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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1. 오늘날 역사 예수 추구 성격

역사의 예수에 대한 물음은 오늘에 와서도 해결되지 않은 커다란 문제로 남아 있다. 이 물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8, 9세기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서 제기되었던 문제이다. 라이마루스(Reimarus)의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목적』이라는 책이 레싱(Lessing)에 의해 발간된 것이 1778년인데, 이 책이 예수를 역사적으로 파악하려는 첫 시도(A. Schweitzer)였다고 한다면, 그 이전에는 역사의 예수라는 문제가 적어도 신학적으로는 대두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그 전까지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하지 않고 신앙 안에 둘을 총체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에서의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과 오늘날 역사의 예수에 대한 물음의 모티브는 전혀 판이하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역사의 예수를 그리스도 도그마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에 반해 오늘에 와서는 역사의 예수와 그리스도 케리그마 사이의 연속성을 찾으려는 것이다(R. Bultmann). 이 문제를 파악하려는 노력의 과정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1. 신앙의 그리스도 안에 역사의 예수를 포함 통일시킨다(근대 이전).

2. 역사의 예수에 집중하여 신앙의 그리스도 도그마를 배제한다(자유주의 신학).

3.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대상이다. 역사의 예수는 알 수도 없으며, 알 필요도 없다(Kälher 이후 Bultmann, 정점으로 하는 소위 신정통신학).

4.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상인 것은 사실이나 그 케리그마의 객관적 근거로서 역사의 예수를 찾아야 한다(소위 포스트 불트만 학자들의 주장).

이상에서 일견(一見) 1과 3이 상통하고 2와 4가 통하는 것 같다. 관심이 어느 것에 치중되었느냐 하는 측면에서만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 차이는 현저하다. 이제3과 4의 견해를 중심으로 소개하면,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를 역사비평학적으로 연구를 거듭한 목적은 역사의 예수를 밝히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암담한 것이었다. 그것은 역사의 예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인 복음서가 예수의 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역사적 얘기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양식사적 복음 연구는, 역사의 예수는 찾아낼 수 없으며, 우리에게 최후선으로 드러나는 것은 처음 교회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며, 처음 교회에 의해서 형성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그러기에 "예수에게로!"라는 슬로우건은 자취를 감추고 오직 복음서의 그리스도 증거(Das Christuszeugnis der Evangelien) 만이 대상일 따름이라는 데서 정지하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정지에 만족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역사의 예수를 묻지 않으면 케리그마의 신빙성이 문제가 된다. 반대로 케리그마에만 머물면 예수는 하나의 신화적 존재가 될 위험이 있다(Käsemann. 그러나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은 예수냐 아니면 그리스도냐의 이중택일을 목표로하지 않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예수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그 둘 사이의 연속성을 찾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가능하냐하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의 정당성은 인정하다고 해도 텍스트가 그것을 허락해야만 그 연속성도 규명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물음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신약성서의 구성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즉 성서의 그리스도는 어떻게 증거됐는가? 이제 오늘까지의 신약 연구에서 밝혀진, 공인된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신약 문서의 성격

신약은 그리스도 사건을 중심하고 있음에는 일관성이 있다. 그리스도 사건을 서술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그리스도 신앙을 역사적(historical) 서술 양식으로 나타낸다. 즉 신앙의 입장에서 예수를 역광적(逆光的)으로 재해석한다. 복음서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반해서 둘째는 역사의 예수에 관해서는 그가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부활사건 이후의 그리스도만을 설교의 형식으로 전한다. 바울의 편지를 위시한 편지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바울의 사상을 형성한 초기의 편지들은 복음서 이전의 문서들이다.

이 두 사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왜 편지들은—특히 바울의—역사의 예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바울은 역사의 예수를 몰랐기 때문인가? 그러나 바울의 글을 보면 그가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역사의 예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신학적 프로그램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바울은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을 따라(κατα σάρκα)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후 5:16)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신앙론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우리는 보는 것을 통해서(διὰ εἴδους)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고후 5:7)라고 한다. 이런 구절들은 신앙이 역사의 예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그는 예수의 말씀을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의 신학적 전개에 있어서—특가령 율법론—예수의 말씀을 뒷받침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또 예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비유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과 깊은 관련이 있는 예수의 기적 행위도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 그가 '주의 말씀'이라고 한 것이 한 두 군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교회의 규율을 위한 것에 국한된다(고전 7 :10; 살전 4:15).

복음서들도 비록 역사의 예수를 전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결코 그의 생활(bios)을 충실히 전하려 하지 않고 예수와 부활 이후의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별없이 전하고 있다. 또 그 둘의 연속성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왜 그랬을까? 케리그마의 원형에 접근해 보면 이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케리그마의 성격

오늘의 성서학은 초대교회의 설교 원형에 접근하고 있다. 그 결과의 한두 예를 제시해 본다.

고린도전서 15장 1절 이하를 보면 (1)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그가 전해 받은 것, (2) 그것은 이미 그 독자들이 알고 있는 것이므로 그들 믿음의 거점이 되어 있다는 것, (3) 그것은 성서에 이미 기록된 일이 성취됐다는 것, (4) 그리고 그 내용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이라고 되어 있다. 즉 전해 받은 케리그마는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이다.

