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혁명과 예수
1. 419와 혁명

419를 누가 일으켰는가? 학생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이승만과 그 집단이 일으켰다. 그가 끝끝내 정권욕을 부정으로 일관하지 않았던들 419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의 온상은 바로 불의와 부정이다. 혁명을 막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불의와 부정을 사전에 뿌리 뽑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는 혁명을 피할 길이 없다.

공산주의가 혁명의 기치를 든 지, 반 세기에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 맑스가 위대해서인가? 레닌이 위대한가? 아니, 저들을 강력하게 한 것은 부정과 불의가 그 온상이었다. 공산주의의 강점은 그들이 내세운 약속보다는 저들의 불의와 부정에 대한 분석과 그 선전에 있다. 그러므로 저들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저들이 성공한 지역은 권력의 남용과 그것과 결탁한 자본가의 횡포가 지배하는 후진국이다. 후진국의 모습은 맑스가 공산당 선언을 할 무렵의 서구의 사회 현상을 방불케한다. 첫째, 산업 사회 형성에 따르는 부족 사회의 붕괴와 거기에 따르는 질서 파괴, 가치의 붕괴, 둘째, 권력과 독점 자본가의 횡포에 따르는 부정, 셋째, 가난한 자의 인권 유린, 넷째, 도시화에 따라서 빈부의 차이가 격화됨으로 빛어지는 불만 등등을 의식화해서 저들의 불만을 증오의 불길로 바꾼 것이 공산 혁명이다.

저들이 내세우는 공산 혁명의 근거는 이렇다.

첫째, 모든 죄악의 뿌리는 생산 수단의 사유 제도이다.

둘째, 근대 국가의 행정부란 부르주아 계급의 공동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위원회다.

셋째, 자본주의 체제는 후진 국민에게 물건을 강매하는 시장화가 불가피하다.

넷째, 쳐부수어라! 잃은 것은 손에 채워진 쇠고랑밖에 없다.

이런 선동이 그런 처지에 있는 민중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에 더해서 공산주의는 강력한 조직으로 결속하고, 그리고 미래상으로서 기독교에서 훔쳐간 종말적인 목적론적 역사관까지 동원한 미래 세계의 비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마당에 '반공! 반공!'만 반복해서 문제가 해결되나? 지금이 정권유지나 하기 위한 얕은 꾀나 쓸 때인가? 지금은 공장이나 몇 개 더 서는 것으로 자만할 때가 아니다. 그보다도 이러한 주장이 먹혀 들어갈 수 없도록 이 땅 위에 새로운 정신풍토와 온상이 되는 불의, 부정을 미리 제거하는 일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공장이 서고, 수출고가 오르고, 고속도로가 건설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 함께 잘 살되, 정의가 서고 정신적 빈곤이 극복되어야 한다. 경제 빈곤이 혁명의 온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분만 아는 소리다. 선진국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젊은 지성인들이 맑스의 슬로건을 내세운다. 이들의 심리 상태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생존권의 투쟁으로서, 다른 하나는 삶의 무의미성에서다.

앙드레 지드는 '라부르공호'의 난파 때 살아남은 자의 체험담을 듣고, 한때 공산당에 입당했다. '라부르공호'가 파선되자 구조선을 다 동원했으나 재빠른 사람들만 일부 탐으로 금방 만원이 되었다. 그런데 뒤로 헤엄쳐 오는 사람들이 수없이 구조선에 매달림으로 그것마저 전복될 위험에 놓였다. 그 때 먼저 탄 사람(기득권자)들이 함께 저들을 밀쳐내다가 마침내 칼로 매달리려는 저들의 손을 계속 찍어버렸다. 이 판에 도덕적 설득이 먹혀들어 가겠는가? 여기서 폭력을 수단으로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동의하게 되었다.

딘(Dean A.)은 삶의 의미를 묻다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냐?'라는 주제 아래 무한한 사막으로 뻗은 사막의 철도 위에서 손으로 젖는 트럭을 저어가는 사람을 만화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바로 고독인의 표상이다. 그 고독은 마침내 분노로 변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세계를 점유하면서 한 것이 무엇이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2. 예수는 혁명가인가?

불행한 것은 예수는 단 한 줄의 글도 세상에 남기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전승이 여러 형태로 되었으며, 또 그 전승 과정에서 전승충이 여러 모양으로 생겨버려 그의 제 모습을 찾아내기 그렇게 어렵다. 이 점에 있어서는 맑스나 엥겔스 등과 대비해 보는 자체가 무모하다. 그러므로 혁명이란 언어를 써도 이른바 정치, 경제적인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은 부당하다.

