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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해석의 과정

지난번에 설교자는 어디까지나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듣는 자가 알 수 있도록하는 것이 그 과제임을 강조했다. 그러면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2천 년 동안 교회는 줄곧 성서를 해석해 왔다. 그런데 그 해석사는 곧 기독교사이기도 하다. 그만큼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역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랜 역사에서 성서해석의 과정을 보면 다양한 줄기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 시대의 '삶의 자리'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데 어떤 해석의 계보에서 있으며 또한 서야하는가하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과거에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물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이 날까지의 해석사에 관심해야 한다.

첫째는 이 해석사는 바로 인류 전체가 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공동 작업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 작업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그 동안에 많은 과오를 범했다. 그것은 우리의 귀감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러는 동안에 성서의 본뜻을 향해 그것에 씌워진 무수흔한 껍질을 벗겨 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 주었다. 따라서 성서를 해석하는 데 거쳐야 할 많은 관문을 우리가 다시 반복해서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가 없다.

둘째는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알게, 모르게 과거의 해석방법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가 성서를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으로 받으려면 되도록 과거의 그릇된 해석방법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해석의 과정을 물음으로 내가 지금 어떤 해석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무수한 해석의 계보를 모두 말할 수는 없고 단지 연대적으로 크게 구분해서 그 특징을 밝히는 데 그친다. 성서해석의 역사는 크게 세 시대로 나뉜다. (1) 고대부터 종교개혁 때까지, (2) 종교개혁 시대, (3) 이른바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 이후에서 오늘까지다.

1. 고대와 중세의 성서해석

고대의 성서해석은 후기 유대교와 헬라적인 전통 아래 있었다. 후기 유대교는 우선 경전으로서의 성서의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집중했는데 그 작업이 주후 100년경에야 정착됐다. 따라서 자연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는 데 총집중함으로써 문자주의적인 해석을 강조할 수밖에 없게 됐다. 히브리어의 일점 일획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헬레니즘과 접촉하게 되고 또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데 주력하는 동안 자연 헬라적인 해석방법을 채택하게 됐다. 헬라적 해석방법의 중심은 이른바 알레고리적 해석이다.

고대 교부들은 성서의 문자주의와 헬라어 알레고리적 해석의 두 전통에 섰다. 그들은 이들을 모두 살리기 위해서 헬라적인 사고를 뒷받침해서 그 해석의 정당성을 해명했다.

헬라 고전에 인간은 몸, 정신, 그리고 영(soma-psyche-pneuma)의 복합체로 보았다. 이에 따라서 어떤 텍스트도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고 그 안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있다고 보았다. 그중에서 그 본문의 자의나 그 문법만을 규명하는 연구가들 somatiker라고 했으며, 그 안의 도덕 또는 윤리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자를 psyckiker라고 했으며 한걸음 더 나가서 그안의 종교적인 의미를 찾는 자를 pneumatiker라고 했다. 그 비중으로 보면 영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가장 어렵고 귀중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를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했다. 플라톤은 사물을 이중적으로 본다. 그것은 초감각적인 이데(Idee)와 보이는 것과의 구분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데의 투영적 현실이다. 따라서 본래적인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관이 유대교를 거쳐서 기독교에 유입되어 성서해석에 적용됐다. 성서는 보이는 문자와 그 배후에 문자를 넘어선 뜻이 있다. 그러므로 성서해석은 이 둘을 함께 알아야 한다. 처음 것은 그 문자가 나타내는 뜻을 그대로 밝히는 일이요, 다음 것은 그 뒤에 숨은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이다.

이같은 전통을 받아서 그것을 조직화한 이는 오리게네스(Origenes)다. 오리게네스(?-254)는 희랍에 사는 유대학자 필로(Philo)가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으므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필로는 구약을 헬라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헬라적으로 풀이했는데 그 방법은 알레고리적인 것이었다. 오리게네스의 성서해석의 한 예를 보면 그 해석방법을 알수 있다.

