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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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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서구신학을 넘어서
신학한다는 일
1. 신학의 오솔길

오늘의 신학은 이미 전에 있었던 번지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로 이사한 번지는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 정착지는 없이 계속 이동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신학을 한다면서 신이 죽었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신학하는 일을 폐업했다는 선언은 보류하고 있다.

죽은 신을 향한 만가를 부르는 것이 신학하는 일로 알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기독교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공언하면서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전부 도맡아서 해석하고 처리하려고 한다. 식민지에서의 철수를 선언하고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어 버리는 신판 제국주의의 정략을 모방한 술책인지도 모른다.

요새 유행하는 신학은 한약의 감초 또는 경기장의 박수 같은 인상을 준다. 모든 분야에 간섭하지 않는 데가 없다. 잘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박수, 도시화다! 박수, 컴퓨터다! 박수, 달나라 정복이다! 박수, 스튜던트 파워다! 박수, 혁명이다! 박수, 테크놀로지다! 박수, 신이 죽었다! 박수, 당신 박수는 시끄럽소!?!

신학이 제 할 과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현상은 오늘날 신학하는 일의 고민을 나타낸다. 그러나 너무 당황하고 있지 않는가? 그럼으로써 오히려 자기의 능력의 한계와 제자리를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신학은 학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한계가 있으며 지켜야 할 제 분야가 있을 것이다. 모든 학문에 정해진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따라서 결정된 방법이 있듯이 신학도 대상이 정해져 있으며 또한 그것에 따른 방법과 과제가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신학하는 사람은 많은 것에 관심해도 상관없겠으나 신학이라는 간판 아래서는 자기 한계를 지켜야 할 것이다.

2. 신학의 대상

신학은 그 이름이 표명하듯이 그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함으로써 문제가 축소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그 대상을 무한대로 넓힐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역사적인 한 계보인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뜻한다. 신교에서는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제한해서 성서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신학하는 일이라고 했다.

신학하는 사람도 역사적 존재다. 역사적 존재인 한, 자기의 위치를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적 계보에 위치하고 섰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입장이다. 이런 것은 고루하고 거치장스러운 제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상황이다. 이런 것을 뛰어 넘으면 자기를 추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 한계를 넘어 볼 수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그 안에 있으나 그밖의 현실을 내 것으로 끌어들여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기독교 신학'이라는 자리는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한국에 태어나고 그곳에 국적을 가진 사람이 나는 세계인이다라고 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한국인으로서라는 제약은 받아야만 하다는 말과 같다.

성서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밝히는 것이 신학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학하는 일의 대상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우리의 설 자리와 그 과업을 한정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신학은 어떤 것이냐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서의 성격과 더불어 결정된다.

3. 신학하는 일의 성격

(1) 성서는 어떤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원리론은 모순이 없는 질서정연한 논리로 일관해야 한다. 그러나 성서의 사고양식은 사리적이 아니라 파라독스적이다.

십자가는 지혜를 찾는 희랍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며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과 관련하는 것(히 11:1) 등이 그러한 성격을 단적으로 말한다. 따라서 신학은 일반 학문에서 말하는 원리론이 아니다.

(2) 성서의 성격은 그 대상을 사변하지(Erdenken) 않는다. 따라서 실험이나 경험으로 그 대상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은 사변에서 세계의 상을 형성하고 그것을 실험과 경험으로 입증하는 일반 학문의 Cogito Postulat에 예속되지 않는다.

(3) 성서는 존재하는 것을 수미일관하게 제시함으로써(객관화할 수 있게) 그것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도록하지 않는다. 성서는 세계의 수수께기를 풀어 보라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과 불가사의 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라는 믿음을 요구한다. 따라서 신학은 존재하는 것을 전체로서 눈 앞에 보여주어야 한다는(Ganzheit-Postulat) 일반 학문과는 달리 믿음의 현실에 입각한다.

(4) 성서는 진리를 실존적으로 이해한다. 즉 진리는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를 만나는 사람은 단순히 이론적으로 무엇이 참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 진리 자체의 빛에 의해서 밝혀진다고 한다. 즉 진리는 실증주의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는가능성으로서다. 따라서 신학은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실존적으로 밝혀지는 진리를 추구한다.

(5) 그러나 성서는 사물 자체(Ding an Sich)처럼 성서 자체를 관찰의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성서는 자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손가락이다. 그것은 그 손가락 자체를 보라고 하지 않는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라고 한다. 이것을 성서의 계시성이라고 한다.

세계와 인간의 실존의 진상을 밝힌다. 이것은 태양이 빛이므로 자기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비추는 사물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신학은 성서에 매이면서도 그 시선은 인간, 역사 등에 돌린다. 그럼으로써 신학은 곧 안트로폴로지라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6) 성서는 과거나 완결된 현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미래 지향적이다. 따라서 신학하는 일은 완결된 진리 자체를 제시할 수 없고 언제나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부단히 새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신학은 필연적으로 해석 사라는 계보에 서게 되는데 교회의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신학하는 자리다.

4. 증언으로서의 신학

위에서 지적한 성서의 성격과 거기에 따르는 신학의 성격은 지금까지 신학론을 서투르게 스케치 해 본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반드시 불변의 규정일 수 없다. 성서의 성격을 새롭게 파악함에 따라서 신학의 성격도 달리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상에서 지적한 범주 안에서 이 역사의 도상에서 신학하는 일은 어때야 할 것인지를 재확인해 보자.

이 세계는 사건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빠른 템포로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서 신학하는 자는 그러한 변화는 아랑곳 없이 기성의 교회의 전통이나 해석을 고수하고 그것을 되풀이하면 될까? 그럴 수는 없다. 성서가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역사와 그 안의 인간의 종국을 말하기 때문에 역사의 귀추에 예민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하는 자는 그러한 한정 자체를 분석하고 관찰하려는 것이 그 임무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일이다. 그 해석은 과학의 결과를 과학의 원리에서 사회적 현상을 경제, 정치 또는 사회학 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서에서 만나는 계시의 빛 아래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해석은 실증주의적인 의미의 증명일 수 없고 어디까지나 성서적이어야 한다. 성서는 설명이 아니라 증언이다. 그 증언은 패러독스적이다. 가령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을 입었다. 그런데 육신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본다고 한다. 이것은 철저한 파라독스적 선언이다. 육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본다고 한다. 그것은 육신의 필연성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육신이 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는 십자가는 구원이라고 한다. 역사적 현상으로 십자가는 패배한다. 그런데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라고 한다. 이것이 증언의 성격이다. 이런 뜻에서 해석자로서의 신학은 곧 증언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신학하는 일은 고발도 되고 심판도 되며 혁명의 선언도 된다. 그것은 학으로서의 신학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대상으로 하는 성서의 성격이 그렇기 때문이다.

(『세계와 선교』, 197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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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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