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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1

내게 주어진 이 제목은 사실상 진부한 문제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거듭 오해받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무신론은 기독교 신앙의 상반이라는 전제에서인 줄 안다. 그것은 동시에 기독교는 유신론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즉 기독교 신앙은 유신론, 무신론은 유신론의 반대, 그러니까 무신론은 기독교 신앙의 상반(相反)이다라는 사고 형식이다. 정말 그게 사실인가?

나는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가에 보도된 예수의 십자가의 장면을 설명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이 설명은 따라서 복음서 기자의 이해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십자가의 장면을 그 설명의 도구로 삼는지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의 중심이 바로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상 그는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또 그의 교훈에도 그리 관심이 없고 오직 십자가를 초점으로 그의 그리스도 신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면 그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보도는 어떤가?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두움이 온 땅을 덮어 세 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세 시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라마사박다니?'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드디어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것이 마가가 전한 것 전부다.

우리는 잠깐 도그마적인 해석으로 뛰지 말고 이 장면만 보면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 '나의 하나님'은 전혀 대답이 없고 침묵 자체이듯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점에서 꼭 같은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 직전의 겟세마네의 기도의 장면이다: 예수는 세 제자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오른다. 그는 "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있으라…" 한 후 조금 앞으로 나가서 땅에 엎드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십니다.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옵소서…" 이처럼 세 차례를, 누가의 표현대로 하면, 땀이 피방울 같이 되도록 간구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그 아바,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수난사에는 시종일관 소위 '신의 나타남'이란 볼 수 없다. 인간의 배신, 음모, 모략, 권력의 남용 등이 구체적인 사건을 이루어 가고 있는 현실뿐이다. 배신자와 배신당하는 자, 때리는 자와 맞는 자, 처형하는 자와, 처형 받는 자, 그 사이에 아무 다른 개입은 없다. 예수는 억울한 판결과 처형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침묵한다. 마치 이 모든 일은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그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저들을 상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당한 침묵의 신의 응답을 기다리다가 결론에 이르기라도 한 듯이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마지막 저항과도 같이 들리는 울부짖음을 남기고 운명한다. 이 장면은 유신 또는 무신론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성서의 신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2

이 처형장에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우선 유대 종교 지도자, 로마의 하수인들, 그를 따르던 사람들, 그리고 중립적인 입장에 선 구경꾼이 있다. 저들은 이 장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많은 시인이나 화가들이 십자가의 장면을 그려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손을 벌려 기다리는 것과, 어린 천사들이 줄달아 오르락 나리락 하면서 그 손과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를 받으면서 위로 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원기록인 마가복음에는 그러한 묘사는 없으며, 어느 적대자나 추종자도 그런 것을 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적어도 그 장면에서 하나님은 무(無) 자체와도 같다. 중세기 말엽의 고민하는 수도승 루터는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라는 비명을 올렸는데, 이 장면은 만일 하나님이 있다면 극도의 잔인성만 나타낸다. 그러한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있나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니체의 '미친 사람'의 얘기를 생각나게 한다: 한 미친 사람이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거리로 오르내리면서 소리 친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 나는 하나님을 찾는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폭소를 터뜨린다. "한 사람은 그는 실종이 됐나? 하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어린애처럼 길을 잃었나? 아니면 그는 숨었나? 그는 우리를 무서워하나? 멀리 사라졌나? 여행을 떠났나?"라고 한다.

