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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예수
1. 자유의 개념—폴리스와 자유

현대에서 말하는 '자유'라는 개념은 희랍철학에 연유한다. 그리고 희랍의 '자유'라는 개념은 저들의 폴리스(polis) 개념과 결부된 것이다. 폴리스는 대우주(大宇宙)의 이데아가 이 땅 위에 구현된 공동체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질서 위에 세워졌는데, 그 기준은 누스(nous)라는 우주적 법칙이다. 그런데 그 안에 인간은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그 중의 하나는 노예계급이요, 이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자유인이다. 노예는 폴리스 안에 있으나 그것에서 소외되었다. 저들은 폴리스의 보호를 받을 권리도 없지만 또한 그것을 위해 일할 권리도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저들은 생존권을 주장할 수도 없으며, 폴리스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적 권리도 박탈당했다. 이에 대해서 자유인은 폴리스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그것을 위한 정치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계층이다. 그런데 이 자유인은 무엇이돈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폴리스의 질서를 준수하며, 그것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필요하면 생명을 바칠 자유를 가졌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폴리스의 질서인 법과 그것에 상응하는 이성에 자기를 적응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권리행위를 자유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자유의 개념에는 기존질서라는 절대 제약이 있다. 이러한 사고가 서구의 시민사회에 맥을 이어오고 있다. 봉건시대의 도시가 그 중간에 있다. 가령 괴테가 법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것이라고 한 것이 그런 예이다.

그러나 폴리스가 무너졌을 때, 이 자유의 개념은 내면화됐다. 폴리스가 있을 때는 자기와 그것과의 일치 속에서 자유를 찾았으나 그것이 무너짐으로써 폴리스 대신에 자기 안에 있는 영원한 법칙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데서 자유를 찾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감각적인 욕구의 줄을 끊고, 자기 안의 이성에 매달림으로써 외계의 영향에서 자유하고자 노력했다. 이로써 구체화된 제도나 질서 따위의 제재에서의 해방을 자유라는 내용 수정이 생겼다.

2. 성서와 자유

성서에는 구약성서에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자유'라는 개념이 없다. 바울에 와서야 '자유'라는 개념이 비로소 사용되는데, 그것은 그의 선교의 문화권이 헬레니즘권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으므로 별도의 논의 대상이다. 구약성서나 히브리어에는 '자유'라는 명사는 없다.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시대에 폴리스와 깊은 관련이 있는 '자유'라는 개념이 없는 것은 자연스럽다.

성서에서 충성의 대상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외의 어떤 것도 충성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러므로 폴리스같은 국가관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민족은 국가형태를 지닌 민족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하느님께 복종하고 그의 명령을 따른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보다 근본적인 차이는 하느님과 희랍의 이데아의 질적 차이다. 이데아는 세계 또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사변적인 관조의 산물이다. 그것은 모든 것이 존재하고 움직일 수 있는 거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불멸의 정점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느님은 동적 의지이다. 하느님은 관조의 대상으로서 이 세상을 있게 하는 기점(거점)이 아니라 이 세계, 그 역사, 그 안에 있는 인간을 변화시킴으로 어떤 궁극적인 데로 이끌고 가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폴리스 같은 공동체가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스스로가 만들어 내거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줄 수 있으며 세계를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의 활동에 참여할 때만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활동은 해방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세계에는 '자유'라는 개념 대신에 '해방한다'는 것으로 성격화되었다. 악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악에서의 해방, 제도나 낡은 것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그런 것에서의 해방이다. 해방하시는 이는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해방은 독립된 개념이 아니라 '해방한다'이며, 이해방의 운동에 가담함으로 스스로를 해방하며, 또한 이 역사를 악의 세력에서 해방하는 운동에 가담하라는 것이 바로 성서에서의 자유한다는 뜻이다.

3. 하느님의 나라와 자유의 선언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설교를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1, 15)로 요약했다. 이것은 우리를 존재케 하는 거점으로서의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하느님, 낡은 세계를 새 세계로 변화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의 선포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궁극적 현실 앞에 섰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 회개하라는 것은 바로 이 낡은 세계에서 자신을 해방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낡은 세계에 매인 인간에게 주는 자유의 선언이다.

