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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예수

마코비취는 우선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 제1장에서 그리스도인과 맑시스트들이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 서구의 맑시즘이 적과 다시 대화를 통한 공동의 과제를 찾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필요성의 바탕을 제시한 것은 자연과학을 통한 역사적 현실의 급격한 변혁이다. 인공두뇌의 위협, 우주시대에로의 전환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삶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를 철두철미 뒤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맑시즘이 고정적으로 주장하던 이데올로기를 재조정 내지는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맑시즘 자체의 고정화나 교조화를 가지고는 급격한 사회변혁에 적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대화의 불가피성의 이유는 전통적 서구 중심적인 역사적 활동에서부터 이제는 역사의 다이나미즘이 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나 맑시즘은 서구의 토양에서 상호작용의 산물인데다 역사적 현실의 변화는 이들의 전통적 활동영역과 방법론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도 극동 제 민족이 세계사의 지평에 등장하면서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그들이 예측했던 자본주의 붕괴가 기계론적으로 도래하지 않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제반 모순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책이나 복지정책을 통해 그것들을 극복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수정 자본주의 체제를 택한 나라들이 월등히 공산세계 제 국가보다 더 복지사회를 이루어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적 측면에서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에서 쉽게 승리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제반 외적 원인들을 제외하고도 맑시즘을 그 주도 이념으로 삼고 있는 공산세계 자체 내의 모순들도 대화를 청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들 가운데 대표적 원인은 맑시즘은 단순한 유토피아 사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따라 그들이 시초에 가지고 출발했던 반(半) 종말론적 혹은 미래적 기대, 희망들이 사라지고 고정화 내지 정착화로 내달리게 되었다. 전통적 서구 사회의 계층적 고정화에 반대했던 맑시즘은 스스로 자체 내의 계층의 형성과 그것의 고정화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악이 변장을 하고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따른 그것 자체 내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은 소수의 지배계층의 형성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프롤레타리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번의 내적 원인은 집단체제의 표상의 수정을 들 수 있는데, 제반 소유와 사상의 공유화나 동일화로 빛어진 개인의 비인간화가 그 이유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중앙집권화의 정치체제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인간 소외를 표방 한 맑시즘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소외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 경제의 국유화, 문화적 영역의 정치화는 결국 자본주(資本主)에서 해방된 인간을 다시 권력자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요인들이 불가피하게 새로운 활력소를 찾게 만들었으며, 이들은 다시 자기가 낳고 자라나은 어머니에게서 어떤 자양분을 얻고자했다. 이런 기대를 가지게 된 것은 늙었다고 밀쳐버렸던 그리스도교의 상에서 새로운 변화된 것을 발견한 까닭이다. 말하자면 사회, 경제적 관심을 통해 본모습을 되찾은 그리스도교의 빛에서 맑시즘 자체의 본모습을 보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무신론자임을 자청하는 마코바취가 그리스도교에 관심하게 되는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다. 첫째, 서구 그리스도교 2천년사에서 형성된 역사와 그리스도교의 변형된 유산을 처리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도적 교회가 서구 역사 형성에 미친 제반 영향들을 다시 해석하자는 것이다. 둘째로는, 참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서 그의 현실에서 우리의 현실을 보자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교의 종말사상과 신국에 대한 기대에서 삶의 역동성을 찾자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발견한 것은 맑시즘이 신의 비실재성의 도그마를, 즉 무신론을 정립한 일이 없다는 것과 또 맑시즘의 당시 비판은 전적으로 시대제약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교 역시 맑스가 공격했던 전통적 유신론을 포기했으며, 또 어용신학이란 비판에서 벗어나고 민중의 아편이란 비난을 떨쳐버리고 민중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까지 논리를 전개한 그는 본래적 맑시즘과 그리스도교의 차이가 있다면 세계관의 차이가 아니고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제2장으로 돌아가서 마코비취는 '자료와 그 의미'를 다루면서 그는 전통적 그리스도교가 이제까지 예수에 관한 자료에서 과소평가한 것을 지적, 반박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론을 내리는데, 첫째,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는 제자들의 착오나 환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둘째, 이 역사 배후에는 분명히 그 시동자가 있었다고 주장함으로 역사와 케리그마의 연속성을 단호하게 주장하고 나선다. 여기에서 그가 거듭 주장하려고 한 것은 전통적 교회가 예수의 자료를 도그마화하기 위해서 편파적으로 평가하여 예수의 활동에 나타난 사회, 경제적 동기들을 의식적으로 배제했다는 것이다. 이 점이 철저히 수정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미래에로의 역동성을 얻게 된다고 본 것이다.