예수에 대해서 복음서들은 너무도 극단적인 양면성을 전승하고 있다. 예수는 일면은 철저한 평화주의자이다. 이미 유명한 산상설교의 내용만을 보아도 그의 평화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론(論)이 아니라, 지상명령이고 과제이다. 왼 뺨을 치는 사람에게 오른 뺨을 돌려대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려면 생존권을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이르면 자신은 다 포기하되 생명까지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평화를 깰 수는 없다는 결연한 투지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원수에게 보복을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다. 원수를 원수로 생각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평화, 그런 평화가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나 예수는 바로 그것이 하늘이 내린 명령으로 제시한다. 그러므로 결론은 '하느님이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한다'(마 5:48).

그러나 우리는 이와 너무도 대조되는 극단적인 그의 발언을 발견하게 되므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치 않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런 말들은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형태를 전한 몇 가지 경우와 결부시켜 볼 때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예수가 그의 적대지들의 항의에 칼날같이 맞선 이야기들을 빼더라도 그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탄아 물러가라'고 저주에 가까운 책망으로 날이 선 칼로 병든 지체를 자르 듯하는 것이라든지,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의 그의 결연한 자세, 그리고 부패한 성전에 대한 몸으로 행한 그의 분노의 폭발 등은 아무리 우회적으로 설명하려고 해도 그 과격성을 제한할 수 없다.

예수의 선언 가운데에도 반체제적인 과감한 내용이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 도래 선언이 가장 극단적인 현실 부정적이고, 현체제 혁명적인 선언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이 화급한 선언은 바로 로마제국을 포함해서 유대인의 구원을 책임진 듯, 수호에만 급급하던 모든 것이 곧 끝장을 보게 될 것이라는 선언인 것이다. 앞선 자가 뒤서고, 뒤에 선 자가 앞서게 된다는 것이 혁명이라면 하느님의 나라 도래설은 혁명이라는 그 성격을 포괄한 표현일 수밖에 없다.

예수는 분명히 이제 올 역사의 절대적 전환기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돌연 번개가 번쩍 하듯이 올 것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역사의 어떤 과정도 없이 도래한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하느님 나라 비유를 얘기한 여러 짧은 발설에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역사적 과정을 측정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기존 체제나 기득권을 무조건 무시하거나 타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도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큰 잔치의 초대 비유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나라가 오는 것은 사람이 감지할 수 있을 만한 징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람들에게 계절의 변동에 대해서는 그렇게 잘 알면서도, 왜 이 시대가 어떤 단계에 왔는지는 무관심하느냐고 책망했다.

둘째 단계는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것이다. 모순이 축적되고 갈등이 격화되면서 결국 그것은 폭파되고 마는데, 폭파되는 이전의 단계에서 인간에게 많은 고난이 닥쳐올 것이라고 한다.

셋째 단계는 마침내 분열이 표면화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가장 자명화된 것으로 알고 있는, 그리고 그렇게 구성되어 있는 혈연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혈연 관계에서 응결된 가족, 부족, 종족, 민족이라는 것 안에서 분열이 시작되되, 극단적으로 어머니와 딸이, 아버지와 아들이 원수가 되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넷째 단계는 셋째 단계의 필연적인 결과이나 마침내 평화가 깨지리라는 것이다. 이 단계를 예수는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치 말라고 하는 전제에서 '불을 주려고, 칼을 주려고 왔다' 등등의 표현으로 성격화하는데, 단적으로 말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로 받으면 된다. 인간사에는 중간 지점은 없어진다. '사느냐? 죽느냐?', '찌르느냐? 찔리느냐?' 뿐이지 그 어느 것도 아닌 제3의 자리에 정좌할 수는 없는 때를 말한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담은 심판에 관한 말이나 비유에서 이 점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끝 단계로 이상의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하느님의 주권만이 행사 되는 그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간이 가로챈 온갖 권력이나 기득권은 끝나고 인간 평등의 신천지가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다.

이상은 산발적으로 보이는 예수의 말이나 행태를 엮은 것이지만, 확실한 것은 그 나라의 도래를 믿되, 바로 직면한 현실로 믿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볼 때, 예수의 말로 전해진 일견 모순스러운 양면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에게서 당시의 민중운동이 모두 대로마 항쟁의 여러 형태로 불타고 있었는데, 왜 예수는 마치 로마제국이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듯이 별로 관심하지 않았는가하는 것에 대한 배후를 읽을 수 있고, 때로는 화급하나 때로는 낭만주의자와 같은 너무나도 유연한 태도가 교차될 수 있는가하는 배경을 읽을 수 있다.