루가복음에는 이 자유의 선언을 구체적으로 말한다.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을 주고
억눌린 사람들을 놓아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이상은 구약 예언자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이사야 61:1). 이 선언은 '주님의 은총의 해'가 전제되어 있다. 은총의 해는 바로 궁극적 해방과 자유의 때로서 성년 또는 희년이라고 하는 종말적인 때이며, 바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의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나라의 도래 앞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바로 해방과 자유의 역사이다.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를 매인 것에서 해방하고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쉽게 정신화 또한 '종교적'인 의미로 내면화한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서 외적 조건과 내적 상태를 구분할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이사야서는 모든 예언서가 그렇듯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그런 상황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준 말씀이다. 바벨론 포로의 쓴 경험, 그 안에서 유린된 인권 등 가난한 자의 슬픔을 목도하면서 저들에게 하느님의 하시는 일을 알리어 체념 또는 불신앙을 극복하고 희망과 믿음으로 재기할 것을 권고한 말씀이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가난한 자, 묶인 자, 눌린 자들의 불쌍한 상태에만 관심함으로 이해방의 선언의 사회정치적 구체성을 간과할 수 있다. 가난한 자가 있으면 가난하게 하는 자, 묶인 자가 있으면 묶는 자, 눈먼 자가 있으면 눈멀게 하는 자, 억눌린 자가 있으면 억누르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해방 또는 자유에의 선언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인간을 사로잡고 억누르는 세력과의 투쟁의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주님의 은총의 해'란 궁극적 구원의 해이다. 그것은 사회정치적 차원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는 과정은 사회정치적 차원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왜 하필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된 자들의 해방일까?

유명한 산상설교에는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전제한 축복의 선언 이 있다. 마태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온유한 자,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를 베푸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화평을 위하여 일하는 자,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자를 축복의 대상으로 열거한다. 그런데 같은 자료에 의한 것으로 판단되는 루가에는가난한 자, 굶주린 자, 우는 자, 미움받아 내어 쫓기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자들만이 축복의 대상으로 열거됐다. 그런데 성서학에서는 루가의 것이 원형이라는 판정이다. 그렇다면 마태의 '마음이'나 '옳은 일을 위하여'라는 단서들은 본래의 뜻을 윤리화한 것이며, 루가에 없는 윤리적 의미를 부여한 부분들은 딴 계열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억압당하는 자들을 축복한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는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때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는 과정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투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런 뜻에서 루가는 저들을 축복하는 데 이어 '지금'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을 받는 자는 화가 있다고 했다. 왜? 바로 이들이 저들의 생존권을 뺏어 인권을 유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말씀은 바로 이런 세력들에서의 해방과 자유의 선언인 것이다.

예수는 "어려운 일하고 무거운 짐에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시오"(마 11:26)라고 한다. 이것은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막 2:17)는 말씀과 통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선한 사람', '죄인'에 단서를 붙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기존질서가 규정한 '선한 자', '죄인'이다. 말하자면 '죄인'은 그 세대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저들을 부르러 왔다는 이유는 전혀 설명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저들의 소외된 상태에서 해방하기 위해 왔다는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부모를 떠났던 탕자, 잃었던 한 마리 양, 잃었던 온전의 비유(눅 15장) 등은 하느님의 은총의 선언이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낡은 것에서의 해방과 자유의 선언이다. '잃었다'는 것은 바로 그 당시의 윤리, 종교관념 또는 제도에서 볼 때 정죄받고 소외된 자들이다. 이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하느님의 뜻의 선포는 저들의 인권을 뺏을 권리를 주장하는 기존관념이나 제도에 대한 투쟁선언이 아닌가! 탕자의 형이 이 처사에 항의하는 것은 바로 기존의 힘과의 정치적 충돌을 압축한 것이다.

