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가 자기 자식의 장래를 의논하러 왔었다. 어떤 학과에 진학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본인의 의사는 신학을 하겠다는데 그러기에는 좀 아깝다는 뜻을 표현했다. 아마 신학은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 하는 일로 안 모양이다. 나는 오히려 머리가 특출하지 않으면 신학 시킬 생각은 말라고 했다. 사실 신학을 참하려면 특출한 소질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전어를 극복해야 한다. 서구에서는 신학하기 위해서는 인문 고등학교에서 9년 동안 희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공부를 한다. 이것은 신학의 기초 작업이다. 그리고 원전 연구를 위해서 분석할 수 있는 치밀성과 명석한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천 년의 신학사를 꿰뚫어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서구의 석학, 문학 등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그런 것들과의 부단한 대화 속에서 신학사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의 언어와 세계관을 알아야 현대적인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을 들은 그는 눈이 둥그레졌다. 의아해하는 눈치이다. 그럼 당신도 신학을 하는데 그런 것을 다 구비했느냐는 눈치 같아서 "난 그렇지는 못하면서 신학을 한다고는 합니다만…" 하고 뒷말을 흐려 버렸다. 그러나 앞으로 신학은 정말 우수한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고정된 경전, 가장 오래고 많은 전통과 양의 유산을 짊어지고 어느 학문보다도 근본적인 자기 혁신과 더불어 참 인간의 길을 제시해야 할 위치에서야 하는 신학의 길이니 말이다.
지난번 약 일주일을 신학교수 세미나와 신학회를 가졌다. 신학 세미나는 주로 지방에서 온 신학 교수들이 참여했다. 신약 신학의 동향과 문제를 약 한 시간 넘게 강의한 후 많은 질의를 받았다. 참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신학이다. 더욱이 기술 사회로 변해 가면 갈수록 신학자의 임무는 그만큼 크다. 이번 모임에는 약 50명의 신학 하는 족속들이 모였다. 여러 강사들의 연구 발표가 있었고, 활발한 토론이 있었다. 분위기도 좋고 또 그 발표한 내용이나 토론의 태도가 진지했다. 또 무엇보다도 신학자들의 연배로 보아서 우리 신학계는 퍽 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직도 외국 신학자들의 발언을 소화 처리하기에 바쁘고, 자기 문제에로 눈을 돌릴 겨를이 없다는 현상을 실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계 신학계와의 대화를 끊고 돈키호테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비록 외국의 신학이 무슨 소리를 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본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 신학을 이해하는 것도 또 외국의 다른 신학자의 견해에 의존하는 정도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 실력의 정도이다. 그러나 나는 신학계가 우리나라 다른 학계보다 뒤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신학이란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짧은 연륜에서 보면 비약한 셈이다. 단지 앞으로 얼마나 우수한 후진들이 진출하느냐에 큰 기대를 걸어야 한다.
이번 신학회에 참석한 후 우리는 이런 모임을 자주 갖되 충분한 시간을 배정할 것을 다짐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서구 학회의 모습을 회상했다.
나는 독일서 줄곧 '불트만학회'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가졌다. 이것은 불트만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신약학회이다. 이 모임은 매년 10월에 한 번 열린다. 그것은 월요일 오후부터 시작해서 금요일 밤까지 계속된다. 독일 안의 한다는 신학자는 물론 미국, 스칸디나비아 등 세계의 학자들이 약 50~70명가량 모인다. 일본 학자도 매번 3~4명씩 참여했는데 나는 7~8회 동안 단 한 사람의 한국 사람으로 약간 외로웠다. 5일간에 3명 또는 4명의 연구 발표가 있다. 오전에 한 사람이 발표하면 그것을 하루종일 비판, 질의, 토의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전원이 티(Tea) 홀에 모여서 맥주 잔을 기울이면서 계속적으로 자연히 형성되는 그룹별로 토론을 계속해서 12시를 넘긴다. 그 때마다 불트만, 고가르텐은 스승으로 꼭 앞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참여하는 기간에 하이데거도 세 차례 참여해서 불트만과 나란히 앉아서 5일간을 단 한시간도 빼지 않고 경청하고 토론에 참여했다. 그 단구의 두 선배를 앞에 모시고 열면 선한 싸움하는 그 분위기가 그렇게 부러웠다. 저들은 하루종일 싸우듯 토론하다가 더 이상 진전이 없을 때거나 그 토론을 끝맺으려고 할 때는 그 스승들의 중재를 청한다. 사회자가 "이만하고 불트만 선생에게 중재를 구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는 기록한 종이를 들고 시비를 간결하게 판가름해 준다. 하이데거도 꼭 같은 스승으로서 모시며 그에게 '레프리'의 역을 청하곤 했다. 