3. 우리의 혁명—예수와의 연대성

1960년대 중반경에 그 주최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스도교는 개혁이냐? 혁명이냐?'라는 제목을 내걸고 대중집회를 한 일이 있었다. 성격상으로는 이것이 심포지엄이어야 하는데, 강연회로 열렸다. 그 때에 주최측은 나에게 혁명이라는 단정을 위촉한 셈이다. 그들은 으레 내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전이해를 가졌던 모양이다. 그보다 얼마 후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당시 정보부 남산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을 때 바로 이 강연 내용을 놓고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나를 혁명주의자로 몰려고 했다. 그들은 물론 그런 규정에 그치지 않고, 그런 결론을 어떤 사건과 연결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유혈혁명에 가담할 소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밤낮으로 한 지저분한 대화를 다 기억할 수는 없으나, 단 하나 확실히 기억되는 것은 '나는 혁명을 지지한다'라는 것을 분명히했고, 곧 이어 당신들은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느냐?라고 부언했던 사실이다. 이런 반응은 다시 토론도 아닌 말싸움으로 계속되었지만 나의 지론은 칼로,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는 주장으로서, '나는 혁명을 주장하되, 폭력은 반대하는 사람이다'라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우리들의 희망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한, 우리는 그 이름이야 어떻든 기존 질서에 안주하고 정착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혁명적 희망을 갖지 않으면 예수와의 연대 관계가 끊어진다. 혁명과 개혁의 언어적 정의는 어느 정도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그 차이가 불투명하다. 단 이 둘의 공통점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것이고, 이 체제를 새롭게 바꾸어야만 살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그러나 이런 신념만 갖고는 되지 않아서 문제이다. 배고픈 녀석이 실과나무 밑에 누워서 그 실과가 익어서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때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개혁도, 혁명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예수보다 2000년 뒤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투쟁 양식이 같을 수는 없다. 또 기술 문명의 급속한 발전으로 시간 개념도 급속도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혁명이나 개혁의 개념도 따라서 달라진다. 학자들은 기술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가? 사실상 우리는 하루 같이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제까지도 개혁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무 쓸모없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만 것이 거의 일상적인 경험이다. 과학 기술에 도취한 사람들은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나아가서는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기술 혁명에 의한 낙관을 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낙관론에 안주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세계가 주는 물질적 편리나 새로운 세계의 청사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술에 의한 개혁은 거기에 언제나 보다 무서운 부작용이 수반될 수도 있고, 무엇을 위한 개혁이라는 기본 목적은 없어짐으로 결과적으로 어제까지 문명의 이기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림으로 사람을 결국 편리라는 미끼로 노예화하고 그럼으로 사람으로서의 삶을 빼앗아 버리고 있다. '편리'는 줄지 모르나, 기계 문명으로 인해서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집단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그렇다.

아니다. 우리는 궁극적 평화주의자다. 바로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의 혁명의 노선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이로써 우리는 언제나 기존 세대의 세력과 싸울 수밖에 없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처럼 수난의 길은 항상 전제되어 있다.

(1970. 4. 19.)

TAG •

List of Articles
우물가의 대화 (요한 4, 3-42)
구걸하는 초월자 (요한 19, 28)
심는 자 와 거두는 자 (요한 4, 31-38)
나를 먹어라 (요한 6, 34-40)
약자 예수 (고후 13, 4)
남은 고난 (골로 1, 24)
제물 (히브 11, 17-19)
죽어야 산다? (마태 16, 24-25)
십자가의 의미 (마르 15, 27-39)
어머니 (마르 7, 24-30)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제2부 신, 당신은 누구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 8, 27)
모순과 은혜 (로마 9, 19-24)
신의 주권만이 (누가 11, 1-4)
이 사람을 보라 (요한 19, 6)
하느님의 눈 (마태 6, 2-4)
앞선 자와 뒷선 자 (마가 10, 31)
예수의 눈 (마르 5, 25-34)
이 분이 누구인가? (마르 4, 35-41)
 
