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헤밍웨이의 소설제목이라고 기억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이 내게 맴돌기를 아마 햇수를 넘은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소설을 구해서 한번 읽어 봐야 옳은데 그러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무엇인가 계속 떠들고 무슨 일인가 진행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저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자꾸 묻게 된다. 도대체 초점이 맞지 않는다. 집권층의 경고, 정치적 성명, 부흥회, 포스터, 가는 곳마다 들리는 팝송, 무엇인가 계속 성화처럼 떠들어대는데 나는 그 안에 이방인 같으니 웬일인가!
서구는 부락사회의 유산으로 지금도 시간 따라 요란한 종소리를 듣는다. 전에는 그 종소리에 따라 기거동작을 함께했다. 그것은 시간을 알릴뿐 아니라 생활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럴 때는 지나갔다. 그 종은 종대로 울고 사람들은 제멋대로 제 리듬에 맞추어 산다. 그러니 그 종소리는 그저 시끄럽기만 하고 참 누구를 위해 울리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래도 그 전통이 아까운 탓인지 그 종은 여전히 울린다. 인습에 젖은 탓인지 서구인은 그 종치는 것을 방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동리에 결혼식이 있어 교회의 종을 친다. 그것은 저들의 기쁨을 온 동리가 축하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때 죽어 가는 사람 앞에 슬픔에 잠긴 집이 있을 경우에 그 종소라는 무엇이 되나! 그 종소리는 이중의 여음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쁨을 당한 자를 위해 친다는 경우 "슬픈 자는 혼자 슬퍼하라. 우리는 기쁜 자의 편에 서리라"가 된다. 임종 앞에 슬퍼하는 자의 귀에는 그 종소리는 "빨리 죽어라! 죽어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데모 소동 속에서 증오와 울분에 찬 공방전을 펴는 데 한쪽에서 체육제니 민속제니 하는 라디오를 통해서 사랑을 애걸하는지 희롱하는 것 같은 팝송의 소리가 거리를 누빈다.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소리들이냐!
한국의 교회에서 언제부터인가 종치는 대신 차임벨로 바꿨다. 어디서 배운 것인지는 몰라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종소리가 수면 방해한다고 수모를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좀 부드러운 소리를 내려고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경박하다.
무엇에 골똘하다 보면 자는 시간을 놓친다. 조용한 밤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벌써 3시구나!" 할 때가 많다. 내 사는 집 윗산 아래 조그마한, 암자에서 들리는 소리다. "딱, 딱" 그건 분명히 목탁이다. 아마 전에는 그것이 사람들의 길잡이의 역할을 했나보다. 그러기에 언론기관이나 그런 류에 대한 축사에서 이 시대의 목탁이 되기 바란다고 하겠지. 하여간 나는 하는 일을 중단하고 그 목탁소리를 듣다가 무릎 꿇고 합장한 채 그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린 때가 있었다. 그 만큼 정중한 호소력이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교회의 차임벨 소리가 먼 데서 들려온다. 불량한 확성기 탓인지 천박하여 "또 번거로운 하루가 시작 되는구나"라는 성가신 생각이 앞서니 웬일 일까? 목탁 소리와 함께 나는 그 목탁을 치는 주인공을 승화시켜 본다. 모든 중생이 사바세계에 다시 휘몰려 아귀다툼하기 전에 여기 한 도승이 일찍 잠을 깨여 정토의 염원의 불을 켜고 저들을 위해서 복을 빈다. 아니 그보다 앞서서 그 자신이 어두움이 가시기 전에 맑은 본 존(本尊)을 되찾기 위한 발원(發願)한다고 생각하면 참 고맙다. 누가 들어주거나 인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저 홀로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 종치는 분위기가 마음을 시끄럽게 한다. 무엇보다 통성(通聲)의 통성(痛聲)이 연상되어 그렇다. 그 통성(痛聲)은 욕심의 아귀다툼 같다. 새벽부터 욕심의 화신이 된다. "이 걸 해 주십시오, 저걸 해 주십시오!"
종을 치는 동기도 싫다. 그것이 사념 없는 등대수의 역할 같은 그런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것은 "모이라 모아라 우리 교회로"라는 신호라고 연상하면 그 날의 생존경쟁의 톱을 가는 소리 같아 싫다. 새벽의 모임이야 좋지! 그러나 좀 조용히 자기를 비우고 오직 "당신만이 말씀 하소서" 하는 겸허가 아쉽다.
하여간 교회의 종도 누구를 위함인지 나는 모른다. 적어도 나를 위해 우는 것은 아니다.
(1974. 11.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