창세기 35장 22절,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이런 구절은 어떻게 해석할까? 그 문자가 나타낸 것에 그치면 성구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성서 안에 있으니 어떻게든지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전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1) 문자적인 뜻으로는 르우벤이 서모와 관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보면 성서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안에 더 중요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2) 그것은 도덕적인 의미다. 즉 르우벤은 자연인의 한 대표로서 인간은 도덕적으로 범죄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성서가 가진 특유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뜻이 있다.

(3) 르우벤은 장자다. 그것은 하나님의 첫 아들인 이스라엘을 가리킨 알레고리다. 즉 이것은 이스라엘이 야웨를 배반하고 다른 우상을 섬겼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것이 알레고리적 해석인데 오리게네스는 둘째의 도덕적 의미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1)과 (3)에만 치중해서 문자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찾았다. 영적 의미는 숨은 보화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그에게는 영적 해석(알레고리)이 가장 중요했다.

오리게네스가 대표하는 이 계열을 이른바 알렉산드리아 학파라고 하는데 이들의 이같은 성서해석은 그들의 그리스도론에까지 연결됐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원성론을 견지했다.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요 참 하나님이다. 그는 비록 사람이나 하나님이다. 따라서 그의 보이는 인간성만 보는 것은 피상적이다. 보이는 그를 넘어서서 그는 신이다. 이것을 보는 눈은 영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 예수는 비록 육체를 썼으나 원죄에서 자유했다. 이와 같이 성서도 인간의 글로 되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문자의 의미만 보는 것은 피상적이며 그뒤의 하나님의 뜻을 보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자가 비록 인간의 글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예수의 경우처럼 무오하다고 한다.

오리게네스의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은 3세기에 와서 성서해석의 원칙처럼 굳어졌으며 문자적인 연구에는 거의 무관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 반기를 든 것이 안디옥 학파다.

안디옥 학파는 성서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거부하고 그대신 "테오리아"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이들은 성서의 자의에 철저하는 것 외에 다른 해석은 자의적인 해석의 혼선을 빛을 수밖에 없음을 단정하고 어디까지나 역사적 문법적인 방법만이 유일한 해석의 길이라고 보았다. 루치안(Lucian; ?-312)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그들의 그리스도론과 관련이 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이원성론적 그리스도론을 주장한 데 대해서 이 학파는 예수를 순수 인간으로 보고 인간 예수에게 로고스가 내재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간성 이상의 것을 찾는 것을 거부한 것이며, 저들의 성서관과 그 해석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학파의 주장은 이른바 아이란파로 발전했는데 그것은 오랜 투쟁 끝에 패배해서 이단으로 규정됐으나 그들의 해석에서 중요한 것 하나는 중세 교회에 계승됐다. 그것은 이른바 유형론(Typologie)이다. 저들은 문법과 더불어 역사에 관심했다. 그럼으로써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유형적인 사건들에 관심해서 신약의 사건들을 구약에서 찾아냄으로써 그 사이의 연결성을 찾으려 했다. 이미 바울이 예수를 둘째 아담이라고 한 것은 그러한 예인데, 그것을 안디옥파처럼 해석하면 아담은 첫 창조의 인간이라면 예수는 둘째 창조의 새로운 인간이 된다.