내용상 이와 같은 것으로 πιστενειν 또는 ομολογεἲν으로 표시된 것들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두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롬 10:9)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사건(geschehen)을 믿으라는 형식과 '예수가 주님, 하느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임을 믿으면!'(요 14:15; 5:1, 3) 하는 그의 품격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두 형식이 혼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 아들은 인간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고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었습니다"(롬 1:3-4). 즉 여기서는 그의 품격—하느님의 아들됨—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는 사건이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서 벌써 약간 발전된 흔적을 볼 수 있다.

로마서 1장 3-4절의 그리스도 이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으로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 이것은 역사의 예수의 혈연을 말한다. 그런데 그가 부활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정해졌다는 것이다(οριξω). 이것은 유대의 적자(嫡子)사상이 그리스도 해석에 적용된 흔적이다. 그런데 역사의 예수와 하느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사건에 의한 것이다.

성서에서 역사의 예수가 언제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느냐 하는 것은 결코 서로 일치되어 있지 않다. 복음서의 원형인 마르코는 세례받을 때, 산상 변화에서 또는 예루살렘 입성 때 등 여러 가지로 그리스도됨의 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더 소급하여 그의 아들됨의 선재성을 말한다(빌 2:6 이하). 이러한 사실들은 역사의 예수를 그대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그리스도론적 모티브가 역사의 예수를 해석하는 거점이 됐음을 뜻한다. 따라서 복음서는 신앙의 그리스도의 주석(Kommentar)에 불과하다는 사실(Bultmann, 을 긍정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예수를 그대로 찾아볼 수 없게 했다. 역사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 뜻의 선포지(Der Verkündiger)였는데 케리그마에서 전 한 예수는 선교의 대상 내지는 내용(Der Verkündigte)이 되어 버렸다.

4. 역사의 예수상

적어도 성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복음서의 예수가 이미 역사 그대로의 예수상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트만의 제자들도 불트만이 제시한 복음서의 성격을 그대로 긍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그 스승에게 불복하는 것은 바로 역사의 예수에 대한 추구를 금지하는 일이다. 양식사적 복음서 연구로 처음 교회의 삶의 자리에 도달한 그것을 최후선처럼 선언한 것에 대해서 불복하는 것은 당연하다. 처음 교회의 삶의 자리란 공허한 무전제적 상황이 아니다. 저들의 삶의 자리는 예수께서 일어난 사건이 주도권을 가진 상황이었으며, 그 앞에서 결단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을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예수 없이 케리그마의 성립이 가능했겠는가? 케리그마의 성립은 단순히 부활 경험에 기인한 것인가? 비록 그렇다고 해도 그 부활 경험은 역사의 예수와 상관없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부활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과 같은 양면(Bultmann)이라고 할 때에 역사의 사건으로서의 십자가를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이 십자가를 문제삼을 때 예수의 생(生)도 묻지 않을 수 없다. 까닭은 십자가를 그의 생과 유리된 고립된 특수 현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예수상 이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론에 의해서 변동된 것은 사실이나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론 성립은 역사의 예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는 한 역사의 예수를 묻지 않고는 케리그마 자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이러한 것을 모두 배격하면 예수는 신화적 가설에 불과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론은 환상이나 허구한 가설 위에 세워진 것이 되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필요성이 다시 역사의 예수를 묻도록 한 것이다. 불트만의 그러한 금령에 대한 타당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항의를 제출한 첫 사람이 바로 그의 제자 케제만(Käsemann이었는데 그의 관심은 '케리그마의 변동과 시간의 불연속에서의 복음의 연속성에 대한 물음'이라는 말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부터 10여년 동안 역사의 예수에 대한 추구는 주로 불트만의 제자들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그 결과를 간단히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케제만은 역사의 예수 추구에 방법론을 내세웠다. 그것은 케리그마가 영향을 받은 그 주변의 사상인 유대교와 헬레니즘을 연구한 결과와 복음서를 비교하여 예수에 있어서 특유한 것이 어떤 것들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을 거점으로 삼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한 점들이 어떤 것인가?

(1) 예수의 비유들 중에는 그 고유성을 나타내는 것이 많다(Conzelmann).

(2) 예수의 행위 중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당시의 소외자들인 외인들과 사귀며 그들과 공동식탁을 가졌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가장 특수한 것으로 그의 생을 파악할 수 있는 거점이 된다(Bornkamm, Fuchs 등). 그런데 이 사실과 관련해서 푹스는 중요한 해석학적 제의를 한다. 즉 예수의 말씀은 그의 행동(Verhalten)과 유리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그의 말씀은 그의 행동의 틀 안에서만 그 본뜻이 파악된다. 그의 말씀은 그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다. 아니 그의 말씀은 바로 자기 증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볼 때 가령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비유 등은 바로 그가 죄인들을 대하는 행동과 연속성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전제에서 볼 때 "그 행위는 한 예언자와 어떤 현인의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리에서 행위를 감행한 한 사람의 그것이다"(Fuchs).

