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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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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의미

회개(metanoia)란 지금까지 하던 일, 가던 방향이 잘못된 것을 알 때 뉘우쳐 참회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소극적인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뜻이 있다. 그것은 그 잘못된 것을 그만두고 뉘우치는 데 그치지 않고 돌아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참 회개란 적극적인 것이다. 정말 그 앞에 나갈 뚜렷한 참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참 잘못된 것을 진정으로 느끼지도 못하거니와 느꼈다고 해도 돌아갈 힘이 와지지 않는 것이다―협박이나 공포에서 못하게는 될지언정.

탕자가 그 아버지를 떠나 다른 길로 갔다. 탕자에게 그 일은 정당한 자기권리 주장이지 그릇된 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길이 가다가 막혀버렸다. 그러나 비록 돼지와 더불어 침식을 같이 하므로 비애와 고통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후회는 있을 수 있어도 회개는 있을 수 없다. 단지 그가 돌아갈 수 있는 것, 즉 회개의 길은 아버지의 집이 뚜렷이 보였을 때다. "아버지의 집", 이렇게 뚜렷한 것이 보일 때 그는 쉽게 지금까지 가던 길에서 "돌아 앞으로 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저의 아버지의 집이, 즉 그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소리! 실상 그 아버지는 대문 밖에서 그 버리고 간 아들을 한없이 기다린 것이다. 내게로 오라! 이 음성은 언제나 회개에 선행된다. 아버지가 부르는 아들은 건강하고 출세한 아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아버지가 염려하고 부르는 아들은 실수하고 방탕하고 헐벗고 병든 아들이다. 낙오되어 절망에 빠졌거나 병들어 외로울 때 곁에 있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그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중심이다. 성하고 행복하게 사는 아들이면 오히려 부를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아버지다. 내가 의인(성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병든 자)을 부르러 왔다는 참 아버지의 마음 그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가 수고하고 있는 일, 무거운 짐진 사실에 관심하신다. 그는 우리의 대답에 있어서가 아니고 물음에, 우리 들의 확신에 있어서가 아니고 불안에, 우리들의 발견에 있어서가 아니고 연구에 관심하신다. 그는 건실한 자의 곁을 지나서 병든 자에게 향하신다. 어떤 의미로나 올바른 자의 곁을 조용히 그러나 단연 지나서 세리에게 향한다. 그는 우리 젊은이에게 그 성적증명서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공장에서 그 성과에 대해서도 그 평판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부모나 목사가 그들에게 만족하는가의 여부도 묻지 않는다. 그는 오직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서 근로에 의해서도 태만에 의해서도, 순종에 의해서도 방종에 의해서도 참으로 안정할 수 없는 그 어쩔 수 없는 불만과 동경에 대해서 물으신다. 그리고 그 우수에 대해서 그것이 이렇다할 근거도 이렇다할 명칭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을 일으키는 우수에 대해서 묻는다.

그는 부인들에게 그 가정 세간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또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그의 가진 좋은 성품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오직 그는 피로한 그, 어딘지 허전한, 그래서 여자됨을 한탄해서 거기를 뛰쳐나가려는 그 내적 고민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 남자들에게 우리의 지위에 대해서, 우리의 업적에 대해서, 직업인이며 시민으로서의 활동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오직 그는 우리들의 은밀한 부끄러운 일에 대해서, 우리 양심 속에 있는 이기욕의 상처에 대해서, 우리의 정열과 우리의 의의 나타난 또는 가리워진 비극에 대해서 묻는다. 예수는 우리 신자들에게 그 회심과 성화의 상태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그런 것은 이미 바리새인들이 한 일이다. 그는 오직 그들 안에서도 구원받을 수 없는 혼이 "내가 믿사오니 믿음 없는 나를 도우소서"(막 9, 24)라고 부르짖는 아주 깊은 데를 찾으신다. 진실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름아닌 주가 부르는 대상이다. 그 무거운 짐이야, 일에 분주해서건 책임이 중해서건, 제 죄 때문이건.