고대교회는 알레고리와 유형론에 대해서 엄격한 구별없이 혼용했다. 성서의 자의와 영적 의미를 알레고리와 유형론을 혼용해서 중세기 성서해석의 기초를 확립한 이는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은 성서의 문자의 의미를 외적 표상(Signum)이라고 하고 알레고리적(영적)인 해석의 대상은 본 뜻(res)이라고 했으며 이 두 가지 뜻을 밝히는 것이 성서해석의 절대적 의무임을 분명히했다. 이제 그의 성서해석의 이론 대신 구체적인 해석의 예를 보자.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어떤 사람=아담(사람), 예루살렘=낙원, 여리고=이 세상(여리고는 달이며 그것은 기우는 운명에 있기에), 내려간다=타락한다, 도적=사탄, 의복을 벗기고=영원한 삶을 박탈하고, 상처를 내고=죄를 짓게 하고, 반쯤 죽게 하고=아직 하나님을 찾을 가능성이 남아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예수, 기름과 포도주를 바르고=부드러움(용서)와 율법을 주고, 짐승에 태워=그리스도의 몸에 품어, 여관=교회, 두 데나리온=아버지와 아들, 돌아올 약속=재림 등등 이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한 비유에서 구약과 신약의 사건 들을 구속사적으로 한데 엮은 것을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의 정당성을 위해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예를 성서에서 찾아내어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자체만으로만 찾아낼 수 있을까? 그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은 성서에서 얻은 지식을 도식화한 후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 자체만의 독립성이 없게 되며 그것은 이미 있는 도그마를 입증하는 역할만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 비유의 문자가 나타내는 것은 상대화되고 만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각 사람마다 제멋대로 다르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어느 해석이 옳다고 입증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중세교회는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빚어질 아전인수적인 해석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교회의 권위를 발동해서 그 해석을 고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1546년과 1870년의 교회 공회의는 문자적 의미(Sensus Literalis)와 영적(알레고리적) 의미(Sensus Spiritualis)를 함께 찾는 성서해석법의 정당성을 결정했고 또 그 해석의 표준을 정했으며 그 권한은 오직 법황의 손에 위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으로써 성서 자체와 그 해석권은 독자에게서 박탈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하면 독자는 성서를 읽어도 해석권이 없기에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독자는 단지 성서보다는 교회가 준 해석을 교본이나 율법으로 받아서 그것을 암송하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설교자 자신도 성서 자체에서 직접 문제를 받고 대답을 찾을 수는 없으며 언제나 교회 공회의에서 결정된 도그마에서 결정된 대답을 성서에서 찾는 데 그치는 수밖에 없게 된다.

2. 종교개혁시대의 성서해석

종교개혁의 동역은 성서의 재발견에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와 관련이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적인 사회제도에 저항하는 힘을 희랍 고전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고전을 추구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그 방법은 역사-문법적이었다.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 중에 교리가 아니라 성서 자체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중에 에라스므스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라틴어 번역 성서를 버리고 직접 헬라어 성서를 손에 들고 그것을 연구하여 그 텍스트를 지정 정비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은 성서연구의 불을 이루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루터는 성서를 독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히브리어 연구에 착수했다. 저들은 번역문이 아니라 원문이 가진 힘을 절감한 것이다.

루터 칼빈 등을 중심한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을 마침내 "성서만"(sola scripture)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종교개혁 당시의 성서해석의 기본적인 것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중세기까지 성서는 종교 윤리 생활의 교본 내지 율법국(律法國)으로 성격화됐는데 저들은 성서는 하나님의 산 말씀(Anrede)으로서 직접적인 물음이며 듣는 자에게 믿음의 대답과 고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저들은 성서가 문자화되기 전에 입으로 하는 말씀(viva vox)이었기에(설교) 그 문서를 지금 듣는 자에게 하는 말씀으로 바꾸는 것이 성서해석의 과제라고 했다. 즉 설교를 위한 것이 성서해석이다. 그러므로 자의를 밝히기 위한 문법적, 언어학적 연구도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필요할 뿐이라고 했다.

(2) 성서는 그 자체로서 충분히 그뜻을 밝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서해석에 어떤 권위가 필요 없고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하게 하면 된다. 이로써 그는 성서해석권을 교권에서 각 개인에게 돌려준 것이다. 이로써 성서에 대한 교회의 우위성을 거부할 뿐 아니라 교회가 성서의 내용에 간섭할 것도 거부했다. 따라서 그는 교회를 성서에로 안내하는 길닦기 역할 이상할 수 없다는 뜻에서 세례 요한에 비겼다.

