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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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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해

30대 초에 나는 휴가 때마다 즐겨 사찰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것은 유달리 산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편리해서가 아니라, 불교 주위에서 무슨 냄새라도 맡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워낙 배짱이 없는 탓인지, 언제나 주위에서만 맴돌았지 변변한 대화자를 하나 못 만났다.

해인사에서 여름 한 달을 보낸 일이 있다. 그런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거기 내가 출입하던 화장실 이름이 해우랑(解憂廊)이라는 것과 그 변소에 꼴사납게 앉아 영원이라는 개념이 계시처럼 껍질을 벗고 내 경험 안을 살짝 스칠 때 그만 아찔해져서 그냥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순간이다.

해우랑! 그 음산한 곳을 들어설 적마다 이렇게 쓴 팻말이 무언가 많은 것을 말해 줬고, 점차 그곳과 친근해지게 했다. '근심을 푸는 곳', 장소와 이름이 너무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배설해야 할 것을 못 하고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안에서 독이 되어 자신을 병들게 하거나 아니면 밖으로 내뿜어 남이 상하게 마련이다.

썩은 건 싹 버려야 해! 썩은 나무 가지도 잘라 주지 않으면 옆의 성한 가지를 먹어들어 가는데, 썩은 걸 안에 담은 채 밖을 아무리 가리우고 억눌러 봐야 결국 전체가 썩고 말게 될 따름이지 뭔가!

육체적 배설구를 막을 수 없다면 정신적 배설구인 입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 까닭은 그것이 살아 있기 때문이며 삶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말은 살아 있는 한 굶어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쓴다. 그러나 난 요새 그것을 딴 의미로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산 입은 가만있지 않고 또 누구도 그리고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으니 결국 거미줄처럼 많은지! 무슨 말을 하면 되고, 안 되고는 걸러내기 힘들다. 어떤 놈이 법망이라고 했나! 아마 '찍' 해도 걸리고 '짹' 해도 걸리는 신세에서 자신을 큰 그물 속에 갇힌 참새라도 된 신세로 생각한 사람이 만든 말이겠지!

법이란 것은 사람을 권력에서 보호하자는 데 그 근본정신이 있지 않나! 부자에게서 가난한 자를, 지배자에게서 피지배자를 보호하기 위해 부한 자, 강한 자의 권력을 제한하자는 것이 법 제정의 본정신이 아닌가! 성서의 법 정신은 두말할 것 없이 그렇다. 구약의 가장 원초적인 법전은 출애굽 20-23장을 보면 그 정신이 너무도 뚜렷하다. 무엇보다 그 법은 하나님이 인간과의 계약이라는 사상이 중요하다. 이른바 전능한 창조자로서의 신이라면 전권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가 인간과 계약한다는 말은 스스로 자신과의 전능을 제한(制限)한다는 말이 아닌가! 전능자의 자승자박이 바로 법이었다. 그런 정신에 바탕을 두었기에 그 법전의 내용은 일관해서 약자 옹호를 지표로 삼고 있다. 마그나카르타를 위시한 현대적 의미의 법 선정 정신도 왕이 스스로 왕권을 제한하는 데 그 동기가 있다. 그 후 권력의 횡포를 막기 위해 삼권분립을 위시해서 계속 권력의 분화 또는 상호 제재의 장치를 해 왔다. 그런데 그런 법이 집권자의 손에 잡히면 이른바 법망이 된다. 난 언제부터인가 법하면 어릴 때 어른들을 따라다니면서 본 투망이라고 불리는 고기잡이 장면을 연상하게 됐다. 가늘게 꼰 단단한 줄로 짠 그물이 거녀(巨女)의 치마폭 모양을 했는데, 그 끝에 작은 첫 덩어리들이 줄줄이 달려 있다. 그것을 여인이 치맛주름을 잡듯이 차곡차곡 한 팔 위에 쌓아 얹고 다른 한 팔로 그 중심을 잡아 고기떼들이 있음 직한 물 위에 휘뿌리면 그물은 가에 달린 납덩어리들의 무게로 살그머니 가라앉는다. 그다음 그것을 다시 차근차근 거머쥐면서 끝을 향해 조여서 강 밖으로 끌고 나오면 천진하게 삶을 즐기던 잔고기 떼들이 수두룩하게 걸려서 파닥거린다. 이걸 보고 그날의 밥상을 연상하면서 침을 흘리는 고기잡이! 법망이라니! 이건 법에 대한 악담 중 가장 심한 것이다. 사람들이 으레 해야 할 말도 제대로 못 한 것은 그 입에 법망이 거미줄처럼 쳐졌기 때문이 아닌가! 왜 사람들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을 못 하는가? 그것도 법망이 무서워서가 아닐까?

