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교파의 교역자의 모임에서 서남동 교수의 통일교회론 때문에 연대총장에게 항의하도록 했다고 한다(『크리스챤 신문』). 변형된 종교재판이 연상되어 소름이 끼친다. 교회를 걱정해서하는 일로 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해서 이론이 있으면 이론을 펴라. 논은 논으로 대하라! 우리에게는 종교 재판권은 없다. 저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저들이 중세기적 몽상에 잠겨 있는 증거이다. 왜 한국 교회는 진리를 밝히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남을 규탄하는 결의만 장기로 아는가?
신학은 학이다. '學'에는 냉정한 비판과 분석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學'의 성장은 없다. '學'은 '學'으로 대결해야 한다. 나는 통일교회에 대한 서 교수의 論에 대한 반대론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오히려 자기반성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통일교회가 왜 그처럼 성장하는지, 신흥종교가 왜 그토록 활기를 띠는지, 그 책임을 한 사람의 의견에 돌리기 전에 교회 전체가 자신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에 한철하 교수와 서 교수와의 논쟁이 몇 차례 실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참 논쟁의 정도가 못 된다. 7-8매 정도의 글로써 어떻게 논쟁이 가능한가? 통일교회가 정말 문제인가? 그러면 그것을 가장 문제로 하는 교회가 주권해서 신학 토론회를 열라. 그래서 그것을 문서화하라. 그럼으로써 듣는 자, 독자에게 시비를 가릴 권리를 주라. 더욱이 서 교수 한 사람 때문에 연대에 학생 보내는 것이 겁이 난다면 빨리 그 반론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나는 통일교회 원리론을 결코 서 교수처럼 평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책을 읽고 흥분했다. 그 중요한 아유는 무엇보다도 저들이 성서를 제멋대로 적용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마디마다 성서를 내세우나 실은 이미 형성된 어떤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서를 시녀로 전락시켜 버린다. 성서, 성서하면서도 성서에 대한 연구가 오늘날 얼마나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아전 인수하는 그 불성실에 염증을 느꼈다. 저들의 성서 해석을 보면 원칙적으로 축자영감설에 입각했다. 그만큼 성서의 어느 한마디를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워 자기들의 주장을 그 위에 쌓는다. 그러나 반면에 성서 전반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상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서슴지 않고 묵살 또는 제거를 감행한다. 그런 부분은 자기들이 이미 세운 체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들의 성서해석방법은 저들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남을 규탄하기를 잘하는 한국의 절대다수의 교회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교 이름을 그대로 표방하는 신흥종교치고 성서를 그 뒷받침으로 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그 특징은 바로 위와 같은 성서해석방법이다. 따라서 피차 아무리 논쟁해도 승패는 있을 수 없다. 한 쪽이 성서에서 자기 주장에 맞는 구절을 골라 내세우면 다른 쪽은 또 다른 구절을 내세움으로써 평행선만 있게 된다. 그러니 결국 시비는 가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서로 규탄적인 선언이나 하게 된다.
그리스도교—특히 한국의—는 정말 자기정비를 할 때가 왔다. 재고품이나 들추어서 이단규정이나 할 때가 아니라 정말 침체한 원인이 무엇인지 허심탄회하게 반성해야 할 때다. 무엇보다도 성서 해석의 거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성서를 절대적으로 내세우면서 그 연구에는 암송하는 정도, 아니면 이미 있는 교리의 시녀로 사용하는 따위의 불성실에 대해서 비장한 각오로 수술도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신흥종교의 성서 도용을 막을 길이 없다.
하여간 이제는 상호규탄이 아닌 신학논쟁이 필요하다. 쟁(爭)자가 폐단을 일으킨다면 의(義)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신학논쟁은 절대 필요하다. 그것은 어느 쪽이 다른 한 쪽을 정복한다는 전제를 앞세울 필요는 없다. 진지한 논의는 서로 바로 이해하고 서로 반성하는 데서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