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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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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찬가
창세 8, 20-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세 8, 22).

1. 겨울의 풍경

지난 얼마 동안에 계속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어떤 언론인 모임에 갔더니 신문이 8면이 된 후 취잿거리에 근심했더니 연달아 일어나는 사건들 때문에 신문은 호경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하느님은 필요 없다는 성인(成人)이 됐다고 떠드는 시대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꼬리를 무니 어찌 된 일인가?

KAL기 납치사건! JAL 납치사건! 한국판 요화(妖花) 킬러 사건! 한 콜걸이 아무런 서류준비도 필요 없는 복수여권(複數旅券?)을 갖고 마음대로 세도를 부리다가 한강가에서 피살된 채로 발견됐으나, 묘하게도 '프로퓨모'(?)는 나타나지 않고 모든 보도기관(?)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무얼 뜻하는가? 왜 그렇게 싼 값으로, 그것도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강행군을 해서 그처럼 억울한 인명을 죽여야만 했는가? 499동의 건물은 누구를 위해 세운 건물인가? 그것을 맡긴 측! 그것이 번연히 무너질 것을 전제했어야 할 청부업자!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아직도 이러한 인간들에게 몸을 맡기고 살 수 있는가? 무얼 믿고 사나? 무엇 하나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으며, 어떤 것을 그리고 누구의 말을 진짜로 믿을 수 있는가?

4월이 왔다. 419 때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유를 위해 숭고한 피를 흘린 달이다. 얼마 전에 419 무덤을 찾아가 보았다. 말없이 잠든 듯 묻혀 있는데, 10년도 안 된 오늘! 저들의 피의 대가는 무엇인가? 왜 이제는 419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축소(?)하려는 기운이 나도는가? 대부분의 언론은 그것에 대해 거의 침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누가 저들의 죽음의 외침을 대변하나? 정말 그 무덤이 다시 열리기라도 해야 하는가? 정말 점점 믿을 것이 없는 악몽과 같은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419 무덤가에는 많은 소풍객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 풀을 밟고 소리를 치며 기쁨의 환호를 올렸다. 저들의 무덤이 젊은이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어 있어도 젊은 사자(獅子)들은 말이 없다. 이 봄을 맞은 저들은 무얼 생각할까? 야박한 인심이다.

2. 419와 봄

그러나 4. 19의 무덤에도 봄은 찾아 왔더라. 오랜 겨울의 단층을 뚫고 죽은 듯하던 풀들이 파랗게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저들은 그대로 땅속에 있고, 자연은 이 땅이 시작된 이래의 그 법칙을 따라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야박한 인간들에 대한 실의에 잠겨 있다가 그 돋아나는 풀을 보고 갑자기 변해도 변해도 변치 않고 꾸준히 지속하는 어떤 크나큰 품, 절대한 힘을 느꼈다.

봄! 다시 찾아준 봄! 그것은 확실히 무엇인가 절대(絶對)한 말을 했다. 그 언어를 나는 모른다.

그 순간 나는 전재동(全在東)의 「춘도(春福)」를 읽었다.

나에게 언어를 주십시오!
낡고 때 묻어 상처 같은
냄새와 고통의 껍질들
이런 것밖에 없는 나의 가슴에
새로운 말씀의 숲을 주십시오.
가난과 저주의 사태가 무너져 버린
죽음과 눈치만의 천지
그 형상을 상실하고
어두움에 누운 인간
나에게 당신을 말할 수 있고,
당신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언어를 먼저 주십시오.
이 살벌한 광야
산짐승들이 우글대는 가슴에
당신의 언어들이 우거질
햇빛 현란한 계절을 주십시오!
나에게 당신을 허락하십시오.

3. 봄의 찬가

오늘의 본문은 노아 홍수 다음에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이다. 하느님은 인간, 인간이 만든 세상이 너무도 더러워서 일소해 버리기 위해 비를 보내서 말끔히 청소해 버렸다. 그런 후 노아의 식구만이 살아나서 하느님께 제물을 정성껏 바쳤다. 하느님은 이들에게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창세 9, 21)라고 한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이 땅을 저주한다면 이 땅은 영원히 저주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세 9, 22)라고 한다. 즉 이 자연은 쉬지 않고,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대로 제 궤도를 돌리라는 언약이다.

여기 중요한 말씀이 있다. 이 자연은 결코 자명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위를 생각하면 이 인간의 무대인 이 자연도 박탈돼야 할 것이나 이 자연을 지속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 관계없이 지속하게 하느님이 허락한 것이다. 아무리 악해도, 아무리 이 땅 위에서 인간들이 잔악한 짓을 해도 자연은 충실하게 변함없이 제 궤도를 돌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주께서도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마태 11, 7)하고 물은 일이 있다. 또 "저 백합을 보라!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마태 6, 25-34)고 했다.

