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고난의 의미

그것은 지난 9월 20일이었지요. 625동란 이후 소식을 전혀 몰라 안타까워하던 그대와 만났는데도 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게 슬퍼해야만 했던지요. "우리는 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만 합니까?" 목이 메어서 말을 계속하지 못하고 물으시던 그대의 아픈 마음에 눈물로 대할 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헤어진 후 지금에야 비로소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새삼스러운 해답을 가져서가 아니고 그저 역시 수난자의 한 사람인 내 마음의 조잡한 경로와 지금의 내 믿고 있는 바를 그대로 알려드리려는 나의 정성일 뿐입니다.

625동란은 나를 마치 어떤 무서운 '해머'에라도 맞은 것같이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퍽이나 오랫동안 시비와 선악을 분별할 염도 못하고 몽롱하게 마치 길든 짐승과도 같이 되어가는 대로 살다가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했을 때 나의 심정은 그저 한없이 슬프 기만했습니다. 극도로 센치한 마음을 안고 볼테르의 <안뎃트>의 주인공과도 같이 언제나 실컷 울 수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았고 땅 위에 있는 일체의 것이 슬프게만 해석되며 이 따위 것들과 관련을 끊고 어떤 깊은 골방에 숨어버리든지 어느 인적없는 고도에라도 도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염세주의적 생활은 암흑에서 암흑으로 이끌어 가서 쇼펜하워와 같이 고난 자체를 인정해 버리는 비관을 위한 비관자의 자리에서 암담한 길을 헤매이다가 그 안에 몰입되는 결과를 가져올 따름이었습니다. 머리를 돌린 나는 어떻게든 이 고난이라는 사실을 부인해버리고 싶었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경의 탓이라고 보며 온 우주의 질서는 전부 아름다운 것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싸움이나 질투 죽음 자체까지도 하나의 선이나 미로 해석해보며, 궁극은 선이요 역사는 선으로의 진행이라고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모든 것의 발생은 관념으로서의 신의 심중에 있던 것의 구현이기 때문에 고나 악이 있을 수 없다고 보고 일체의 책임을 인간 의식에 돌리려고 하는 라이프니츠나, 현실을 우주이성의 발전이라는 범리론(汎理論)에 발을 디딘 헤겔이나, 슐라아에르마허 등이 생각하는 낙관주의같은 심정이겠지요. 그러나 삶은 논리의 일정한 틀 안에 담기어짐으로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질서정연한 이론과 세계관이 내 지성을 수긍시켜도 내 삶 자체는 그대로 고난 앞에 신음해야 했으며 때로 낙관적 결론을 얻고 만족하다가도 정작 고개를 들고 문을 나서자마자 고난이라는 엄숙한 사실이 나의 목을 눌러 나의 결론을 일소에 붙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스토아 학파를 본받아 내 감관의 문을 닫아버리고 이 현실의 고난에 대해서 하늘의 달이나 들의 돌과 같이 초연하므로 현실을 묵살해 버리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초연할 수도 없거니와 그러는 동안 나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며 내 의지와 감각은 분열을 일으켜 모르는 동안 위선 적이며 자기기만적인 모순에 빠졌을 따름, 고난은 고난대로 엄연히 나를 싸고 돌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배회하다가 필경 나는 아무래도 정직하고 진실하게 엄연한 고난이란 사실 앞에 직면해야 할 것을 느꼈습니다. 고난! 이것은 나에게 이 이상 더 피할 수 없는 정면으로 맞서야 할 숙적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우리 나라의 어떤 사가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여러 면으로 분석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한마디로 고난의 역사라고 단언적인 진단을 하고, 그는 이 고난의 의의를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우리는 고난을 기뻐 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로서는 현금의 고난은 미래의 보다 위대한 대가가 와지리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래의 소망으로 현재의 고난을 말살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난이란 정말 무엇인지를 체험해보지 못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동정심이 많은 교사의 할 수 없이 권하는 위로의 말만 같았습니다. 장차 위대한 민족이 되리라는 이유로 현재 매일 수 천 수 만 명의 젊은이의 피를 용인하라는 말은 나에게 기만과 같이 들렸습니다. 그것은 그럴 수도 없었거니와 그것이 그렇게 정확한 비율의 법칙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개인을, 민족을 점점 더 비열, 허위, 잔인, 필경 몰락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더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인 것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내 마음은 극도로 불안과 회의에 빠졌습니다. 