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5일부터 19일까지 '전북 기독교장로교 노회'의 주최로 열린 교역자 세미나에 강사로 갔다. 그 모임이 이리제일교회에서 모이기 때문에 18년 만에 이리를 보았다. 교육부를 담당해서 주도하는 최희섭 목사는 처음 만난 분이었으나 전에 전주에서 만났던 목사님들 그리고 한국신학대학과 중앙신학교에서 내 강의를 들은 분들도 몇 분이 있어 반가웠다. 동행한 조덕현 목사의 개회예배와 두 번 성서공부가 있었고, 나는 낮에 두 차례 그리고 밤에는 강연을 연속했다. 제목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교회의 교육이었는데 나는 그런 주장의 한 측면을 성서적으로 밝히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초점은 신앙과 삶의 일원화였다. 그런데 토론은 결국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집중 됐다. 가령 계시, 죄, 구원, 교회 등에 대한 낡은 정의를 재반성하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기본교리가 이원론적인 세계관 위에서 정의됐기 때문에 그 정의를 불변의 것으로 고집하는 한 아무리 새로운 신학적인 사조를 소개해도 결코 거기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역자 자신이 새로운 신학의 물질을 소화하지 못해 숨 가쁘며, 그들이 이끄는 교회의 구조와 성분은 납덩이처럼 굳어 있다. 교역자는 새 신학사조와 교인들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다. 저들에 대해서 신학자란 무책임하다. 삶과 신앙의 일원화를 말하나 실은 삶과 유리된 탁상에서의 기염만 토하는 게 신학자인지 모른다. 신학을 몸 전체로 하지 않고 머리로만 전달하는 게 신학자의 모습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신학은(다른 학문도 같지만) 수도원 대학의 책상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삶과 유리된 이론이 됐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반성으로 '평신도신학'이 주장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평신도란 각기 자기 전문 분야가 있다. 결국 새 신학은 평신도와 직결된 목회자들에 의해서 주도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 신학은 바로 평신도의 삶 한복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평신도의 편에 선 평신도의 대변인 이어야 할 것이다.
근경에 교역자에 대한 시비가 많다. 누가 그 권위를 인정해 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력을 과시할 만큼 좋은 여건을 못 가졌다. 그러나 삼복더위에 그처럼 진지한 토의를 계속하는 동안 교역자에 대한 오늘의 평가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도교가 해야 할 과제 앞에서 냉혹한 자기비판을 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일반사회와 비교해서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기 분야에 대한 실력이나 그 성실성이 전체적으로 보아서 다른 어떤 조직의 요원들보다 뒤떨어졌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이제는 반성에서 자학에까지 이르는 버릇은 지양하고, 그 역량이나 배경 그리고 그 해야 할 과제 앞에 자중해야 할 것으로 안다. 요는 투철한 각오다. 순직의 각오에서 마침내 자기부정의 자세에까지 이르면 불의를 저지하고 새 길을 터놓을 만한 잠재력은 지닐 수 있다. 5,000명의 교역자는 수백만 명의 선두에 섰으며 매주 몇 차례씩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큰 뜻을 들으려고 수십,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든다. 교역자 외에 어느 누가 아무런 외적인 이해관계 없는 청중을 매주 이처럼 많이 가질 수 있겠는가? 교역자는 그런 뜻에서 행운아들이며, 또 그 임무가 엄청난 것이다.
이 모임의 강사의 숙식을 그곳의 캐나다 선교사들이 지원해서 담당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선교사들과 몇 날을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언더우드, 케르너 두 여선교사의 집이었다. 나는 선교사들에 대해서 백안시해 왔다. 그것은 저들이 하나의 특권층으로서 군림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달라졌다. 저들은 모든 권리를 거의 다 이양한 것 같으며, 한국 교회는(예외는 있지만) 그들을 동역자 이상의 대우를 하지 않는다. 이 두 여선교사들은 소규모의 여러 클럽을 지도하며, 또 교회에서 한 집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몇 날의 인상으로는 지배한다거나 지도한다는 인상은 없고 어느 구석을 기워준다는 봉사정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권력도 있고 존경받는 처지에서 누가 선교사 노릇을 못하랴! 그러나 그런 것 없는 현실에서 숨어서 어느 구석을 메꾼다는 자세를 가질 때 정말 제 본연의 상태에서 참 복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당신들의 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여건이 갖추어지고, 밖에서 존경받는 환경에서 교역자되는 것은 누구나할 수 있는 일이다. 불우한 상황에서 이름 없이 소금처럼 남을 위해 자기를 해소하면서 침투해 들어갈 때 거기 교역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함이 있지 않을까?
(1969. 8.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