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은 시골 목회에 지친 모양입니다. 서울에 사는 내게 할 말은 없습니까? 형의 말대로 나는 행운아인지 몰라요. '교수'요 '목회자'요 '문필가'요. 그래요. 그러나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나는 그 어느 것도 내 영주할 장소라고 생각지 않아요. 남이 싫다거나 스스로 보람을 느끼지 않으면 떠날 준비는 언제나 하고 있어요. 내게는 내일의 보장은 없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일을 할 때까지 할 뿐입니다. 그런데 도시 생활은 바빠요. 그래서 쓸쓸해요. 까닭은 살을 맞대듯 시간이 정지된 듯한 만남의 가능성이 자꾸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곳이라도, 한 가지라도 알뜰히 대하고 다듬고 가꾸어야 정도 들고 건설도 있을 것인데, 그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치 신기루 잡으려는 사람 같아요. 안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세상이 가만 놔두지 않아요. 내 시간은 그래서 밤밖에 없어요. 전화도, 사람소리도 두절된 때부터 내 시간이 될 수 있기에 그 밤이 내 친구입니다. 서울 생활이 부럽다는 소리는 하지 마셔요. 어디 있든 제 일을 하면 돼요.
목회가 부진하다고 한탄하는데 좀 과감히 교회 체질을 개혁해 보셔요. 종치면 모여드는 사람만 기다리지 마시고 그 동리의 현실로 찾아가셔요. '종교영역만!'이라고 분담의식 갖지 말고 그들과 함께 사십시오. 교회 문을 예배보러 오는 사람에게만 열지 말고 동리의 모든 문제를 위해서 개방해 보십시오. 동리 회의도 거기서 하게 하고 저들이 회의할 안건이 없으면 형이 프로그램을 작성해서 모이도록 하십시오. 부흥회니, 전도니 그런 목적만 말고 그들이 실생활에 필요한 문제들을 골라서 연중 프로그램을 짜 보셔요. 가령 부녀자들을 위한 뜨개질 강습, 부엌 개량법, 아이 기르는 법 또는 낮에는 교회당을 아이들이 와서 공부할 수 있는 공부방으로 제공해 보세요.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시간도 마련해요. 저들이 느티나무 밑에 모여서 벌이는 분위기를 조종하면 될 것입니다. 가장 그 동리의 이야기 잘하는 노인에게 일부러 부탁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오늘 밤은 그 노인의 옛말을 듣습니다'라고 계시하고, 또 시골의 미신타파를 위해서 함께 모여서 서로 토론하게 하셔요. 그 중에는 무당굿을 반대하는 이, 그것에 끌리는 이, 그리고 소신 없는 부동층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부동층을 청중으로 하고 두 의견을 대립시키는 토론회를 유도해 보세요. 또는 동리의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위생시설, 길을 만드는 일 등을 의논하게 해 보셔요. 무엇보다도 민권이란 무엇인지를 주입식이 아니라 수시로 토의해서 깨닫도록 해 보세요.
쓰다보니 내가 월권을 하는 것 같아요. 시골 사정도 잘 모르면서 실례인 것 같아요.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당은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형의 생각, 형의 의무도 '종교영역'이라는 장벽을 헐고 그들을 위해 개방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시도를 해도 동리 사람들이 순응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게 사실 문제지요. 결국 가장 결정적인 것은 형이 저들에게 신임받는 인물이 되는 길이지요. 신임이 중요합니다. 신임이란 실력을 보여야 합니다. 그 실력은 바로 저들이 못하는 일(하기는 해야 될 일인 줄 아는데)을 해치우는 것입니다. 구체적이고 가장 분명한 것은 동리에 암이 되고 있는 불의에 몸으로 앞장서서 대결하는 것입니다. 어느 동리나 꼭 말썽꾸러기가 있지요. 동리에서는 그들을 두통거리로 알지만 후환이 무서워서 손을 못 대요. 바로 그런 대상에 도전하는 데 앞장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얻어맞을 수도 있겠고, 피해도 있겠지요. 그래도 백절불굴해서 끝끝내 의지력으로 그를 굴복시키기까지 후퇴하지 마세요. 그런 일이 몇 차례만 계속되면 동리 사람들은 신임합니다. 적어도 동리 전체가 어떤 난관에 부딪쳤을 때 목사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묻고 싶고, 앞장서 주기를 기대하게 돼야 합니다.
형! 태권도거나 유도거나 꼭 하나 체득하시오. 형은 아직 젊었습니다. 그러니 손수 해보시오. 왜냐고요? 글쎄 내 하라는 대로 해요. 그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 목사는 화만 나면 순식간에 몇 사람은 해치울 수 있다는 실력을 보유하시오. 의지력과 몸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어떤 호신술 하나를 몸에 지니면 당신은 자신이 생기며 또 남도 당신의 온화한 웃음 띤 표정을 값싸게 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력을 개발하십시오. 우리의 정신력은 개발의 여지가 아주 많습니다. 나는 참선을 권합니다. 참선의 방법을 배우고 매일 새벽에 참선해 보십시오. 그것은 반드시 형에게 용기를 줄 것이고, 당신의 의지력에 큰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적어도 목회자는 웬만한 일에는 끄떡하지 않을 내외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대결이란 종당에는 일대일이 됩니다. 또 둘이 만나서 압도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면 대세는 따르게 마련입니다. 형은 '서울 가서 공부도 할 수 있을 텐데!' 했지만 너무 공부, 공부 마십시오. 지성은 인간의 극히 일부입니다. 형의 지성은 그 동리를 이끄는 데 충분합니다. 지성만으로는 사람을 이끌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지력입니다. 간단한 말이라도 몸에 실력을 지닌 말이면 그게 힘이 있어요. "그의 말이 랍비와 같지 않고 권위가 있더라"라는 말을 기억하지요? 이 권위를 종교적으로만 얻으려고 생각 마셔요. 죽음도 불사한다는 그 '내댐'이 권위가 됩니다.
교회시대는 지났다더라는 따위 소리는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한국 안에 그리스도교만큼 좋은 여건을 가진 공동체가 어디 있어요. 한국 교회의 분포도를 보십시오. 정말 방방곡곡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어느 정당이 그만한 지부를 가졌어요? 이 교회가 졸고 있으니 그렇지 그것이 각성만 하는 날이면 한국을 못 움직일 까닭이 없어요.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독소만 제거하면 한국 그리스도교 세력은 가장 무서운 게 될 것입니다. 형, 그러니 서울에 올 생각은 말고 바로 지금 있는 그 동리 사람들의 마음과 땅을 파십시오. 누가 잘 살았는지는 관 뚜껑 닫은 후에야 압니다.
(1971. 3.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