작업이 왜 민중의 소리, 그들 부르짖음을 억누르는 결과를 가져오나! 그것은 전체가 잘살기 위해서라는 말에서 '전체'가 하나의 관념이기 때문이다.

2. 예수에게 있어서 개인과 전체

우리는 예수는 인류 전체를 위해 왔느냐, 개인 개인을 위해 왔느냐 이런 물음에 말려들면 전체를 위해! 라는 결론의 강요를 당한다. 그러나 전체라는 것은 개인의 상반 개념이 아니다. 아니, 참 전체란 개인을 위한 전체이다. 이 개인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는 개인 안에 있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예로 99와 1의 양의 비유를 본다. 여기서 99라는 것은 다수다. 그런데 양을 책임진 목동이 잃은 한 마리 양을 위해 나선다. 여기서 다수 또는 전체냐, 소수 또는 개인이냐라는 질문은 이 태도를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 99라는 다수는 하나의 관념이다. 예수는 "99와 1의 하나를 선택하라"라는 형식 논리에서 있지 않다. 아니, 잃은 양 한 마리에서 100마리 양을 본다. 그 한 마리 양(잃은)을 외면한 전체란 따로 없다. 그럴 때 99라는 것이 이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길을 막으면 그것은 바로 실재하지 않은 악마가하는 일이다. 아니, 개체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란 없다.

둘째, 잘 산다는 말이다. 도대체 잘 산다는 기준이 어디 있나? 근대화가 잘사는 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그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정권의 책임자가 직접 지었다는 노래는 "잘 살아 보세"라고 하고 그 내용은 몽땅 물질적인 것을 나열한다. 결국 수출이 늘고, 산업이 발달되면 한 사람당 소득이 얼마가 된다. 그러면 생활 수준이 어떻게 된다, 이다. 그런데 그들이 전시하는 내일을 1인당의 소득을 표시하는 GNP는 말해도 개개인에게 어떻게 분배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 전체를 위해서라는 강제성 밑에 그 결과가 실은 몇 개인에게만 집중된다는 사실, 그럼으로써 대다수가 그들 손에 노예화된다는 사실 따위는 전혀 고려돼 있지 않다. 그런데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잘 산다>는 구호가 물질지상주의에서 풀이된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또 무비판적으로 그 말에 솔깃해도 좋은가?

예수는 "온 세계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뇨, 무엇으로 생명을 바꾸겠느뇨" 하신다. 이것은 가진다는 것(세계를 다 가져도)과 산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임을 말한다. 산다는 것이 물질을 가짐으로 해결된다고 확신한다면 기독교는 버려야 한다.

지금 젊은 층이 기독교 비판에서 바로 이 점을 비판의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선교 활동도 돈벌이로 보지 않고 민중의 착취로 보는 것이다. 저들은 소위 <전체>라는 것에 도전한다. 이 전체라는 이름 밑에 개개인의 주권이 박탈당하고 이 민주주의라는 이름 밑에 실은 물질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에 반기를 들고 있다. 저들은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모방한 공산주의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체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까닭은 이데올로기란 것이 전체라는 사상을 합리화하고, 개인을 노예화하기 때문이다.

참삶이란 가지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다. 만일 <가지는 것>이 곧 삶이라고 주장되고 또한 그게 사실이면 그건 물질주의의 승리며, 세계라는 전체의 기계에 인간 부재의 현실이 구현될 따름이다. 아니, 가지면 산다는 것은 사람을 속인다. 정말 가지면 사느냐? 수억, 수천억 운운하는 자들도 따지고 보면, 사실은 가졌다는 관념에서 스스로 속는 것뿐이다. 그래 봐야 결과는 하루 두 세끼의 밥뿐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치르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상실뿐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는 자는 잃고,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원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내 삶은 내가 보장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가짐으로써 살겠다고 생각할 때, 삶은 상실된다는 것이다.

이 삶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삶은 복음을 위해서 내놓을 때 주어진다고 한다. 다수, 전체, 인류,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말>을 위해서이다. 그러면 <나의 말>이란 무엇인가?

