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주최한 '민족이해의 정통성'을 말하는 모임에서 '그리스도교의 민족이해'라는 테마를 맡고 히틀러 당시의 독일 교회가 겪은 민족문제를 살피기 위해서 니믈러가 쓴 『고백교회의 투쟁과 증거』라는 5백여 면에 달하는 책을 들추다가 마침내 그 책에 빨려들었다. 그 후부터 고백이란 말의 의미가 새삼 내게서 비중을 차지한다.
고백이란 말은 서슬이 푸른 칼날을 보는 느낌을 준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고백한다는 말에 익숙했기에 이 말에 무감각할 수 있다. 까닭은 값싼 사랑의 고백이 범람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나 참사랑을 고백할 때 떨리지 않을 수 있으랴! 고백은 자기를 완전히 무장 해제할 뿐 아니라 자기 전체를 그대로 개방하는 것이다. 고백을 듣는 사람도 어찌 엄숙하지 않을 수 있으랴! 까닭은 그 순간은 평범하거나 중립적이던 관계에서 양극의 어느 한 관계로 변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내적 고민 또는 문제의 고백을 들을 처지에 서게 된다. 그것은 그의 비밀을 열어 보아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순간도 참 엄숙해질 수밖에 없다. 까닭은 그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그의 비밀에 내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비극이라면 그 비극에, 슬픔이라면 그 슬픔에 내가 가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시에 내가 그의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할 의무를 갖는 순간이며, 필요하다면 일생을 입 다물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논리적인 죄 문제를 고민하는 고백적인 편지를 받은 일이 있다. 때로는 그와 안면이 없는 경우도 있다—적어도 내 편에서. 그럴 때면 저 사람이 내가 어떤 인간이지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이처럼 신뢰하나 생각하고 새삼 놀란다. 그중에는 내 기준으로 보아 대수로운 게 아닌 경우도 있으나 끝끝내 그의 비밀을 지켜 주어야만 한다.
나는 요새 가톨릭의 '고해'라는 제도에 참 매력을 느낀다. 그것을 '성사'라고 하고 그 고백을 받은 신부는 생명을 내걸고 그 비밀을 지킬 의무를 지닌 것은 깊이 생각한 원리이다. 그런데 고해를 받는 측에서 볼 때문제가 있다. 까닭은 그것을 엄숙하게 받으면 사람이 일생 몇 사람의 고백이나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사람은 고백해야만 살 수 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가슴에 독기가 되어 그냥 괴롭힐 테니까! 고백은 반드시 어떤 해결을 전제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직 고백하는 것만으로 시원하다. 까닭은 그 내적 비밀을 어느 누구와 나누어 가진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신앙고백'의 경우는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자기의 신념이 어떤 위기를 당했을 때, 그리고 어떤 동요를 느낄 때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신념에 관한 확인임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그 입장을 선포하는 것이다. 독일 교회가 고백한 것은 히틀러의 독재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지반이 흔들릴 때 행해진 것이다. 그것은 자기 다짐임과 동시에 생명을 내대는 항거의 선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과적으로 생명을 내대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천하에서 하느님께 향한 고백인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으로 말하면 자기 다짐 이겠으나 하느님께 새롭게 맹세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당신만을 믿습니다"라는 형식도 결국 고백의 행위이다.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사색의 자료도 아니며, 어떤 교훈의 교본도 아니다. 그것은 고백의 대상이다. 그리스도교가 그 진리를 고백의 대상으로 할 수 있었을 때는 강했으며 일사불란한 견고함이 있었다. 이 고백은 '교리'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 '교리'가 권위를 잃은 때부터 그리스도교에 혼란이 왔고 나약해졌다. 그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적인 성격인 고백성이 희미해졌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성을 되찾아야 된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새삼 이 점을 강조하며, 나 자신에게도 계속 다짐한다. 어떤 이는 오늘같이 다원화된 시대, 그리고 교리가 붕괴한 마당에 어떻게 고백하느냐고 반문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획일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참 신앙에서 살려면 비록 내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내 신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백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그게 바로 교회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기도 후에 또는 설교를 듣고 "아멘" 하는 경우 그것은 바로 고백이다. 그런데 요새 교회에는 아멘 소리도 숨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고백성의 상실증의 발로이다.
세상은 복잡하다. 가치 기준이 모호해졌다. 따라서 판단 기준을 상실한 것이 오늘의 특징이다. 이런 마당에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찾기 위해서도 다시 잃은 고백성을 되찾아야 하겠다.
(1973. 2.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