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주여,
마침내 당신은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시렵니까?
그렇지 않고야 어찌 어린 아기가 무덤에서 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폴란드에 진격한 나치군을 피해서 공동묘지에 숨은 유다인 중에 끼었던 한 여인이 해산했을 때, 80세 난 유다 노인인 무덤지기가 그 아기를 안고서 하느님께 드린 기도이다.
무덤에서 해산한 아기를 안은 사람의 기도! 이것은 죽음과 삶의 틈바구니에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묻는 약자의 절규이다.
무덤에서의 새 생명의 탄생과 그 첫 울음소리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탄생의 예고와 비길만하다. 그러나 그 무덤에서 난 어린 생명의 다음 순간이 어찌될 지 아무도 모르고, 스스로 어떤 힘도 지니지 않았기에 <오, 주여!>를 부르짖은 그 유다 노인처럼 우리도 이 지점에 <주여!>를 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 주여!>를 부르짖는 것은 체념의 소리는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하겠다는 절규이다. 이처럼 우리의 <오 주여!>도 체념의 소리일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기필코 우리가 바라고 염원하는 대로의 나라의 체제와 질서를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맹세와 염원을 이렇게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한다.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 만이라고 주저앉을 수는 없다. 내 힘의 한계를 의식할 때, 그것을 뛰어 넘으면서라도 이 염원은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우리의 <오 주여!>인 것이다.
우리는 역사 안에 있고 시공에 제한돼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역학적 법칙 노예가 되고, 체념이라는 죽음의 병에 이르고 만다. 사람은 그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의지를 지닐 때, 사람인 것이다. 사람은 한계존재이다. 그러나 이 한계를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이 안 되면 밖에서 뚫어 주기라도 해야 한다고 절감하기에 <오 주여!>라는 절규를 하는 것이다.
(1980. 1.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