내 당면하고 있는 고난은 그 따위 어떤 안가한 위로로는 해소될 수 없는 어떤 구조성을 가지고 나를 육박하는 사실인 이상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것을 정면으로 대항하고 투쟁해서 마침내 완전히 극복하여 무력화해버리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 앞에 곱게 압살당하기를 각오하고 맑은 정신으로 고난을 짓씹으면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결단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그렇게 괴로워하시면서도 우슬초를 받지 않고 샛별같이 맑은 정신으로 수난하시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역시 나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길을 어떻게 걸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은 우선 고난의 의의를 확실히 파악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우선 고난의 원인부터 더듬어보고 싶었습니다. "고난은 왜 오나. 자연현상에서 오는 것도 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조화의 과정으로 고난이 있을 수 있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하여서는 짐승에게 물리고 나무에 치이며 대홍수나 지진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고난은 무지에서도 올 수 있다. 전염병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면 무리죽음을 할 수도 있다. 길에 널린 지뢰를 밟으면 폭사할 수 있다. 고난은 죄로 인해서도 온다. 죄는 분명히 자기 안에 고난의 독소를 내포하고 있다. 화류계의 출입은 자기와 후손을 망칠 매독환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강도는 사형선고를 이미 자기 안에 받고 있다. 인과의 법칙이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떠있는 자는 고난을 당한다'라는 욥기의 표어를 내걸은 아이스킬로스의 희랍비극의 고전사상은 분명히 일리를 말한다." 내 마음이 이상의 아유들 때문에 오는 고난을 용인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래야만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지금 받는 고난은 자연원리나 무지 때문에 온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죗값이라면 부인할 수 없으나 비단 우리 민족만이 그렇게 악착스럽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민족은 약해서 순진해서 불운해서이나 소위 문명국의 죄악은 보다 더 간교하며 보다 더 계획적인 죄악이 아니냐고 반항하고 싶었습니다. 설령 우리 민족의 역사나 위정자의 죄가 많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부엌에서 울타리를 벗어나 보지 못한 시골 할머니나 평생 자동차 구경도 못하고 고양이 이마만한 땅패기에 생명을 매고 있는 오지농민이나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재롱거리는 어린애에게야 무슨 유달리 큰 죄가 있다고 이런 비참한 수형이 있어야 할 것입니까. 이러한 내 생각방법은 더 진행할 수 없는 암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난의 의의를 합리화해보려는 땅에 붙은 나의 야심은 기진하여 쓰러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것은 흩어진 실꾸러미를 만진 철없는 어린애와 같이 손에 쥐어진 줄만 잡아당길 생각에 그것 때문에 더 흩어지는 전체를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가 영리하면 전체를 보아 그 출발점을 발견하여 거기서부터 끌어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난이 뼈아프게 자극 주는 당면문제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역시 어느 한 부분이며 그 원인이며 출발점은 전혀 다른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의 전능하심을 믿고 그로부터 모든 숨은 비밀을 발견하고 이날까지 감추어졌던 모든 것을 통찰하는 신앙의 비밀을 아는 자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하나님에 있어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며,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의 이유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세계"가 곧 신앙의 세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 이런 결론은 나의 현금 당하고 있는 일체의 환난이나 곤고나 재난이 전혀 새로운 빛 가운데서 새로운 의미로 드러 났습니다. 이제는 벌써 그 번거로운 이론이나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Jieodichy(神義論)같은 것은 사족의 감이 있고 오히려 고난을 포함한 모든 사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섭리로 변하여 그 앞에는 나에게 회개와 기도와 소망과 찬양으로 가득해질 따름이었습니다. 파스칼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비참"을 고조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없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인간의 헛된 수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출발한 "현명한" 니체같은 자는 대표적인 비참한 불운아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죽음아, 네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이 외친 바울은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난에 대한 승리입니다. 그는 이 고난을 극복하여 그것을 무력화할 뿐 아니라 한걸음 나아가서 고난을 오히려 기뻐 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룰 줄 앎이라"는 외침은 이런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말입니다.

