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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욥
김은국 『순교자』/ 욥기 24, 11-12; 40, 2-9
1

본문인 욥기 24장의 내용은 이렇다.

왜 전능한 이는 심판의 때를 가두어 주었는가? 왜 그를 아는 이들이 그들의 날을 볼 수 없는가? 악당들이 경계석을 밀어내고, 남의 양떼들을 노략질해서 제 것으로 기르며, 고아들의 나귀를 약탈하고, 과부의 소를 뺏는도다. 저들은 가난한 자들을 길에서 몰아내니 이 땅의 가련한 자들은 모두 숨어버려야만한다. 보라! 광야의 들나귀같이 된 저들을! 저들은 일터를 잃고 들판을 헤매며 먹을 것을 찾는다. 밥 못 먹는 어린이들! … 이불 없이 벗은 몸으로 들에서 자며, 추위에도 덮을 것은 없다. 산중의 폭우에 쫓기나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부둥켜안고 있구나! 어떤 놈은 어머니 품에서 어린것을 뺏었으며, 가난한 이들의 갓난 애를 담보로 뺏는다. 옷이 없어 벗은 채, 꿇은 배를 안은 채 저들의 곡식단을 나르며, 그의 성안에서 기름을 짜며, 술틀을 밟으면서도 목이 마르다. 도시와 집들에서 저들은 추방당하면서 저들의 아이들의 혼은 도움을 향해 부르짖으나 하느님은 여전히 이 불의에 관여하지 않는구나!(욥 24, 2-11)

이 욥기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느님이 욥에게 묻기를 "논박하는 자가 권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느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해 보라"라고 한다. 이에 욥이 하느님께 대답하기를 "나는 보잘것없는 존재오니 무엇을 어떻게 주께 대답하리까! 차라리 내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는 길뿐입니다. 내가 한두 번 항변했으나 더 그러지 않겠으며 대답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한편 욥의 이 말에 대해 폭풍 속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남아답게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말에 대답하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를 불의하다고 단정하겠느냐? 네가 하느님의 팔 같은 강한 팔을 가졌느냐? 그와 같이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라고 한다(욥 40, 1-9).

이상은 현대 말로 고쳐 읽어 본 욥기의 일부이다. 이것은 눈앞에 전개되는 부조리 속에서 몸부림치며, 결국 이 부조리가 그대로 진행되는 것은 필경 하느님이 이 세계에는 없거나 관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서 절망했다가, 그러나 그런 것으로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욥은 깨달은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부조리와 조리, 이른바 선과 악,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는 사고의 틀 안에서는 도저히 하느님을 알 길도, 만날 길도 없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까닭은 그는 많은 번뇌의 결과 인간이란 극히 미미한 존재임을 깨닫고, 동시에 이같은 인간의 시야에 들어온 현실로 하느님을 송사하거나 시비를 겨룰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김은국의 『순교자』에 인용된 것이다. 오늘은 한국의 부조리 속에서 크리스천으로서의 고민을 그려 세계의 가슴을 울린 『순교자』를 다시 음미해 보겠다.

2

무대는 평양, 넓게는 한국의 625동란이다. 평양은 연일 계속된 미군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고, 교회들마저 거의 다 없어졌다. 평양에 있는 중앙교회도 거의 무너져 가는데 꼭대기에 십자가가 달린 뼈대만 남은 회색 종탑만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그것도 주인을 잃어 고치려는 자는 없고, 종 칠 주인도 없어 종 치는 밧줄이 바람에 날리면 종이 무질서하게 뎅그렁거린다.

이것은 당시의 정신풍토를 묘사한 것이다. 평양은 지칠 대로 지쳤는데, 그래도 유엔군의 진군으로 희망을 찾으려고 했으나 다시 중공의 개입으로 버림받아야 할 단계에 있었다. 이런 정신적 절망의 상태를 걱정하는 것은 대민 선전관이었던 장 대령이다. 무엇으로 이 국민의 사기를 다시 일으킬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장 대령보다 이 현실을 그대로 보려고 하는 자는 장대령의 부관이었던 이 대위이다. 그의 계속되는 질문은 이 소설의 (제목이다) 주요한 맥락을 잇고 있다. "당신네의 그 하느님 말입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 백성들의 고통을 알고 있습니까?" 또는 "당신 신은 인간의 고통을 돌보지 않지요?", "당신네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소?"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욥기 24장과 같은 항의인 것이다.