사실상 십자가의 장면은 무신론을 뒷받침하기에 적당하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유신론을 굳힐 수도 있다. 그가 "엘로이"(나의 하나님)를 부르니까 그 아래 있던 사람들이 "우리 어디 보자"(ἴδωεμεν)라고 한다. 어디 보자고 하던 이들은 무신론자들인가? 그 어느 것도 가능하다. 그들이 니체가 말한 신을 믿지 않는 거리의 무리들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 장면을 보면서 "그러니까"(Therefore) 내 확신이 맞는다고 했을 것이다. 어디 하나님이 엘리아를 보내 구해 주나 보자! 안 온다. 그러니까 신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거기 유신론자가 있었다고 하자. 저가 만일에 의인이라면 하나님이 나타나서 구해 줄 것이다. 어디 보자! 만일 구해 주면 저는 의인인 것이 입증된다. 그러나 신의 개입은 없다. 저들은 "그러니까" 저는 의인이 아니라는 결론으로서 그들의 유신론을 더욱 굳힐 것이다. 그런데 이 무신론과 유신론은 반신자와 광신자로 될 가능성이 있다. 무신론자는 신의 물음에 대해서 무관심할 수 있으며 자기의 사고에나 생활에 신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유신론자가 "그러니까" 하나님은 있다고 주장하면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다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어야 한다로 번질 수 있으며, 이에 흥분한 유신론자는 자신만 하나님은 있다고 믿고 있으면 될 입장인데 공세에 처한 입장이 되니까 마침내 광신자로서 둔갑할 수 있다. 만일에 이 십자가에 아래서 이러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십자가의 장면은 그 도화선은 됐으나 마침내는 그것과 상관 없는 저들의 본래의 입장인 유신, 무신의 논쟁으로 번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입장은 신앙과는 상관 없다. 저들은 한 배 속의 쌍둥이다. 저들은 둘 다 "그러니까"라는 바탕을 디디고 서 있다. 신앙이란 "그러니까" 위에 세워질 수는 없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은 성서의 신앙과는 상관 없다. 그런데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그의 소리를 악마의 소리처럼 대적했다. 그러니까 니체는 마침내 반신론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니체가 그처럼 정열적으로 신의 죽음을 외찬 것은 두 면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것은 참 하나님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니라, 바로 유신론적인 유럽의 세계관에 대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문제는 신이 이 현실을 간섭해서가 아니라 유신론적 세계관에 의해서 음으로 양으로 사회와 개인, 사상과 질서의 현실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그의 『미로』(Holzwege)에서 니체의 사신선언(死神宣言)은 플라톤 이후의 서구의 형이상학의 운명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플라톤 이후의 희랍철학은 감각적인 세계와 초감각적인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초감각적인 세계가 감각적인 세계를 결정하는 본래적이며 참된 현실이라고 했다. 니체가 사신을 선언할 때, 기독교가 내세우는 신만을 뜻한 것이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초감각적인 세계 전부, 즉 지금까지의 이상적인 것, 표준, 가치, 참, 선, 미라는 것으로 나타내는 모든 것을 포함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끝장을 선언한 것이라고 한다. 니체의 의식은 옳았다. 그것은 희랍의 형이상학의 틀 안에 자리를 마련하고 군림하던 기독교에 대한 정당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니체의 내면적인 갈망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참 하나님을 찾아 몸부림친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그의 소리는 그대로 '하나님!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비명이라는 점이다. 그랬기에 "그들의 한 가운데 뛰어들어 그들을 노려보면서 하나님이 어디 갔느냐고,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리라, 우리가 그를 죽였다"라고 말하는 저 '미친 사람'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하나님을 찾아 떠난 것이다. 형이상학인 하나님 말고 정말 이 역사적 삶의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찾아서!

3

십자가의 예수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어디 보자"고 한다. 관찰자들이다. 무엇을 보자는 말인가? 그것은 지금 눈 앞에 일어나고 있는 바로 저 사실을 보자는 것이 아니다. 아니! 자기들이 이미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리가 옳은가 아닌가 보자는 것이다. 저들은 이 사건 밖에 한 자리를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저들이 생각하는 신도 이 사건 밖에 있다. 저들이 선 자리는 유신 아니면 무신론이다. 저들은 달팽이처럼 머리를 내밀고 구경한다. 따라서 지금 보고 있는 사실에서 무엇이 일어나든지간에 제 갈 곳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것은 자명의 글이며 피안적인 도피처다. 거기에는 문제, 물음이 종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아무리 보아도 또 무슨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은 자기와 관련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그들 자신 안에는 어떤 새로운 사실도 주어질 수 없다. 이미 설정한 자리에 버티고 있는 한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눈 뜬 소경일 수밖에 없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유신론, 또는 무신론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어쩔 수 없이 그 사실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게 된다.

유신, 무신론은 '그러니까'의 위에 세워졌다고 했다. 그것은 그 대상을 객관화한다 함은 주와 객을 엄격히 구별하고 그것을 평행시키는 태도다. 그런 한 그 대상과 만날 길은 없다. 근항에 와서 모든 학문의 분야에서 이 주객의 도식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엄격히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 나가서는 자연과학에서까지 인정하는 바다. 특히 철학에서는 딜타이, 후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등이 이 사실을 밝혔고, 자연과학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 이 점이 규명되었다. 즉 세계의 규명에 있어서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의 선 자리는 이미 그 객체에 관입(貫入)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물음은 내 삶에 대한 물음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삶은 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계속적인 물음과 대답이 뒤따른다. 그 대답은 또 객관화해서 어떤 정초를 삼을 수는 없다. 그 대답을 또다시 물음의 대상으로 할 때만이 그 대답이 나를 떠난 또 하나의 유령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사랑을 묻는 경우에도 쉽게 사랑을 객관화함으로써 나와 유리된 어떤 사물화에 떨어지기 쉽다. 사랑을 묻는 것은 나를 묻는 것과 유리된 일이 아닌데 그것을 물을 때 나는 그 물음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또는 아버지를 묻는 아들의 경우도 그 아버지를 묻는 것은 그 아들인 나를 묻는 것과 유리된 물음이 아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어냐'고 묻는 순간 나와 유리된 제3의 문제로 전락시키게 된다. 그것은 그 아버지를 나와의 관계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을 떼어 놓은 듯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 만일 떼어 놓았다면 아무리 물어도 아버지의 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