3. 나와 전체

<나와 내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 자가 산다고 한다. 그 나는 이 말하는 이다. 그런데 그 <나>는 2천 년 전에 갈릴래아라는 장소에 존재한 그다. 그러나 그는 <개인>이 아니다. 2천 년 전에 생존했던 한 낱 나사렛 예수라면 오늘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 <나> 속에 이천 년을 두고 <우리> 안에서 생존하는 이가 아니라면 우리에게 그 이름이 전달되지도 않았겠고 더욱이나 그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일찍부터 그와 호흡을 함께하고 그의 최후까지 목격한 민중들이 그를 <개인>으로 보지 않고 <우리>로 보았다.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와 그 일당을 박해하는 바울로도 그가 <개인>이 아니라 자신이 포함된 <우리>안에서 그리스도로 인식되므로 그의 죽임 당함과 살림 운동에 참여했다. 그 나는 전체가 들어 있는 나다. 그 전체는 <나>를 유린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써 <나>되게 하는 것이다.

유영모 선생이 <나>를 강조한 이인데 그는 요한복음의 "나는 …이다" 하는 <나>는 우리가 자신을 도도히 내세워서 <나다>하는 말로서 도(道)와 차이가 없다고 하고, 나라(國家)란 바로 "<나>라"고 도도히 세상에 내세운다는 말로 <나>와 <나다>는 결국 하나라고 했다. 그때 나는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그의 이야기가 끝난 후, "선생님의 말씀은 이해합니다만 요한복음이 지적하는 '나는 길이다 또는 진리다' 하는 <나>는 나사렛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지요"했더니, 그는 동문서답 격으로 "나는 죽음을 앞에 놓고하는 말이지, 해보는 소리 아니요"라고 했다. 내 질문 자체가 용인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깨달음은 옳았다. 그 <나>는 <우리>다. 그러므로 그의 사전 속에서 우리를 체험하는 것이다.

나와 복음이라고 했는데 그 아래(38절)는 <나와 내 말>이라고 했다. 내 말이란 말 자체의 어떤 마술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내용임에 두말할 것 없다. 마르코는 책 서두에 <복음의 시작>이라고 하므로 예수에게서 일어나는 사건 전체를 복음이라고 했다. 그러면 복음이란 결국 <나>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어떤 한마디로 표출할 수 있을까! 그의 주제인 <하느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고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그 <나>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르코에는 예수의 형태 중에 병자를 낫게 하는 기사가 가장 많다. 그런데 그것이 병 치료에 그 뜻을 국한하면 이미 과거사일 뿐이다. 까닭은 그때 병 치료받은 자들도 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병을 낫게 하면서도 그 행위를 사탄과의 투쟁으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체를 위해 전체와 싸우는 것이었다. 이 본문에서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이 세대에"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그것은 죽고 살고하는 것이 개인의 운명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악의 세상의 운명과 유리되지 않은 것임을 말한다.

복음이 따로 있나? 그것만으로는 추상적이고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 그 뜻이 산다.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종이 풀려나고 구속에서 자유해지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크게 말하면 이것은 해방이라는 말에 포함된다.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주권만이 실현된 현실이라면 이것은 어떤 인간도 인간에게 권력으로 군림할 수 없는 현실을 뜻하므로 그것 역시 기존 체제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해방은 전체에 해당하지 개인에 국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면 <나와 복음>을 위해 죽어야 산다는 말은 전체를 위해 개인도 극복하고 전체주의에 죽음으로 맞서 싸울 때 진정한 삶이 온다는 말이다. 결국 큰 <나>를 위해 고립된 나, 작은 나를 죽이면 <나라>가 산다고 하면 이 뜻이 표현될까?

아무튼 우리는 전체주의 앞에서 전전긍긍하며 그것을 싸워 이길 때만 살아날 수 있는 막다른 골목에 있다. 이때 이 개체로서의 나를 살릴 생각만 하면 결국 비겁하게 죽되 혼자가 아니라 <나라>가 죽을 것이요 전체주의와 맞서 싸우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면 <나라=전체>가 살 것이다.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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