4. 자유를 위한 투쟁

예수의 생애나 말씀이 정치적 인간의 해방이나 자유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것은 일면에 있어서 사실이다. 예수는 인간의 정치활동에서 궁극적 구원이 온다고 보지 않았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속한 일이다. 하느님 나라가 궁극적인 자유의 현실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이 주는 현실이지 인간이 구축하는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바로 이 역사 한가운데 도래하는 것이며, 그 구원은 전체로서의 인간의 구원이다. 예수는 은둔자가 아니다. 바로 이 역사적 현실에서 구체적 인간을 상대했다. 인간은 단독자가 아니라 바로 구조적 사회의 일원이다. 그러므로 이 산 인간의 자유나 구원을 위하는 데 그 구조적 사회와 무관할 수 없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판을 받았다는 기록은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와 기득권자들 간에 충돌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행동이 정치적 관심에서 한 행위가 아닌데도 불가피하게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 세대를 악마가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 도래와 사탄의 추방을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사탄을 정복하면 하느님 나라는 도래한다"(눅 11:20)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적으로 악귀를 내쫓는 것을 중요하게 보도하며, 또 제자들에게도 그것을 명령했다(막 6:7). 우리는 이 사탄의 개념을 사회정치적 차원과 유리된 어떤 고정된 종교개념으로 처리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 차원을 넘어선 어떤 힘이라고 해도 예수는 그 세력이 현실적으로 이 세대를 지배한다고 본 것은 틀림없으며, 그러한 예수의 행동이 정치 차원과는 무관하다는 것은 일종의 명상일 뿐이다. 루가는 마리아 찬가에서 예수의 오신 목적을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교만한 자들의 꾸민 일을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돌려 보낸다"(1:51-53)고 했다. 이런 사건이 정치적 차원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또 마르코에는 종말 때의 경고로서 "정신을 바짝 차리시오. 당신들은 법정에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회당에서 매를 맞고 또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13:9)고 한다. 왜 법정, 회당, 총독, 임금이 박해할 것이라고 했는가? 이들이 바로 사탄의 세력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적어도 저들과의 긴장 내지는 충돌아 불가피하다는 뜻이 아닌가?

사실상 예수는 법정에 섰고, 유다 공회와 총독의 재판을 받아 마침내 로마제국의 정치범으로 처형된 것이다. 그것은 오해에서 왔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적어도 로마의 눈에는 예수가 저들의 질서를 파괴하고 위험하게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처형한 것은 들림없다. 십자가 형은 바로 로마에 저항하는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틀이다.

확실히 예수는 '정치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정당을 조직했거나 젤롯당처럼 폭력으로라도 이스라엘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결사대를 조직한 것도 아니며, 민중을 선동해서 기존세력에 저항하는 운동을 일으킨 보도는 없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은 예수의 활동이 '정치활동'은 아니었더라도 인간의 자유를 위한 정치적 배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왜 예수는 공생활의 무대를 갈릴래아로 정했는가? 갈릴래아는 적어도 600년간 유다 집권자들에게서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다가 유다 지방이나 예루살렘에 가지 못했거나 가지 않고 중도에 눌러 앉은 사람들이며, 그곳은 예루살렘을 저항하거나 그곳에 더 있을 수 없는 소왼된 자들이 모인 곳이며, 반로마투쟁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곳은 로마정부에 의해서도 예루살렘과는 현저한 차별 대우를 받은 지역이다. 그뿐 아니라 그 곳은 종교적으로나 문화적 또는 혈연적으로 혼합된 무리들이 살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당대의 예루살렘은 성전과 율법의 독립권을 고수하기 위해서 언제나 외세에 아첨하는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던 곳이다. 제사족속,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헤롯당들이 그러한 종교귀족들이다. 저들은 기존질서를 사수하기에 혈안이 되어 율법을 철저히 강화했고, 그 해석권을 독차지했으되 율법을 자기들에게 주어진 계명으로 받기보다 민중을 다스리는 도구로 삼았기에 '죄인' 색출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부패한 예루살렘에 저항하는 집단들은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 요르단강, 사해 일대로 이동했다. 에쎄네, 쿰란, 세례자 요한파, 젤롯당들이 알려진 이름들이다.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종교귀족 들은 하나같이 종말사상을 포기했음과 동시에 유대 민족의 자유를 체념한 데 대해서 갈릴래아 일대는 종말사상으로 일치돼 있었으며, 메시아의 도래를 꿈꿈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자유를 희구했던 것이다.