법은 권력의 횡포를 제한하는 데 쓰여야지 잡는 그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법은 정당한 길을 버리고 폭행으로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그 폭력을 막으려는 것이지 새 잡는 그물이나 물기를 기다려 드리운 낚시 바늘 구실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예수의 말씀 중에 가장 정당하고 강력한 선언으로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를 꼽고 늘 생각한다.

이것은 바로 법을 법망으로 아는 자들을 향한 규탄이다. 복음에서는 바리새파는 바로 신의 이름을 등에 업은 법을, 사람을 걸어 잡는 그물로 성격화한다. 저들은 법이라는 그물을 들고 다니며 사람을 낚는 역할을 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한 줌씩 따서 껍질을 벗겨 먹은 모양이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안식일 법'이라는 그물로 저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저들이 안식일에 추수를 했으니, 죄인이라고 고발한 것이다. 안식일에는 쉬라는 것이 안식일 법이다. 추수하는 것은 일이니, 안식일에 추수해서는 안 된다. 밀 이삭을 딴 것은 추수니 안식일법의 위반이다. 그런데 법을 그물로 보니까 안식일에 배고파서 이삭을 하나 자르는 것은 안식일 법에 위반되는 것이다. 법의 기본정신을 버리고 법을 그물처럼 눈에 걸고 사람을 보면 이렇게 비인간화의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그런 걸 볼 때 오죽하면 생밀을 씹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야 한다. 그런데 안식일 제정의 정신은 잊고 그걸 사람들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으니까 저들이 범법자로 보이게 된 것이다.

안식일법 제정도 실은 약자를 강자의 수탈에서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노동은 상전들의 일이 아니라 그 밑에 지배받는 자들의 것이었다. 아들 딸들, 남종, 여종, 심지어 가축들도 그날(안식일)에는 쉬게 하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안식일의 정신은 안식일법의 기본정신을 살리고 있다. 이것은 7년 만에 한 번씩 빚 값으로 노예가 된 사람을 되돌려 보내고, 진 빚을 장부에서 처리해 버리고, 그리고 지주는 토지를 놀려서 가난한 자들이 이용하도록 해 주는 제도이다. 이게 안식일 제정의 기본정신이다. 그런데 이것을 제도화하는 기틀을 줄 신학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엿새 동안 만들고 칠일만에 쉬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신을 믿는 도리를 이루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법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잘 한 듯 하나 이렇게 함으로써 그 본뜻과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까닭은 이 법망에 걸리는 것이 송사리떼 뿐이기 때문이었다. 즉 안식일에 쉬려고 해도 쉴 수 없는 자들—가난 때문에, 천한 자의 직업 때문에—만이 걸리게 됐던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선현들은 그물을 만들어도 되도록 그물코를 크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잔고기들은 다 빠져나가고 큰 고기만 잡으라는 말이다. 그런데 법의 그물은 잔고기만 잡히고 큰 것은 피하거나 뚫고 나갈 만큼 약하게 된 게 탈인데, 아마 예수 당시의 지배층도 그런 그 물질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저들을 "왜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또는 "위선자들!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의와 자비의 신의를 소홀히한다"고 준엄하게 문책 당했다. 저들이야말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식의 비리를 저지르는 자들이다.

생각하다 보니 변소에서 푸는 일에서 법으로 매는 데 대한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맺힌 것은 풀어야지, 모든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되지 계속 얽어매기만 하면 그건 정말 풀자는 행위는 아니다. 그런데 세상이 하도 조여드니 내 생각이 '해우랑'에서 법망으로 와서 분노에 떨게 됐나 보다.

(1979. 10.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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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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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축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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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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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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