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앎(眞知)에의 길을 가로막는 것으로 '편견'이란 게 있다. F. 베이컨은 그것을 '우상'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우상에는 네 가지가 있다.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이 네 우상은 그 나름의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종족의 우상>은 '사람'이라는 종족이 저지르기 쉬운 착각이나, 그릇된 판단을 가리킨다. 자기 성찰이나 비판은 아랑곳없이, 그저 감정이나 인상으로 사실을 확정하거나 사건을 처리하려 드는 것은 극히 위험스런 일이다. 하나의 나무람이나 고발이, 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괘씸하기 때문에 거부된다면, 그것은 으레 사태에 대한 인식의 도착과 오판을 유발하기 쉽다.
<동굴의우상>은 그림자를 실체로써, 환상을 사실로써 고집하는 편견이다. 이 무분별이 습성화되면, 자신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허위를 진리로써 강요하고, 사실에 대한 올바른 증언을 '사실 왜곡'으로 몰아세운다. <철의 장막>, <아집의 성채>, 여기에 어찌 자유에의 호소가 미칠 것인가.
<시장의 우상>은 언어로 하여 빚어진 편견이다. '말'이 있다고 하여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이 실재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가상, 허위, 무의미의 언어일 수 있다. '존재와 진리의 집'으로서의 말의 참 기능을 저버리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불순한 '말의 장난'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언어의 진실은 대중을 우롱하는 우민 정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의 '시장'의 이미지는 말의 속임수보다, 상업주의가 몰고 온 '인간거래'의 현장으로 압축된다. <시장의 우상>이 '돈이면 다'라는 '황금의 우상'으로 자리바꿈한 셈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자유를 살고, 권리를 살고, 배짱(주체)을 사는 존재이다. '빵'에 현혹되어 '말씀'을 팔 수는 없다.
<극장의 우상>은 진리 탐구의 정신과 자유스런 사고를 마다하고 '권위'와 '전통'에 기대려는 자세이다. 권위와 전통을 강조하는 언저리에는 새로운 질서와 가능성을 못 보게 하는 악마스런 속임수가 깔려 있다. '어제'에의 안주는 '내일'에의 창조를 방해한다. 권위가 곧 진리일 수 없으며, 전통이 곧 구원일 수 없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억압을 보호처럼 가장하고, 거짓과 부정을 진실과 정의로서 '사실화'하려는 이 연출은 이제 불식되어야 한다. 그것은 극장 안에서나 통한다. 그런데 극장에는 연기자와 구경꾼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심판의 막이 내리면, 연극은 모두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또 하나의 우상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성전의 우상>이 그것이다. <성전의 우상>은 신 아닌 것을 신으로 높이는 '신화'의 전도이다. 신을 '궁극적 실재'로 풀이한다면, 잠정적인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드높이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신처럼 받드는 인간의 '신격화'는 우상숭배의 극치이다. 게다가 이 우상의 전당은 신성불가침의 곳으로 신성화되어, 뭇사람에게 복종과 예배를 강요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종교적 우상이 신앙과 이데올로기와 신의 이름으로 수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 신의 탈신화, 사람의 탈신격화가 요청된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다"는 베드로의 고백에는 예수의 대한 우상화가 엿보인다. 그러나 "나는 예루살렘이 올라가 죽어야겠다"는 예수의 응답에는 자신에 대한 탈우상화가 강조된다.
탈우상화는 참 앎에 이르는, 사실 자체에 도달하는, 진리 그것을 실현하는, 그리고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참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첫걸음이다.
(197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