성서에서 하나님을 묻는 것은 희랍의 철학에서 신을 문제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희랍철학에서는 하나님의 문제를 세계관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다. 즉 그것은 이 세계관의 수수께끼의 대답으로서의 신을 문제로 한다. 그런데 대해서 성서의 신에 대한 물음은 사변적인 물음이 아니라 삶 한가운데서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고정된 대답에 정좌할 수 없고 언제나 계속 다시 묻고 다시 묻는다. 삶이 자명적인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도 결코 자명적인 것이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를 언제나 이동의 순수 동사로 나타낸 데서 보는 대로 묻는 자의 어떤 일정한 위치의 설정을 허락지 않고 계속적으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물어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서의 내용을 교본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객관화할 수 있는 보편율을 찾았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에 대한 가르침으로 알고 신관을 만들고 그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변신론을 폄으로써 유신론적 세계관을 형성해 버렸다. 따라서 무신론은 그 뒤에 일어나는 필연적인 반작용이다.

겟세마네의 기도나 또 십자가상의 부르짖음은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 하나님은 자명적이 아니기에 고투하고 있다. 스토아적인 입장에서 보면 이 고투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 입장에서 보면 여기 나타난 예수를 결코 확고하게 정립한 신관 위에 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그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비겁'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비난을 변호하기 위해서 기독교 측에서는 그는 시편을 노래한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한 적이 있고, 지금도 그런 이들이 있다. 그것은 결국 자가당착이며 희랍적 유신론에 굴복한 소치다. 그러나 반면에 이 부르짖음은 무신론의 선언도 아니다. 예수가 만일 유신론적인 신관을 가졌다면 이 순간은 무신론으로 급전화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억울한 최후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있다거나 없다거나하는 어떤 결론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오직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물음과 함께 운명한다. 이것은 결론이 아니다. 아니! '물음'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 커다란 물음을 던진다. 그의 죽음은 그러므로 끝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대답을 기다리는 물음이 됨으로써 하나의 투신이 된 것이다. 누가는 이 말 대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라고 했다. 옳은 해석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4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것은 단절 앞에서의 부르짖음이다. 버림받은 자의 부르짖음이다. 버리셨습니까라고 한다. 버림받았다는 것이 확실하면 그것으로 끝장이 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다.

버렸느냐고 묻는 것은 본래 무관한 관계 사이나 또는 원수에게 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다. 버리는 것은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를 끊지 않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버려도 나의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결코 제삼자가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다. 버림을 받은 것을 확인하면서도 끝끝내 나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죽으면서도 '내 삶'이라는 것과도 같이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한다. 누가는 하나님이라는 말 대신 아버지라고 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묻는 것은 자기를 묻는 것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아버지께 묻는 것이 아들로서의 자기를 묻는 것과 유리되어 있지 않음과 같다. 버림받은 아들의 물음은 곧 버리는 아버지를 묻는 것과 유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는 나는 버림을 받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나의 아버지)이요, 나는 당신과 관련된 자(당신의 아들)로 나를 당신께 내 맡기겠습니다라는 뜻과 같다. 여기서 성서에서 말하는 신앙이 탄생됐다.

신앙이란 세계관으로서의 유신론을 견지하는 자세를 말함이 아니다. 신앙이란 끝끝내 미지의 미래에 나를 내맡기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고 있는 어떤 것(Dass)에 대한 결단이다. 이 부르짖음은 자기를 내맡김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은 단절된, 무와도 같은 침묵밖에 없는 거기를 향해서 자기를 내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니까'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를 디딘 탈향(脫向)의 행위다. 이로써 2000년 전에 무와도 같은 것 앞에서 하늘에 신앙이라는 인공위 성이 쏘아올려진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 앞에서 하나님은 그럼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이 사건 안에 있지 그 밖에서 찾을 길은 없다. 그러한 질문을 요한복음에서 빌립이 예수에게 던졌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네가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는 책망을 받았다. 우리는 이 사건 자체에서 하나님을 못보면 따로 그를 보여줄 길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나간 사건을 또다시 객관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찾아 낼 길은 없다. 우리는 이 사건이 바로 내 현존의 물음으로 받아들여질 때만이 나의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사건, 내게 물어 오는 사건, 내게 결단을 요구하는 사건임을 알 때만 하나님이 계시된다. 그러나 그렇게 만나게 될 수 있는 하나님은 유신론에서처럼 그렇게 자명적인 대상이 아니다. 아니! 그는 물음 속에서 현존한다. 이 말은 그는 여전히 나에 대한 타자요, 단절 속의 나의 하나님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초월자요, 피안적이다. 이런 뜻에서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겠다.

하나님의 피안성은 우리의 인식 능력의 피안성이 아니다! 인식논리적 초월은 하나님의 초월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의 피안이다.

(『현존』, 1970. 4)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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