공산당이 14명의 목사를 체포해서 모두 총살했는데, 그중에 2명이 살아남았다. 그중의 한 사람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신 목사이다. 장 대령은 이 국민에게 새 힘을 주게 하려고 이 학살당한 목사들을 순교자로 클로즈업하여 신앙을 되찾게 하고자했는데, 문제는 신 목사였다. 그들을 높이 내세우면 살아남은 신 목사는 배신자로 클로즈업돼야 한다. 신 목사는 사람들에게 덕망이 있었던 사람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학살당할 때의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 목사는 침묵한다. 그는 그 장면을 못 봤다고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그 12명의 목사들이 전부 마지막 순간에 개처럼 비열하게(목숨에) 목숨을 부지하려고 공산당의 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려다가 결국은 그런 노력도 헛되이 죽는 것을 목도했던 것이다. 반면에 그만이 끝끝내 반항하다가 수사관에게 이상한 심리적 충격을 주어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장 대령은 끝끝내 그에게 침묵을 기대하고 이 대위는 진상을 폭로 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주장에서 신 목사에게 접근한다. 결국 군 당국은 국민의 12명의 순교자를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신 목사는 그가 목격자였다고 고백하고, 그들은 용감하게 죽었다고 했고, 자기만이 비열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래서 그는 교회 교인들에게 뭇매를 맞을 위기를 맞게 되었고, 한없는 모멸을 당한다. 마침내 순교자를 위한 예배에 신 목사는 등단하여 …(?)의 과장과 거짓말로 12 목사가 순교하던 장면을 열변을(토한다) 토하면서 강변한다. 이제 그는 거짓의 광대로 자기를 결정한 것이다.

왜?

심문이 아니라 우정의 대화에서 신 목사는 이 대위에게 자기가 광대 된 이유를 말한다. 그의 사랑하는 어린애가 죽었을 때이다. 그의 아내는 자식이 죽게 된 것은 자기의 죗값이고, 저 나라에 가면 그 어린애를 만나리라고 밤낮 거의 미친 사람처럼 자학하며 기도만 계속했단다. 더 볼 수 없었던 신 목사는 그녀를 그 번뇌에서 풀어 주기 위해서 천당도, 지옥도 없다고 단언했고 그때 그 아내는 절망에서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과거를 되새기면서 그는 "일생 신을 찾았소.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고통과 죽음, 가차 없는 죽음만 있는 인간뿐이었오"라고 한다. 이 말에서 보는 대로 그는 그 이상 천당, 지옥, 내세 따위를 믿을 수는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진상을 그대로 폭로하느냐? 그러면 이번에는 수만 명의 '그의 아내'를 낳게 될 것이다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서 그는 마침내 거짓말로라도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서 자기는 멸시의 대상이 되어 제물로 삼으면서 거짓 순교자 증언과 더불어 그의 신념에 반해서 '하느님은 살아계시오'라고 하면서 저 천당, 저 천국의 소망을 설교하기로 한 것이다.

3

그는 신을 찾다가 만나지 못했다. 이에 그가 착륙한 것은 고도의 휴머니즘이다. 이 휴머니즘은 자기를 제물로 한 휴머니즘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떤 교회에서는 이 소설을 금했다고 한다. 왜? 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땅 위에 부조리에 대해서 하느님은 아무런 대답이 못 된다는 사실이다. '정의가 이긴다', '참이 승리한다' 따위의 말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우리는) 그 포악했던 일본이 다시 당당한 대국으로 세계에 등장하는 것을 보라! 우리에게 침투하는 양상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듯 행세하는 것을 보라! 학살과 음모의 집단 중공이 당당히 세계에 진출하며, 아시아의 운명의 열쇠를 잡는 것을 보라! 일본-중공의 야합, 대만의 폐기, 월남 민족의 비참한 종반현상을 보라! 그런 것 다 그만두고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보라! 무엇을 잘못해서 이 민족이 이런 진통을 겪어야 하나? 올해 안에만 일어난 우리의 당한 충격을 보라! 그러면서도 이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국민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 속에 허덕인다. 이런 가운데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아 아니라 인간의 정치성뿐이다. 도대체 이 마당에서도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돌본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럼 하느님은 죽었다고 선언해 버릴까?