제3장에 와서는 '예수 이전의 유대종교'를 다룬다. 거기서 그는 예수 이전의 유대종교가 가졌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예거한다. (1) 역사의식과 종교적 감정 사이에 괴리가 없이 혼연일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종교적 감정의 초월성을 주장하여 진정한 종교는 초역사적 내지 반역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과는 전적으로 배치 된다. 역사의 핵심은 종교요 종교의 형식은 역사라고 본 것이다. (2) 당시 종교들과 신론에 있어서 완연히 구별되는 신론을 유대교는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유일신론을 확립시켰으며 동시에 야훼 신은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인간이 행동하게 한다는 것, 또 그 신은 자연 신, 인과율,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신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종교는 철두철미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질서에 대해서 부정하고 언제나 다가오는 새 시대를 향해 모든 질서가 자기를 개방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것이 단순히 초월주의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미래와 현재의 내적 긴장을 상실하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이다.

제4장에서는 '예수의 사신(使信)'을 다루는데 마가복음 1장 12절을 중심으로 하고 신국사상에 집중하고 있다. 우선 그는 이 신국 성격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특징으로 규정하고 있다. 첫째, 그 나라는 혁명적이다. 혁명적이란 말은 여기에서는 새롭다는 의미에서 이해되며, 그렇다고 해서 어떤 초월적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만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다. 급진적이냐 혹은 점진적이냐하는 데서 제기되는 방법과 형식상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상적 의미에서의 무력이나 폭력의 사용을 통한 순간적인 질서의 전복 같은 것은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일종의 종말론적 차원이 배제된 영원한 혁명이라고 하는 형태의 것도 아니며, 오히려 급격한 새로운 땅과 하늘의 출현을 예견하는 데서, 즉 미래를 선취하고자 하는 역동성을 내용으로 한 삶과 질서의 보편적 변화를 전망하는 데서 사는 삶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 나라의 두 번째 특성은 역사와 단절한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존재론적 영역에서 보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기는 하나 미래 나라에 대한 동경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적 차원에서는 완전히 비연속적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라고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의 차원에서만 인간은 본래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또 미래에 그 인간화의 완성이 주어지며, 이런 신념이 곧 하느님 나라의 현재적 차원의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런 전제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마코비취가 제시하는 두 가지 이유는 이렇다.

(1)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객관화라는 것을 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프로그 램이나 원리가 아니고 인간 본성의 구체적 실현인 것이다. 까닭에 객관화나 고정화하려는 제반 시도들은 부정된다.

(2) 그리스도 자신이 이미 그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미래를 살았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의 비신화화가 단행된 것이다. 여기서는 그 나라의 비연속적 역사초월이나 미래지향은 중지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하느님 나라가 가지는 특징은 제반 기존 질서나 기득권을 부정하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비연속적 미래가 아니기 때문에 기존적인 것에 대한 비판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 정치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에게 선포되었다. 그리스도는 현재적으로 그들과 자기를 일치시켰으며, 또 어린이와 같은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완성되거나 유용성이 없는 자들에게 자기의 동질성을 표시했다.