제3부 인간, 너는 누구냐?
삶의 좌표 (빌립 2, 12-18)
바울의 실존 (빌립 3장)
소명에서 산다 (빌립 1, 18-26)
복음의 생명력 (마가 1, 15)
바리새 사람과 세리 (누가 18, 9-14)
어떤 아버지와 두 아들 (누가 15, 11-32)
부모와 자녀들 (누가 15, 11-32)
두 인간형 (누가 18, 9-14)
보물이 담긴 질그릇 (고후 4, 7-18)
사람으로서의 삶 (마태 6, 25-34)
 
제4부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사건을 통한 구원 (고후 11, 23-33)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누가 19, 37-41)
이 성전을 헐라 (요한 2, 13-22)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놈들 (마태 23, 16-26)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 5, 11-12)
무대에서 춤추는 꼭두각시와 무대 뒤에 숨은 주인 (마태 6, 1-8)
 
제5부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를 따라서(imitatio Christi) (고전 11, 1)
역경과 복음의 전진 (빌립 1, 12-17)
그리스도의 공동체 (로마 12, 1-8)
복권(復權) (마르 1, 40-41)
제가 무엇인데 감히 (출애 3, 1-12)
소명 (사도 7, 23-35)
하느님의 선교 (마르 1, 40-45)
예수의 낙인 (갈라 6, 11-17)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 2,1-11)
무위와 신앙 (마태 6, 24-34)
 
제6부 영원한 현재
하느님 나라 (마태 13, 44)
휴식에의 초대 (마가 6, 31)
영원한 현재 (계시 21, 6-8)
전야 (계시 22, 10-16)
오늘의 성탄 (누가 2, 1-7)
바울 사도의 기도
새 세계에의 초대 (누가 14, 16-24)
단 둘 (요한 8, 1-11)
결단은 수난의 각오다 (마르 3, 1-6)
성 윤리의 기준 (요한 8, 1-11)
갈릴리 교회는 왜 세워졌나? (마태 4, 12-25)
표지
 
재1부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이천 년 동안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는 저 사나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수난
베일에 싸인 십자가
화려한 십자가
부활은 십자가의 표면
부활의 뜻
부활절 새벽
부활절 아침에 드리는 기도
4월과 부활절
부활과 4ᆞ19
부활을 믿느냐?
부활절의 십자가
Advent
생명을 잉태한 여인
오늘의 성탄절
구유에 누운 아기
영원한 평화
그는 흥해야 하고
누가 내 이웃이냐!
예수는 정치범?
수난의 각오
종말사상의 힘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사건화하는 손
 
재2부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가 사람을 죽여?
성서
두 가지 물음
성서 절대주의
성서를 찾는 마음과 눈
그리스도는 우주인인가
이미 늦었다
우상화
삶의 모순율
자유와 예속
무상과 영원
살인과 분노
죽음에 이르는 병
어린이 같지 않으면!
보물을 담은 질그릇
휴식에의 초대
편리라는 유혹
기술사회의 도전
전체주의와의 투쟁
현대의 욥
자다가 깰 때
 
제3부 축제
축제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
이 때는 잠에서 깰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물질은 하느님의 것
봄의 찬가
고백
증인
의식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
민주주의 제일장
거짓증거
양심
은어
해결해
탈우상화
반복
시간과 영원
휴머니즘의 한계
죄란 무엇인가?
정치적?
계룡산
'상도'(常道)
현존의 의미
야도(夜禱)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회개의 의미
고난의 의미
오 주여!
성문 밖으로
 
제4부 남은자의 윤리
종교적 창기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상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오늘의 그리스도론
정치신학
평등추구의 기독교사
기성교회의 꼴
그리스도교가 잘못된 날(?)
한국 교회의 암?
한국의 교회
종은 누구를 위해 우나!
수도자들의 수난사를 들으며
수도원을 찾아서
학문의 자유
'우리 신학' 추구
현대와 그리스도교
교회일치운동
교회 분화론
그리스도 교회의 진통
그리스도교적 교육
남은 자의 윤리
목사 후보생들에 준 말
젊은 목사에게
신학의 길
인간은 관념의 노예?
하느님의 동역자
역사의 핏줄을 만드는 마술사
그리스도교의 목표
어떻게 살 것인가
표지
 
표지
 
표지
 
표지
 
제1부 혁명과 예수
역사적 예수와 신앙상의 그리스도
무신론과 기독교 신앙
무신론자의 예수
자유와 예수
혁명과 예수
 
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성서와 대결 못하는 신학
기독교화와 서구화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Next
/ 6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