복음서의 보도는 예수가 바로 이 갈릴래아 일대에서의 그의 공생애를 시작해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거기서 제자들을 선정했고, 민중을 이끌다가 맨 마지막 단계에서 예루살렘에 돌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갈릴래아에서는 해방과 자유의 때를 선포한 데 대해서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을 숙청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했으며, 마침내는 종교귀족들과 로마정권이 야합한 불법된 힘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예수의 자유를 구속하고 마침내 처형한 자는 기득권의 위협을 받은 권력자이다. 그것이 공관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으로 상징됐다. 그렇다면 갈릴래아는 피압박의 상징으로서 자유를 희구한 무리를 압축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갈릴래아를 그의 활동의 거점으로 삼은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수는 이른바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섰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창기, 세리, 어부, 농민, 여인들과 같은 하류계층이 그의 주변에 돌았으며, 그 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골랐다. 제자 중에는 칼의 무리(시카리)에 속한 유다와 폭력배(바 요르나)라는 별명을 가진 베드로 그리고 젤롯당에 속했던 시몬이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고, (동시에) 세리였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정확성에 대해서 이견이 많으나 분명한 것은 저들은 모두 '기득권자'들은 아니고 무엇인가 새 것을 갈망했거나 필요로 한 무리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이런 무리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그들을 제자로 삼았을까? 저들이야말로 가난한 자, 눌린 자들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유린된 자유를 수호하는 예수의 구체적 행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5. 인권과 자유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만이 줄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의 선포는 바로 구속된 인간에게 주어질 자유의 나라를 약속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느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 근거는 삶의 근거, 즉 인권의 거점과 직결되어 있다.

인권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땅 위의 제도나 권력 이전에 주어진 것이다. 예수는 태초에 하느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다는 창세기의 신앙을 그대로 전제한다(막 10:6). 그러므로 그 생존권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있다.

참새 두 마리가 단 돈 한 푼에 팔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당신들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들로 말하자면 아버지께서 당신들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습니다(마 10:29-30).

이 말씀은 인권은 완전히 하느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으로 바꾸거나 억누를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시며(마 16:26), 그것을 계수화할 수 없다는 뜻에서 99마리 양을 두고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비유를 말씀했다. 인권은 바로 하느님이 주신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이 자유를 줄 수도 없고 뺏을 수도 없다. 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인간의 생존권의 자유와 살리려는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런 것과 정면 대결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이러한 자유를 억압하는 안식일법과의 대결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막 2:27-28).

이것은 인권선언 제1장으로서 인권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은 비록 신의 이름 밑에 세워진 안식일법이라도 용인하지 않는다는 준엄한 선언이다. 하물며 어떤 다른 제도나 법, 나아가서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권위도 이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했더냐? 악한 일을 하라고 했더냐? 사람을 살리라고 했더냐? 죽이라고 했더냐?"(막 3:4)라는 물음에서 어떠한 제도나 법도 그것은 선을 위하고 사람을 살릴 때만 존재의의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악을 행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그런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와 제도나 법 또는 권력의 관계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그 무엇도 인간의 생존권의 자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자유를 수호하는 범위 안에서만 그 존재 가치가 인정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 앞에 선 존재로서 모든 것에서 자유할 권리와 또한 이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자유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 밝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자유는 무엇을 위한 것이냐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또한 듣는 자에게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 자신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싸운 것과 자유를 주기 위해 싸운 것과 같이 듣는 자에게 자유하라고 말하는 대신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유권을 행사 한 것처럼 형제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사랑의 행위의 자유가 궁극적인 것이다. 형제를 위하고 눌린 자를 사랑하는 데 어떤 구속이나 제도나 공포에서도 자유해야 한다. 예수는 당시의 제도나 관념에서 소외된 자를 인간으로 사랑하는 자유를 스스로 실행했으며 또한 그렇게 가르친다. 그는 그 시대가 죄인으로 단정한 계층을 사랑하는 자유를 막는 어떤 것과도 대결했듯이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랑의 자유를 선언한다. 그는 최후의 심판의 비유(마 25장)에서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자 등 가난하고 억눌린 자와 자신을 일치시킴으로 그들의 고난에 참여했듯이 그같은 피압박자의 자유를 위해 자기를 그런 이들과 일치시켜 저들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권한다. 종교귀족들과 대립시킨 사마리아 사람이 지금 수난당한 사람을 보고 모든 공포에서 자유한 행위로 그를 구하는 표본을 보임으로(눅 10:25 이하) 그렇게 수난자를 위해 행동할 것을 부탁한다. 이런 행위에 어떤 구속도 용인될 수 없다. 이것은 사랑을 위한 자유이다. 결국 예수는 이러한 사랑을 위한 자유를 철저화하다가 처형된 것이다.

(1969년 미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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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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