이 소리를 듣고 그대로 돌아가는 아들의 길은 회개의 길이다. 아버지의 부르는 소리 듣지 못하고 돌아가는 아들의 길은 행패요, 불한당의 길이다. 거기는 몰염치와 비열과 사특함밖에 있을 것이 없다. 그것은 돌아감이 아니다. 뺏을 렴이다. 참회가 아니라 원망이다. 아버지를 찾아감이 아니다. 자기를 찾아감이다. 아버지 소리를 듣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서감이 회개이다. 체면이니 준비를 갖추어서 가자는 여유를 가지면 회개는 아니다. 시위다. 혹은 그 아들은 "내가 무슨 낯으로 아버지를 뵈오리" 하는 심정으로 술마시며 통곡하므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있을 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못가는 것이 아니다. 안 가는 것이다. 그 눈물은 회개(돌아감)의 눈물이 아니라 안 돌아가기 위한 눈물이다. 그 눈물은 오히려 제대로 못도는 제 마른 마음에 기름침인지 모른다. 그것은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감이 회개이다. 제 것 다 가지고(영화나 비참이나, 기쁨이나 슬픔이나 간에) 아버지 집에 돌아가는 것이다. 아버지 것 가지고 제게로 돌아옴이 회개가 아니다. 교회로 나가지 않으면 어쩐지 불안하다. 부흥회에 안 참석하면 어쩐지 불안하다. 눈물을 흘리고 방성대곡이라도 하지 않으면 어쩐지 불안하다. 그래서 교회도 가고 부흥회도 간다. 그러나 제 생활은 그대로다. 제 생활계획표에는 변동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 회개(돌아감)가 아니다. 어쩐지 그대로 모른 척하면 노할 것 같은 하나님을 따돌려버리자는 것이다. 죽은 조상 제사를 안 지내면 자손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해서 철 차리는 동양의 미련한 자식처럼 해치우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게 아니다. 빚꾼 쫓듯 쫓자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로 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발디딤을 심자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가 아니다. 자기 관철이다. 자기 조화다. 아버지에게 돌아감이 회개이지 잠깐 문안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갈릴리 들에서 주님과 뭇무리들이 모여서 하루종일 같이 지내고 호흡했다. 그것만 보면 저들은 같은 세상(형편)에서 사는 생명이다. 그러나 해가 저가므로 무리는 각각 집으로, 예수는 산으로 돌아갔다. 밤에 돌아간 곳이 그가 있는 곳이다. 낮에 만난 장소는 다방이요 판문점이다. 저들은 낮에는 회견이요 밤에는 돌아갔다. 그런데 무리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산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간 것은 제 물건 제 것 찾아 간 것이요, 산으로 간 이는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참 돌아감이란 회견이 아니다. 동거다. 참 돌아감은 낮이 아니라 밤이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왔다. 그는 돌아오려는가했더니 실상은 더붙여 가려고 하였다. 그는 아버지 집에 돌아올렴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가져다 제 돌아갈 집에 장식하자고 회견차 온 것이다. 한 사람이 예수에게 부르심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죽은 부모를 장례 하러 돌아가야겠다고 거절했다. 그는 부해서도 기쁜 일이 기다려서도 아니었다. 그러나 쓰든 쓰리든 제 집이 역시 돌아갈 집이란 심사가하는 일이다. 집 떠메고 다니는 달팽이 새끼, 다리 매이고 조롱문 나선 참새 새끼, 코 꿰우고 말뚝 도는 소새끼! 거기에 무슨 돌아감이 있으랴! 거기 어디 참회개가 있으랴! 해지면 피곤한 다리끌고 제 집으로 찾아드는 저 발걸음, 그 걸음아 그 아내, 그 남편, 그자식에게만 멈춘 다면 문턱에 비끌어 매인 영 못 돌아올 죽은 자식이지. 명예, 지위, 공로, 학식, 요컨대 꼭 잡아 날로 그것을 장식하고 확충하기에만 겨를 없는 무리들, 둥지 트는 누에 새끼들이지 더 무엇인가?

주님은 "내게로 오라"고 간곡히 부르신다. 그 주님은 어데서 부르시나? 어디로 오라는 것인가? 주님이 이천년 전 팔레스틴의 과거에서 부른다면 내게는 상관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나를 사가로 부르거나, 시인으로 일으키려는 것은 될지언정 돌아갈 곳은 못 된다. 시간 안에 사는 탓에 우리는 과거에로 기어오를 수는 없다. 그런데서 부르는 주님이라면 내가 애굽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과 다를 게 없다. 주님은 저 하늘, 하나님 우편에서 나를 부른대도 나와 상관이 없다. 그 초월계란 내 오를 수도 없거니와 이대로는 오른대도 인식의 대상일 수도 없다. 칸트는 애당초에 이성의 한계를 그어버림으로써 그밖의 세계는 no touch(불간섭)한다고 해서 겸손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따지고 보면 어머니를 믿는 어린애같은 겸손은 아니고 국경수비병의 겸손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당신께 간섭하지 않은 대신 당신도 내 영역은 no touch라는 팻말을 박은 것이다. "주님께 가긴 가야 하겠는데 이런 현실에서야 어떻게!" 하는 한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한탄이 아니고 주님을 벌써 머나먼 곳에 추방한 변명이다. 좋게 말하면 높이 모셔놓고 있다. 그러나 늙은 부모를 저 윗방 구석에 모시듯 모신 것이다. 내 손이 닿지 못할 데 계신 이는 우리 주님일 수는 없다. 내 발이 다다를 수 없는 집은 내 갈 내 아버지집은 못 된다. 우리 주님은 시간과 공간에 있어서 바로 내 있는 여기 계시어 나를 부른다. 수가 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은 마음의 향수가 짙게 되니 예루살렘으로 갈까? 이 뒷산 쪽으로 갈까? 갈 바를 몰라 물었다. 그때 주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시었다. 곧 이 때라는 이 시대니 이 지방이니가 아니다. 이 여인에게 이 때란 바로 그 순간, 그 디딘 현실이다. 그것은 그가 찾아 오르거나 찾아 방황해서 돌아갈 곳이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다. 찾아가는 그 때가 아니라 찾아온 이 때다. 아버지집에 있을 곳 이 많다는 주님의 말씀에 답답해진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은 어찌 알겠나이까"라고 호소했다. 그는 더듬더듬 강 건너고 산 넘고 구름 타고 오르기라도 해야 아버지 집에 가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갈 길도 찾을 집도 받을 삶도 바로 곁에 있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이제 찾아갈 어떤 데 계신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선 그 자리에 계시다. 바로 내 손이, 내 마음이, 내 관심이 있는 거기서 부르신다. 그래야 참 계신 그다. 그렇게 안 계시면 어디서든지 만날 수 없는 이다. 바로 요 내 현실 복판에 서서 부르신다. 성모 마리아가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를 수태한 게 아니고 그 제약된 환경에 있은 채 그를 배었다. 베드로, 요한, 바울이 스승을 찾아 산에라도 오른 것이 아니고 제 일에 정신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오라는 주님을 만났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 소리를 듣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응하는 자가 진실로 회개하는 자다.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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