저들의 결론은 그 토의의 결론이 되고 말았다. 위대한 학자란 한 세기에 하나 정도 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떠들어도 그의 명석한 결론에 종당에는 침묵하고 경청의 자세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중에서 에른스트 훅스가 가장 말을 많이 했다. 그는 손에 신약 원전을 들고 그의 고향의 사투리를 그대로 쓰면서 스승인 불트만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시비하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선생 앞에 선 초등학교 어린이처럼 조용해지곤 했다. 불트만과 하이데거가 가한 결정타의 한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H. 브라운의 '신약신학의 문제'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그는 신약성서의 중심 문제 다섯 가지를 끌어내어서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그런 것들이 통일적인 일관성이 있느냐라는 발제에서 시작해서 결국 그 어느 것도 통일적인 연속성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마지막 결론으로서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하느님 앞에 너는 할 수 있다'라는 말밖에 할 게 없다고 했는데, 이 결론이 도화선 이 되어서 양편으로 갈라져 싸움을 벌였다. 그것은 큰 문제를 던진 셈이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론이나 종말론 같은 것마저 상대화돼 버린 것이 큰 토론을 야기한 것이다. 그것은 그날 밤까지 지속됐다. 그에 대해서 보른캄, 케제만, 훅스 등도 반기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불트만은 끝가지 침묵하고 듣고만 있다가 더 토론이 진행되지 않을 때 사회자가 불트만의 판가름을 요청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서 우선 브라운의 각 문제의 분석은 사실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공격을 받던 단상의 브라운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불트만은 "그러나 통일성이 있다. 그것은 신앙이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앉았다. 브라운은 항복하고 말았다. 그 같은 회에 H. 옷트의 강연이 있었다. '조직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제목이었다. 그의 강연을 둘러싸고 너는 아직 바젤적 사고를 탈피 못했느니, 부리(Buri)의 아류라느니(훅스)하고 공격을 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그야말로 불트만을 가장 잘 이해했다는 변호 등 논쟁이 그칠 줄 모를 때 사회자(딩클러)가 "하이데거 선생이 좀 결론을 지어 주시오"했다. 하이데거는 "조직한다는 것은 무얼 뜻하오? 하루종일 토론해도 '시스테마 티쉬'라는 말을 규명하지 않았으니, 결론이 날 수 있소?"라고 한마디 하고는 앉아 버렸다. 이 순간 모임에서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것으로 종결됐다. 저들은 '조직한다'는 말은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하루종일 입씨름했는데, 결국 그 허점을 찔린 것이다. 저녁의 좌담 모임은 내게는 저들의 말을 듣는 절호의 기회로 부지런히 이 자리 저 자리에 바꿔 가면서 그 화제 속에 끼어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날 강연자의 주변에 들어붙어서 질의를 계속하는 장면, 그것에 답변하려고 애쓰는 강연자의 진땀 빼는 모습은 죽은 파리에 개미 떼가 달라붙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특히 회의에서 발언의 기회를 못 가진 젊은 층들이 이 자리를 집요하게 이용했다.
나는 이 학회에서 마지막 몇 차례의 모임을 빼고는 절반도 잘 알아듣지 못했으나 일 년간의 신학의 의욕을 얻고 돌아오는 기회로 삼았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는데, 이것이 언제나 돌아오는 내 결론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소위 거물급 신학자를 찾아갈 줄 모르는 나는 이 기회에 저들을 접할 수 있었다. 되도록 불트만, 하이데거, 고가르텐의 곁에 앉아서 그들에게 우둔한 질문을 했다. 저들은 동양 사람이기 때문인지 잘 응해 주었고, 때로는 저쪽에 앉은 나를 일부러 제 곁에 불러 앉히기도 했다. 그들의 냄새라도 더 맡을 셈 치고 어리광을 부린 셈이다.
이 학회는 줄곧 계속되고 있다. 그런 마당에 학문의 진전이 없을 수 없다. 나는 '무식하구나 이런 것을 통 몰랐으니' 하는 자각만 안고 와도 그것은 큰 수확이었다. 무엇보다도 비판을 받을 자세, 비판을 하는 용기가 저들이 학문을 철저히 하게 하는 풍토를 형성한다. 학회는 물론 어떤 논문을 하나 발표한 자는 미리 두들겨 맞을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얻어 맞고 또 맞아서 그중 40%만 건지면(인정받으면) 성공이라는 태세라고 한다. 사실상 누구의 논문 하나 나오면 곧 사면에서 찬반의 총알이 날아들며, 그런 반응이 없으면 그것은 완전히 묵살된 셈이다.
나는 한국의 신학계가 이러한 비판 정신과 집요함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나, 나부터도 용기를 못 낸다. 그것은 비판은 곧 원수가 된다는 묘한 풍토가 있기에….
(197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