나는 이런 분명한 구별과 확신의 새 길을 나의 스승인 칼빈(Calvin)에게서 배웠습니다. 그의 역작인 『기독교강요』(Institute) 중에 특히 "고난과 섭리"라는 제목에 그는 그리스도인의 본연의 상태를 분명하게도 가르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하고 싶은 말을 그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칼빈 시대는 프랑스를 위시해서 신교도의 박해가 극도에 이르러 성도들의 비명이 충천했을 때이며 칼빈 자신은 일생을 통한 추한 병에 언제나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정과 감사의 심장"을 언제나 가지고 복음전파의 찬연한 일생을 보낸 것입니다.

칼빈의 신앙생활은 바울의 "너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로마 12, 1)라는 것에 그 근거를 두었습니다. 즉 그것은 자기를 하나님 앞에 철저히 부정해버리는, 즉 자기의 몸과 마음 전부를 자기의 것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드림으로부터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일체의 기능을 주의 일에 쓰고", "일체의 언동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분명한 생활의 목적을 세우고 모든 일을 대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생활을 자기의 이익이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거짓을 완전히 버리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자기부정으로서 "이웃 사람에게 대해서 사랑의 의무", 즉 "언제나 이웃에 대해서 사랑에 빚진 자"라는 의식을 가지며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 전 존재를 "하나님께 향한 엄숙한 의무"의 윤리를 분명히 의식하는 일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에서는 고난이라는 것은 중대한 새로운 의미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고난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감격적인 신념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그는 고난을 견디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확증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서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는 히브리 기자의 쓴 그리스도의 걸은 길이 자기의 길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지상에 머물 동안 최후에 십자가를 지셨을 뿐 아니라 전 생애가 일종의 십자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리스도 앞에서 하나님의 분노이나 그러나 참 의미의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같은 사랑의 손이 십자가적 고난으로 나타나서 순종함을 배우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 속했다는 확증이 된다고 생각한 기쁨일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입장에서는 그 일 자체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기쁨을 자꾸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고난에 참여할 때 그의 부활의 힘도 난다"는 바울의 마음과 같은 것이겠지요. 즉 우리에게 십자가적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더 확실하게 되며, 그와 사귀는 한 고난은 무력할 뿐 아니라 나가서 축복으로 변하게 되며 그것은 구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길이 된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우리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동일시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경우와 다른 고난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무력한 자기를 믿어서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언제나 자기의 무능한 꼴을 그대로 보여 주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나가서 적극적으로는 자기를 단념하고 하나님을 절대로 믿고 의지하는 정신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욱 굳게 하고 그의 진실하심을 믿고 일체의 고난을 극복하고 역경을 견디는 동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는 이 고난이 자기에게 얼마나 많은 교육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감격하고 있습니다. 실상 사람이란 것은 맹랑한 것입니다. 언제나 적당한 "매"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칼빈도 하나의 인간이었기에 그는 "고난의 학교"가 자기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뼈저리게 느낀 사실까지도 또 잊어버리고 첫 감격이 사라지고 또다시 외도하려는 자기를 제재하려는 일과 나아가서는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한 진실한 각성과 회개를 촉진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며 생활이 언제나 생생한 것의 연속일 수 있는 길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소극적인 고난의 의미를 현 해하는데 크리스천 생활의 완성이 있다고 본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한걸음 나아가서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의 고귀함을 높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적해서 말한 축복입니다. 칼빈은 그 의를 분명히 하여 "내가 의를 위한 박해라는 것은 단지 복음을 지키기 위해 받는 고난만이 아니라 일체의 바른 일을 위해서 받는 고민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서 재산을 빼앗겨도 그만큼 하늘에 참 보화를 쌓은 것이요 비록 조국에서 추방당해도 그만큼 친밀히 하나님의 가족에 들어간 것이다. 아니 우리가 비록 허살(虛殺)을 당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축복의 생활의 문을 여는 것이 된다"라고 정열적 신념을 피력했는데 그것은 그의 가상적인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공포를 눈앞에 놓고 외친 신념인 것입니다. 차라리 "그림자같은 덧없는 생활"을 하기보다는 주가 그렇게 귀중해한 것을 위해서 죽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마지막으로 이것은 절대로 스토아적이거나 어떤 "철과 같은 철학"과 구별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떤 "초인의 도덕"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도의 위로란 그렇게 무감각하거나 무감정해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목석같이 초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우시었고 배고파하시었고 늘 비애에 잠겨 산으로 오르시어 밤을 새었고 아니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모양, 피와 땀을 쏟는 그 고민, 십자가 상심에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시던 그 모습. 그는 과연 인간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이런 인간이었기에 정말 사랑스럽고 나의 고난을 걸머진 구주로서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에 대해서 초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이상 땅이 느끼는 일체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도 의무이거니와 한걸음 나아가서 모든 형제의 고난을 알아서 그 고난을 나누며 필요하면 그 고난을 내가 대신 걸머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한 삶인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바른 의미를 배우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굵은 걸음을 걸어가는 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시 다른 철인이나 이교도의 결론으로 돌아간 감이 납니다만 거기에 분명한 구별은 저들은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입장에서 해석 해서 해결해 보려는 데 대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의 입장에서부터 모든 것을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또 그럴 때만이 억지도 거짓도 아닌 참 태도가 결정될 줄로 압니다.

사랑하는 이여! 내 무슨 별다른 위로를 줄 수 있으리이까? 그저 끝으로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는 쉐링의 말대로 "전 자연 위에는 우울의 베일, 모든 생명에는 감히 없앨 수 없는 멜랑콜리"가 덮이어 있습니다. 그 안에 제외된 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대도 예외자이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 자체가 우리 삶의 부분이오니 피할 염(念) 말고 그리스도와 같이 진실하게 고난을 정복해 나가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1951년, 『야성』)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