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學派)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호르크하이머(그는 지난 7월 7일 7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가 그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세계의 미래 전망과 오늘의 과제'에 대해서 중요한 말을 남겼다(Der Spiegel).
그는 자연과학과 기술이 중단 없이 계속 추진될 것을 전제하면서, 그 결과 인간을 완전히 안정된 생활을 누리도록할 것이며 마침내는 프로이트가 말한 문화에 대한 불안은 물론 아무런 불안도 걱정도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안정은 인간이 이 기술사회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자기를 그것에 내맡김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나 철학 따위는 물론이고 도덕이나 마침내는 인간의 정신마저도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회를 그대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고 했다. 까닭은 기술과학에는 도덕률 따위는 설 자리가 없고,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정신이나 그것에 결부된 종교나 철학 등은 인간의 미성숙기 즉 유년기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는 투쟁의 단계라고 본다. 이 단계는 아직 민족 간의 분열이 있으므로 약한 민족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강한 민족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비록 '해빙 무드'라고는 하지만 자기 강화를 위한 실리 추구의 투쟁일 뿐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런 투쟁은 과학기술과 정치세력이 야합한 지도층이 주도하는데, 그 투쟁방법이 도덕이나 종교 또는 사상 따위는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유의 정신 따위를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의 과제는 무엇일까? 그는 무엇보다 지식인은 인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결속해야 한다고 하며 그 투쟁의 길은 바로 인간의 미숙성 말하자면 인간의 유년기를 수호할 때만 가능하다고 한다. 유년기란 희망, 정신, 문화가 있는 때와 곳인데 이것은 결코 유치한 것이 아니라 기술사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유지될 때 개인과 정신의 자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호르크하이머의 전망대로라면 기술과학이 주도하는 이 세계는 인간 로봇화의 사회로 내달리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주도하는 역사이면서도 이 세계 자체가 인간이 소외되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세계인가? 물론 '인간을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그 요구를 분리하고,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 된다. 그럼 그 욕구란 무엇인가? 그것은 '안정', '편리'라는 것이다. 이 '안정', '편리'라는 인간의 욕구가 마침내 '개인과 정신의 자유 말살'이라는 대가를 강요하는 세계로의 진행을 허용하고 있다. 종교와 철학의 종언(終焉), '도덕률보다 실리로'라는 정치-외교의 노선 등이 서구 사회가 맞고 있는 현실이 되고 만 것은 바로 이런 현상이 그쪽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공산사회는 벌써 이 길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처음에 내세운 것은 이데올로기이지만 이제는 실리성이 그 이념마저 배제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바로 이런 현실이기 때문에 세계의 오염되지 않은 지식인들은 새로운 정신,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 몸부림친다. 공산 세계에 있으면서 오염되지 않은 지식인들은 저들이 버렸던 그리스도교, 특히 예수에 대해서 새삼스러운 관심을 집중하여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며 서구의 그리스도교 측에서도 공산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불타던 휴머니즘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가 하면 막다른 골목에 이른 저들의 정신이 새로운 활력소를 구하기 위해서 동양의 기본정신에 SOS를 연발한다.
과학기술이 만든 획일적 세계는 인간세계가 아니다. 인간을 배제한 세계는 우리에게 있어도 없어도 좋다. 인간은 생각하고 사상하는 자유를 갖는 한 인간이다. 종교나 철학이나 문학 따위는 정신의 자유의 산물이다. 이 정신은 인간 소외의 현실과의 대결을 그 양식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의 자리가 없어지는 사회란 바로 인간 정신이 없어지는 사회이며, 동시에 인간을 자유에서 예속으로 몰아넣는 사회이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유혹에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했다. 이 말은 오늘의 과학기술사회에서 자기 수호를 위해 저항하는 지식층에게 새삼스러운 의미를 주고 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이 과학기술의 능력이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미끼이다. 그러나 돌은 돌대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인간이 그러한 미끼가 될 것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돌이 떡이 되는 것은 인간을 편리하게 한다. 그러나 그 편리가 바로 인간을 노예화하기 때문에 거부한다. 인간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과학기술이 인간을 로봇화하려는 데 대한 저항이다. 과학기술은 '말씀'을 갖고 있지 않다. '말씀!' 이것은 정신의 자유, 생각하는 자유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새롭게 탄생한다. 종교, 철학, 문학 등은 자유로운 정신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한국은 '근대화'라는 커다란 목표 밑에서 과학기술의 절대화와 동시에 민족의 주체적 정신을 고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마당에서 점점 소외되어 가는 것은 인간 자체의 문제이다. 인간을 순수한 사회 경제적 요인에서 보려 하는 것이나 전체를 위한 하나의 기능(資材)으로만 보려는 것은 결국 비인간화의 과정이다. '근대화'라는 모토에서는 이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 종교, 철학, 문학 등의 과제가 있다. 그것은 무엇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냐하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과학기술은 돌을 떡이 되게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말씀'마저도 떡으로 만들거나 바꾸어 치는 횡포를 자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답게'가 밖으로부터 규제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그 자체의 내적 필연에서 인간다워져야 한다. 인간 실존의 요인은 그렇게 획일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규제될 때 다른 요인들이 기형적인 돌출구를 찾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의 지식인들은 무엇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투쟁에 공동전선을 펴야 한다. 그것은 인간 실존의 다양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그것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 투쟁은 "… 로만"에 대하여 "…으로"를 내세우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문학은 인간화의 투쟁 전선에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1973. 10. 『문학사상』 1주년 기념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