우리는 이 봄을 즐긴다. 그 침통한 겨울이 지나서 생명이 다시 약동하는 것을 보는 것은 우선 즐겁다. 그러나 이 봄에도 전혀 즐겁지 않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근심 걱정에 싸여서 전혀 그런 것에 눈이나 마음을 돌릴 새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마음을 한용운은 이렇게 노래했다.

옛 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에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했나 했더니
아! 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이 시인은 그 꽃을 보고도 근심을 못 잊어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봄은 정녕 즐거워야 할 봄이다. 그러나 생리적으로 또는 심미적인 감정만으로는 누구나 지닌 근심을 잠깐 잊어도 해방될 수는 없다.

오늘의 본문은 이 자연이 계절에 따라 도는 것을 그 자체가 아름답다거나 신비하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인간은 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자연을 그대로 성실하게 제 궤도를 돌게 하시는 창조자의 뜻에 감격한다.

우리가 봄을 즐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의 즐거움은 심미적인 데 그칠 수는 없다. 우리가 봄을 찬미하는 것은 그 봄의 자연을 통해서 그것을 이끄는 한 힘을 느끼기 때문이다. 온 세상, 온 인간(나를 포함한)이 이렇게 사악해도 그래도 변치 않는 창조주의 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도, 어느 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살지만 꿈만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은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 자연에 하느님의 뜻이 현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슬픔, 절망의 겨울을 박차고 환희의 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자연 자체가 곧 하느님의 계시라는 뜻은 아니다. 자연에 하느님은 현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자체가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에 의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연이 아름다워도 그것 자체에서 곧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는 없다. 루터의 말대로 "만일 하느님의 말씀과 표적(Zeichen)이 여기 있지 않으면 또 인식하지 못한다면 설령 하느님 자신이 여기 계시다고 해도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자연에 하느님의 뜻이 현재한 것을 안다.

님은 "백합을 보라! 꽃을 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님은 아름다움에 도취해서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하느님이 기르고 먹이는 것을 느꼈다. 따라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마태 6, 31)고 할 수 있었다. 즉 "근심하는 자여! 인간에게 실망하는 자여! 저 자연을 봐라! 저 한송이 꽃, 저 한마리의 새에서 너를 향해 끝끝내 변치 않는 아버지 하느님을 느끼고 믿어라!"라는 말씀이다.

시편의 시인은 이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하늘이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 1-4).

이 시인은 언어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연을 통해 들었다.

4. 자연과 신

자연은 하느님의 계시 자체는 아니다.

자연 자체는 인간에게 언제나 두 가지 가능성을 가져다준다. 가령 한 면에서 보면 조화, 평화이다. 그러나 반면에 투쟁, 약육강식의 잔인성이 있다. 또 해나 달은 인간에게 보호의 손길 같으나 화산, 지진 같은 것은 파괴의 마력 같다. 사람은 따라서 그 어느 면과 부딪 치냐에 따라서 그의 신관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하느님의 진실과 그의 계심을 경험한다. 소위 천체(天體)에서 인간의 건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하는 것을 느끼며, 반면에 그분의 평화와 조화는 이 인간세계의 평화나 신의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자연을 즐긴다. 그러나 그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들으며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지시를 본다.

그리스도인은 이 자연 속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내 가까이 계시 어서 우리에게 계속 말씀함을 듣는다.

언제나 내 얼굴 앞에 가득히 오시는
당신은 머리도 가슴도 모두
하나의 초점에 완전히 계시어
그 초점은 무한으로 자리를 펴고,
사랑을 흠뻑 안고 영원히
푸르게 젊음을 노래하심이여!
 
내 초원을 축복으로 꽃피우시고
내 산야에 풍년을 모으시고
고독의 뿌리 그 끝 끝까지 쓰다듬어
생명의 아우성 초연하신 당신으로
한껏 발돋움한 의지에
당신은 찬연한 의미를 내리심이여!
하여, 내 가슴에 쌓이고 쌓이는
생의 보람이며 이미 들을
태고의 당신을 우러러
이곳 한점 목숨이 눈을 뜨고
당신을 이고, 가득히 안는
기도의 오솔길을 놓으심이여.(전재동)

봄! 이 봄은 우리에게 걱정과 슬픔과 절망의 단(斷)의 계기가 된다. 슬픔과 고통과 절망의 벽을 뚫고 들어온다. 이 봄! 생명이 움트는 그 현실을 보면서 그 생명의 기운처럼 "그래도 당신은 변치 않고 거기 건재하십니다!" 하는 찬가를 높이 부른다.

(197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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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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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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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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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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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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