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활에서 탈출해서 왜관에 자리 잡은 베네딕트 수도원(Ordo Sanoti Bendicti)으로 왔다. 이 수도원은 A.D. 547년에 세상을 뜬 이탈리아의 베네딕트가 창설한 것으로 세계에 12,000명 가량의 회원을 가진 조직이다. 이들의 모토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이다. 이 단체가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08년이다. 처음 서울에 도착해서 지금 혜화동 성신대학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1920년에 함경남북도와 만주 간도를 포교지구로 지정하고 서울 본부를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옮겼다. 그로부터 원산수녀원이 생기고 함경도, 간도 일대로 퍼져 나갔다. 내가 어린 시절에 간도 연길, 용정 등에서 커다란 성당과 수도원을 봤는데 그것이 베네딕트 수도회인 것은 물론 몰랐다. 단지 어릴 때 멋모르고 아이들을 따라가서 성례전의 떡을 한 번 받아먹은 일이 있고, 또 한 번은 학병을 피해 다니던 때 장하구 형과 함께 한 성당의 신부를 찾아서 장시간 이야기한 일아 있다. 그 때 장 형은 한창 습득한 독일말로 열심히 대화하는 것을 부럽게 바라만 본 일이 기억될 뿐이다.
나는 우연히 한태동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여기에 오기로 작정했다. 오후 2시경 기차에서 내려 책으로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을 택시에 싣고 이 수도원으로 향했다. 정문에 들어서니 백발의 한국 수사 한 분(미카엘)이 친절하게 나를 맞아 주었다. 대원장(아빠스)은 부재중이다. 그러나 내가 온다는 연락은 받았다면서 한 수사가 내 짐을 들고 길 건너편 3층 건물로 안내한다. 이 집은 '피정의 집'이란다. 단체 수련을 위해 제공하는 집이다. 단체 수련을 위해 제공하는 집이다. 이 집 관리를 담당한 한 수사님(노젠저)의 안내로 텅 빈 3층의 한 방에 들어섰다. 약 4평가량 되는 방의 구조나 시설은 내가 독일에서 한동안 머물던 하이델베르크의 한 인스티튜트의 기숙사 그대로이다.
얼마 후에 이 집의 지도 신부가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그는 밀레만(H. Millemann) 신부이다. 악센트 없는 그의 한국말이기에 한국 오신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30년이란다. 그가 바로 이북 공산당에게 시달려 4년 반의 투옥, 강제 노동을 겪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1954년에 귀국했다가 1956년에 한국을 다시 찾은 신부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인품이 무척 좋은데 호감도 갔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수난 담에 대한 호기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잠은 이 피정의 집에서, 식사는 수도원 안에서 하도록 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는 한식, 독일식이 혼용됐는데 그 유명한 진짜 독일 '부어스트'를 오랜만에 맛보았다. 식사 후에 대원장이 만나겠다기에 응접실에 앉아 있는데 퍽 젊어 보이는 독일 신부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이야기 하다 보니 그가 바로 대원장인 하아스(Odo Haas) 신부이다. 퍽 예리한 인상이다. 이야기 중에 그가 슈낙켄부르크(R. Schnackenburg)의 제자임을 알았다. 나는 그의 책을 몇 권 읽은 일이 있고 해서 그의 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의 장서 그리고 도서실도 구경했다. 그는 무엇보다 신약신학에 대한 대화가 가능하게 돼서 다행이라고 한다. 나도 우선 그 책들을 이용할 수 있는 것과 이들과의 대화에 퍽 기대를 걸 수 있었다.
첫날부터 그에게서 가톨릭의 공관복음서의 주석 책들과 그 외에 몇 가지 책들을 빌렸다. 그의 안내로 수도원 내부도 구경했다. 하나의 작은 왕국이다. 인쇄소, 재봉소, 구두 수선소, 목재소 그리고 독일 음식을 조리하는 장소 등 완전히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약 10명의 독일 수사(밖에 파견된 이를 합치면 30명) 중 신부 외에 기술자 수공들이 있어 각 분야를 담당한다. 저들은 단순한 기술자들인데 일생을 독신으로 그들의 신앙심에서 이방 땅에 와서 꾸준히 그 기술을 바치고 있다. 정신적인 노동과는 거리가 멀던 저들—너무나 시대의 물결과는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세계! 하얀 수도복을 입고 말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저들을 보면서 나는 청년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수도원과 같은 단체를 세우려고 꿈을 꾸던 시절아 생각났다—그 결과가 결국 일반적 교회 개념의 평면 위에 선 향린교회가 되고 말았지만 우리에게는 꿈이었는데 여기는 현실이다. 우리의 꿈이 어리석었는지 이들이 어리석은지?!
