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행위란 무조건 양보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자는 악한 자에 대항하지 않고 무엇이나 양보하며, 충돌을 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산상설교 중의 마태오복음 5장 38절 이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예전의 번역에는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을 돌려 대며"로 되어 있다. 이 번역대로 하면 악한 자는 되도록 슬슬 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악한 자'라고 번역된 희랍말 poneros는 남성 형용사도 되며, 중성 형용사도 된다. 남성 형용사로 이해하면 '악한 자'가 되며 중성 형용사로 하면 '악한 것'이 된다. 만일에 우리가 이것을 중성 형용사라고 본다면 위의 말뜻은 '악한 것을 대항하지 말라'가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악에게 양보하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물론 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성서야말로 악한 것을 개인에게서, 사회에서 없애버리려는 것을 그 초점으로하고 있다. 일반윤리에서는 악이라는 것을 무엇이 결함되어 있다 또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 상태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악을 어떤 소극적인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능동적인 힘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을 침식해 들어가고 인간 사회를 노예화하는 힘이다. 그런 뜻에서 악을 악마 또는 사탄의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사탄이 지배하고 있는 때이다. 따라서 이 사탄을 극복하는 일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일과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사탄이 그 세력의 자리에서 추락되는 일과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같은 것으로 보았고, 또 그 짧은 기도문에서도 "악에서 구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렇다면 '악한 자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대항한다'로 번역된 희랍 말 antistenai는 상반(相反) 개념이다. 저쪽에서 내게 어떻게 하는 데에 따른 반작용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대항이 아니라 보복행위를 뜻할 수도 있다. 사실상 이 본문의 관계를 보면 위의 말은 '보복하지 말라'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렇다면 '옛 사람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보복하나 너희는 그런 보복을 하지 말라'는 뜻이 분명하다. 『새번역』은 이 점을 제대로 밝혀서 '보복하지 말라'고 했다.
'악한 자를 대항하지 말라'와 '보복하지 말라'에는 큰 차이가 있다. '대항하지 말라'고 하면 무조건 양보하라는 뜻이 되지만 '보복하지 말라'는 '네가 나를 이러이러하게 해쳤으니 나도…'라는 행위, '네가 나를 칼로 찔렀으니 나도…', '네가 권모술수를 쓰니 나도…'라는 행위, 말하자면 악한 자가 악으로 내게 대하니 나도 악으로 너를 대한다는 반작용인데 이러한 복수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악을 대항하지 말라'는 말과는 다르다. 아니,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은 따라서 무조건 대항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바울로는 그 뜻을 제대로 밝혔다: "아무에게도 악으로써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도모하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 말고…"(로마 12, 17 이하).
우리 본문은 '악한 자에게 복수하지 말라'고 하고 '오른 뺨을 치면 왼 뺨, 네 속옷을 달라면 겉옷을, 억지로 5리를 가자면 10리를'이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회피도 아니며 악과의 타협도 아니다. 아니, 사랑의 공세이다. 이것은 증오를 사랑으로, 악을 선으로 대항하는 공세적인 행위를 명령한 것이다. 루가복음은 좀 더 구체적으로, 미움을 선으로, 저주를 축복으로, 모욕을 기도로 대항하라고 했다.(루가 6, 27.28) 사랑의 행위는 악을 용납하거나 타협하는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선, 진리, 정의의 증거를 함께하는 행위이다. 선을 위한 사람이 악한 자가하는 대로 악을 도구로 삼으면 악에게 항복하는 것이 된다. 증오를 증오로 갚으면 증오에 굴복하는 행위이다. 사랑하는 자는 악은 반드시 극복돼야 할 것을 믿고 행위하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 선, 진리가 반드시 악을 극복할 것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써 악에게 대항한다.
사랑하는 자는 악과 사람을 구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악은 끝까지 저항하면서 사람은 사랑한다. 성서는 악한 자는 악의 힘의 노예상태에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 대항하므로 악에 사로잡힌 사람을 그 악에서 구출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과 악에 대항한다는 일은 동시적인 일이다. 따라서 사랑한다는 일은 공세적인 자세이며 행위이다. '악한 자가 오른 뺨을 치면 그저 얻어 맞아라'가 아니라 '왼 뺨을 돌려대라'고 한다. 이것은 사랑의 공세를 뜻한다. 사랑의 공세는 악에 대한 저항이다. 그는 비록 양보하면서도 그것은 악이라는 것을 사랑으로써 증거한다. 사랑은 따라서 결코 악이나 불의를 덮어두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으로써 미움을 선으로써 악의 진상을 폭로하며, 종복한다.
그러므로 '악한 자를 보복하지 말라'는 것은 무저항주의 같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저항, 사랑의 공세성을 말한다.
(1970. 8. 『새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