(3) 예수가 최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한 것은 의식적으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서, 그것은 십자가 케리그마의 내용을 가능하게 했다(Fuchs, Bornkamm, J. Robinson).

(4) 이상의 사실들이 공동으로 들어내는 것은 그의 전권의식(Vollmachtanspruch)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루가복음 12장 8-9절에 드러나 있다(Tödt, F. Hahn).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인자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하리라'(ὁμολογἠσει).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밝혀준다. 하나는 복음서의 일반적 파악과는 달리 도래할 인자와 나(예수)는 구별된 원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예수는 자기를 인자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다. 둘째는 예수의 전권의식이 밝혀졌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심판주인 인자라고는 하지 않았으나 그 앞에서의 결단은 도래할 인자의 심판을 더 기다릴 필요없이 이미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것은 적어도 간접적인 그리스도론(indirekte Christologie)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Conzelmann).

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 사이에 공존하는 것은 실존이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이해로서의 예수, 팔레스틴 교회, 헬레니즘 교회의 여러 형태의 케리그마에서 일관된 것으로서의 인간 이해를 율법의 철저화와 동시에 은총의 철저화, 엄격한 명령과 동시에 무제한적인 관용이라는 긴장 속에서 나타낸다. 예수의 특이성은 바로 이 피차 모순적인 긴장을 자기 안에 통합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사실이 케리그마에서 언제나 유지됐다(Braun). 이것을 방법론적으로 전개한 이가 로빈슨(J. Robinson)이다.

이상의 여러 견해에 대해서 불트만은 예수가 그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것 외에는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트만은 그런 것들이 다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설교자인 예수가 케리그마에서 설교의 내용이 됐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불트만은 그중에서 브라운이나 로빈슨의 이해를 가장 긍정할 수 있는 해답이라고 본다. 그러나 불트만은 여전히 같은 질문을 한다. 케리그마는 왜 예수의 인간이해를 반복하지 않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 케리그마는 바로 그것 앞에서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예수의 실존이해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어떤 신앙의 근거를 찾아낸다면 케리그마는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되는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중요한 문제는 예수에게 있었던 것(그것이 실존이해라고 해도), 한 번 있은 일(Einmal)을 유일회적인 일(Ein-für-allemal)로 바꾸었다는 것은 예수의 역사를 결정적종말적 사건으로 이해한 까닭이며 그것은 과거의 일로 반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고 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여전히 케리그마 우위의 신학의 입장에서 있으며 우리에게는 케리그마를 통해서 현존하는 그리스도 신앙,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임을 역설한다(1959, 하이델베르크에서 한 그의 강연 "Das Verhaltnis der urchristlichen Christusbotschaft zum historischen Jesus에서).

5. 결론: 교회와 케리그마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단순한 사회학의 대상인 어떤 집단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과의 만남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한 케리그마와 역사의 예수를 단절시킬 수 없다. 또 케리그마에서 직접적인 역사의 예수를 찾아내어 거기서 연속성을 찾으려는 것을 잘못이다. 따라서 역사의 예수를 추구하는 노력이나 케리그마에 머무는 것이나 둘다 타당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하고 싶은 것은 케리그마 형성의 모체인 처음 교회의 자세다.

처음 그리스도 공동체는 예수의 사건을 객관화해서 반복하지 않았다. 그것을 실존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케리그마를 산출해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는 객관화된 서술도 아니며, 또한 주관적 신앙의 산물도 아니다. 그것은 만남에 의한 제3의 사건이다. 또 그것은 처음 교회의 무의식적인 현상이 아니라 의식적인 결과다.

저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나 그의 생애를 객관화하여 예수를 하나의 교사로서 전락시키지 않고 자기의 선 자리와 예수의 사건 사이에서 하나의 증언의 위치를 의식했다. 그러므로 그 선 자리에 따라서 다른 양식의 케리그마를 형성했다. 가령 유대인은 그리스도론에 집중한 데 반해 이방인은 유일신 신앙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참 신의 계시자로 선포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낡은 과거의 보수자가 아니라 전승과 상황 사이에서 새로운 결단을 통하여 창조적 전진을 했다.

처음 교회에는 일찍부터 두 계열이 있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교단이요 다른 하나는 헬레니즘 교단이었다. 전자는 율법에 대해서 보수적인 뿐만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보수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결국 예수의 말씀을 반복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율법화한 데 반해서, 후자는 새로운 상황에서 그 문화 그 언어를 흡수, 구사함으로써 계속적으로 낡은 것에서 나와 앞으로 진출했다. 그런데 전자는 점점 위축되어 역사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고, 후자는 승자가 되어 오늘 우리에게 연결되었다. 이로써 우리가 이어받은 참 교회의 모습은 과거의 반복자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성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는 언제나 새로운 해석자로서 새로운 케리그마 창조를 책임진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역사의 예수의 추구도 그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은 하나의 역사주의(Historismus)의 과오를 범하는 데 그칠 것이다.

(『신학전망』, 197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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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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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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