가톨릭에는 무수한 수도단체가 있다. 일생 독신이어야 함은 물론, 엄격한 계율에 자기 일생을 맡기는 남녀들이 모이는 곳이다. 한국에만도 일곱 단체가 여기 저기 수도원을 세웠고, 25종의 수녀 단체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다. 이러한 단체는 신앙의 생활화가 그 목적이다. 저들은 말없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기를 반(半)감옥 생활에 맡기고, 조용히 자기를 찾고 봉사한다. 저들은 명상에만 잡혀 있지 않다. 수도원을 거점으로 어두운 그늘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봉사하기 위해 일을 벌인다. 교황 요한 23세 이후 저들은 스스로의 체질 개선과 너를 봉사하므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경향이 조용히 번져가고 있다.
나는 여기서 오스트와 영국에서 왔다는 두 여인을 만났다. 저들은 일주일 동안 이 피정의 집에서 '사도직 협조자'라는 여성단체를 지도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수녀복을 안 입은 수녀들로서 수녀원에서 벗어나서 각 직장에서 봉사를 통해서 수도하는 것은 모토로 한 단체이다. 저들도 가정, 향락 등을 다 포기하기로 서약한 단체이다. 그 중 영국 여성은 한국말도 잘하는데 대구에서 윤락 여성들을 선도한다고 한다. 그런 단체가 여러 곳 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특징은 개심하고 귀가하려고 해도 외면하는 완고한 부모들을 찾아가서 몇 날이고 그 집에서 기거하면서 마침내 저들을 설복시킨다는 것이다.
또 내 마음을 흔들었던 이야기는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왔다는 두 수녀(이것도 수녀복 없는 수녀)의 일이다. 젊은 나이로 한국 땅에 와서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버림받은 나병 환자 부락에 짐을 풀고, 저들과 기거를 함께하면서 저들에게 위생관념을 주의시켜서 미감아들을 구출하고, 저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서 살 의욕을 줌으로 자립에의 길로 이끌고, 자기 힘으로 또는 밖의 도움을 받아서 진료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수도원에 호소해서 떠맡기고는 누구도 손대지 않은 곳을 다시 찾아서 그림자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이것을 떠맡은 이 집 신부님이 옥상에 올라가서 그 동리를 보여줄 때 나는 그곳에 남을 위해 숨어사는 그 두 여인을 생각했다.
나는 또 멜페르트(Diomedes Melfert)라는 의사 수녀를 만났다. 밀레만 신부님의 소개로 알게 된 그는 이북 땅에서 이 신부와 더불어 수난의 극치를 걸어온 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몹쓸 기억을 더듬어야 할 한국 땅을 못 잊어 다시 와서 지금 김천과 대구 사이의 용봉리라는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나병환자 촌에 거점을 두고 주변의 나병환자들을 위해 몸 바쳐 일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서 수난사를 듣고 싶던 차에 그의 초대에 응해서 그의 마을을 구경했다. 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위를 터덜거리는 차로 도착한 그 동리는 180명의 나병환자의 촌락이다. 그는 여기서 말없이 그의 정력을 쏟고 있다. 그가 시작한 클리닉은 비록 소규모이지만 입원실, 수술실, 검사실이 멀쩡히 갖추어져 있다. 다른 의사도—한국 의사는 여기 오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기술자도 없이 보조 간호원들을 데리고 이 일을 해낸다. 입원 실에는 퇴원해도 갈 곳 없는 거지들이 여러 명 수용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업어다 눕혔다는 반사(半死)의 거지도 한 사람 끼어 있었다. 벌써 60세가 훨씬 넘은 이 수녀는 일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이곳 뿐 아니라 여러 곳의 나병환자를 정기적으로 치료하러 다닌다. 이 산골짜기에 그 험산한 나병환자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그날 그날을 분주히 보내는 이 수녀와 마주 앉아서 나는 빨간 황토 길을 터벅터벅 헤매며 고독을 짓씹던 한 나환자의 시집 안에 담긴 시들이 생각났다.
나는 이들의 내부세계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환상을 시작했다. 밀어 치는 파도에 온몸을 적시면서 때로는 봉우리 끝까지도 잠겼다가도 다시 머리를 내미는, 끄떡하지 않고 버티고 선 돌 바위, 시간의 파도가 아무리 물결쳐도 시간 안에 있으면서 시간에서 탈출한 듯이 끄떡하지 않은 영원의 거점(?)! 이 수도원은 이북 덕원에서 헐리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여기 왜관에 다시 그 모양대로 우뚝 나타났다.
세계가 급변한다는 소리를 치면서 그러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는 소리에 대해 세계는 아무리 변해도 이것만은 변하면 안 된다는 완강한 저항! 변하는 판에 같이 변하는 것보다도 변하지 않고 버티는 모습은 수난의 모습이다. 불안, 고립, 마침내 죽음에 이르러도 시체에서 또 뿌리가 돋아, 그것을 하늘에 다시 박고 버티어 보려는 집요함, 그 성실성! 이 같은 성실성이 꼭 수도원적인 제도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러나 수도원에서 내게는 이런 것에 대한 환상과 또 요청을 새삼 느꼈다. 이 세계의 역사의 흐름 속에, 내 변화무상한 마음 속에 이러한 지성소가 새삼 그리워진다.
(196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