그러나 놀란 것은 문공부 발표에 남한의 종교 인구가 2/3에 해당하는 1,900만 명에 육박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우리네 현실을 바라보는 이들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이들이) 이들에게 (매달린) 피안적인 것에 대한 기대마저 (버린다면)버리고 살아가라고 한다면 어떻게 살까? 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래도 거짓말이라도 하면서 광대 노릇이라도 하면서 이들을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를 제물로 내 대기로 결정하는 것을 누가 그르다고 할 것인가?

신 목사는 하느님과 변론하여 결론을 얻고 이 민족을 대할 겨를이 없었다. 변론보다 더 급한 것은 지금 상처받고 쓰러진 자를 구급하는 일이다. 그는 그러기로 한 것이다.

4

그러나 신 목사는 무신론자는 결코 아니다. 그는 이 현실의 수수께끼의 대답으로써 하느님을 생각한 것을 포기했다. 그는 합리적으로, 실증적으로 하느님을 말할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내 십자가'(?)를 지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낙착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줄곧 기도를 계속한다. 이것은 아직 미해결의 장이다. 그러기에 모든 진상을 토로하고도 이 대위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한다.

"이 대위, 인간을 사랑하시오! 그들을 도와주시오! 절망과 싸우고, 사람을 사랑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을 가없게 여길 용기와 함께 십자가를 간직하시오!"라는 말과 더불어 "기도해 본 일 있소? … 이 대위 기도는 성취될 거요!"(라는 것이다)라고 한다.

신 목사는 이 부조리의 대답으로써 신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었다. 아니 그리스도가 보여 준 신은 이 부조리의 해결자, 고통을 덜어 주는 이가 아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고, 이 기고, 선하고, 악하고, 추하고, 깨끗하고, 옳고, 그르고하는 카테고리에 포함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성서의 하느님은 아니다. 아니 하느님은 인간의 시비를 가려주는 이가 아니라 압도하는 힘이요, 현실이다. 그는 변론의 저 끝의 합리의 정상 그의 보루(?)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

초대 그리스도인물의 그리스도 고백은 놀랍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공통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 부조리,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무엇을 가감하는 이가 아니라 바로 이 인간 역사의 고통 그 한복판에 계신다는 고백임과 동시에 바로 이 부조리 이 고통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고통 하느님의 고뇌라는 것이다.

신 목사는 고통, 부조리를 거둔 그 뒤의 신을 찾았다. 그러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바로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하느님이 고통받았다는 뜻이다.

욥기의 하느님은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한다. 폭풍의 피안이 아니라 바로 그 가운데서이다. 또 복음서는 나는 이겼다가 아니라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마르 15, 34)라는 비명 자체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순교자』의 박 대위는 자기 아버지를 저항해서 무신론자로 자처했으나 결국 "하느님은 항상 나와 같이 계셨어. 그렇지 않으면 이 여러 해 동안 내가 어떻게 그와 싸울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고, 임종 시에 그는 "인류가 비롯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했다. 이것은 무신 세계에서의 신 신앙이다. (욥은 심판의 주로 보았다.)

이 대위는 결국 부산에서 고 군목의 천막 교회에서 들리는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대관절(?) 앞으로 얼마 동안 그들에게 속삭여 오는 음성들—하나는 역사 안에서, 또 하나는 역사 너머 멀리서 오며 각각 그들에게 구원과 정의를 언약하고 그 언약에 그들이 맹세하도록 요구하는 그 음성들—에 귀를 기울에이게 될 것인가?"고 묻는다.

그는 결국 부조리 속에서도 기도와 찬양의 소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경험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결코 이른바 무신론적 소설이 아니라 욥기적인 문제에 대한 현대 그리고 한국인의 해석이다.

5

오늘의 모순, 고통, 부조리, 문제에 대해서(누가) 누구든지 하느님의 이름으로 답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바로 이 속에 하느님이 계시다.

그것은 변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이 사이의 괴리 속에서만 들을 수 있다.

(1972. 12. 『현존』/ 원제 : 하느님과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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