제5장에서는 '그리스도'란 제목으로 제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된 예수를 주로 그의 칭호들(Hoheitstitel)을 통해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마코비취는 '인자' 칭호 가운데 제3인칭으로 쓰여진 것들에 관심을 쏟고 있다. 말하자면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어떻게 예수와 후기 유대교의 인자사상을 일치시켰는가하는 데 연구를 집중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 의식을 갖게 되었는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인자란 것에 대해서 제1인칭이나 제3인칭으로만 사용되고 제2인칭으로는 사용되지 않은 데 착안하여 이것으로 봐서 인자 칭호 사용의 임의성으로 인하여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오래 보존 되지 못했고 "인자가 영광 중에"(막 8, 30), "큰 권능을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 가운데 온다"(막 13, 26)라고 하는 묵시문학적이고 미래적인 전승이 임박한 재림기대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라고 하는 칭호 역시 인자의 칭호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들을 제기하는데 구약 이사야서에 나타난 수난받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메시아와 다윗의 후예로서 왕으로 기름부음받은 정치적 해방자로서 대별된다. 말하자면 예수의 상이 정치적 메시아와 고난의 종의 상과 상호 응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메시아로 예수를 생각했다면 그의 십자가에서의 처형은 그의 모든 것의 종국을 의미하는 것이며, 수난의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승리의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승리도 결국 부활이란 사건을 통해서 두 가지 각기 다른 메시아상을 수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회심(눅 22, 32)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부활의 승리라는 사상이 존재론적 집을 뒤집어 쓰면서부터 예수의 해방자적 편모가 점차 초대교회에서 약화되고 말았다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마코비취가 본 것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소명이란 어떤 중대한 사건과 직면해서 동료 인간들과의 대화에서 얻어진다고 하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떤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부딪히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소명을 사람들 편에서부터 받게 되며, 이것은 수난과 영광의 변증법적 동인이 깊이 연루되어 있을수록 더욱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6장에서 마코비취는 '예수 사실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결론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예수의 활동을 평가하는 데 집중한다.

첫째, 예수는 초자연적인 것을 종교에서 제거하고 현실(인간적)의 지평에서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까지의 교의학적인 예수 연구에서 탈피하여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예수를 연구해야만 참 예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대교와 관련해서 볼 때 예수 이전에도 모세, 엘리야, 다니엘과 같은 전형적 예언자들이 있어서 유대교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는 이런 노력을 파괴하고 제2의 길을 완성(율법완성)했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수난의 길을 걸어감으로 완성했으며,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셋째, 그는 로마와 이스라엘을 해체시킴으로 종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무너뜨리며 인간의 폐쇄성을 파헤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어떤 폭력적 수단이 아닌 비폭력적 방법에 의해서 실현하려고 했다.

넷째, 휴머니즘적 측면에서 마태오복음 25장에 나오는 심판장면에서 제기된 인도주의적 표현은 참 크리스천과 참 맑시스트들 사이의 대화의 가능성의 거점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는 것들을 들자면, (1) 맑시스트로 자처하는 이로서 이렇게 정열을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켰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모델을 추구하려고 하는 오늘날 크게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성서학이 찾아낸 영역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2) 다음으로 그는 예수 해석에 있어서 사회정치적 영역을 넘어서지 않고 있기 때문에 기껏해야 휴머니즘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영적 차원에 대한 고찰에는 극히 미비한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대화에서 계속 과제로 다루어 나가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와 맑시즘이 각기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후자는 도덕적 빈곤을, 전자는 현실에 대한 사회정치적 이해의 빈곤을 극복하는 데서 상호 보충적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화에 있어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비판적 측면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와 맑시즘의 대화는 공동의 광장을 마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비판을 통해서—자기의 고유한 영역을 유지하면서—인류의 미래의 삶을 보장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맑시즘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우리가 잠자고 있는 동안에 빼앗아 압류해 놓고 이데올로기로 변형시켜 그리스도교가 채워주지 못 한 삶의 영역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이 빼앗긴 유산을 되찾기 위해서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사목』, 38호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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