(3) 성서는 그 자체로써 명료한 것이기 때문에 알레고리나 유형론적 해석을 거부하고 오직 그 글이 나타낸 것을 분별하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럼으로써 소위 자의에서 드러나지 않는 영적 해석은 거부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오리게네스를 비판해서 누구나 알 수 있는 문자의 뜻을 버리고 이른바 영적 해석을 함으로 성서를 결과적으로 죽이고 있다고 했다.

(4) 그러나 성서해석에 대전제가 있었다. 그것은 성서는 신구약을 통틀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성서의 중심에 현재하며 또한 그 그리스도가 성서의 해석자다. 그런 뜻에서 그는 성서를 어린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라고 했다.

(5) 성서가 어린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라면 성서 안에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가령 야고보서 같은 것을 지푸라기라고 할 만큼 비판의 길은 터 놓았다. 그는 성서의 여러 가지 잡다한 요소들이 섞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하고 성서의 복음성을 밝힘이 곧 그리스도를 밝히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종교개혁시대에 천여 년 간 사용하던 알레고리적 해석을 거부한 것은 성서해석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다. 만일 종교개혁에서 교권에서 해석의 권리를 뺏고 영적 해석의 길을 그대로 열어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때는 교권 대신 각 사람의 혼미한 종교적 체험이나 지식이 성서의 우위에 서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만'을 높이 내세움으로써 성서를 직접 마주하고 연구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놨으나 많은 문제점들을 남겨놨다. (1) 저들이 그리스도 중심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또다시 알레고리적 해석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구약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게 됐다. (2) '성서만'이라는 주장이 성서 문자주의에의 길을 열어 놓았다. 축자영감설 따위가 그러한 결과다. (3) 성서해석의 권한을 개개인에게 돌림으로써 성서 해석의 공동체성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적극적인 길을 열어 놓았다: 과거에는 신학이란 제사적 교회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시녀의 역할에 머물렀는데 교권에서 그 해석권을 박탈함으로써 신학이 성서해석을 위한 책임적인 위치로 승격하게 했다. 따라서 그 다음에 전개되는 성서신학의 과정은 종교개혁이 내밟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 계몽주의 시대의 성서이해

종교개혁은 이미 파동된 르네상스와 시대적인 공통성 위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된 성서가 어떤 정황에 놓이게 된 것이며 그 해석이 어떤 시련을 겪어야 할 것을 약속한 것과 같다.

루터에게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출발은 17세기 전반까지 이른바 종교전쟁시대에 휘몰림으로 기독교 자체 내의 공백기를 가져왔고 그 틈을 타고 침투한 것은 르네상스에서 시작된 인도주의이었다.

17세기 후기에 이 종교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이른바 계몽주의가 전 유럽의 모든 분야에 침투하였다. 이것은 낡은 기독교의 가치관을 타파하는 운동이었기에 일체의 권위를 부정함과 더불어 이른바 성속의 구별은 철폐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성서'도 하나의 책이지 그것에 붙여진 '성자'는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이 날까지의 교의적인 해석에서 해방되어 모든 다른 책과 꼭 같이 역사적, 비판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역사비평적인 연구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려면 계몽주주의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계몽주의의 성격을 상징하는 것은 '역사', '이성'이라는 두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들에 대한 이해는 일치된 것이 아니며 또 그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도 통일된 견해는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개념은 이 시대의 두 지주와도 같은 것으로서 이것들은 성서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그 이해가 세분된 것은 말할 수 없고 그 성격 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있는 것은 역사뿐이다.

역사는 발전하며 진보한다. 그러면 이 역사는 무엇을 향해 발전 진보하는가? 그것은 그 안에 이미 내재한 것을 구현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이성적 진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성적 진리가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었으나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 정신이다. 그래서 당시에 '역사발전', '이성-인격성'이라는 생각이 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초월적 신의 뜻이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로 대치시킨 것이다.

가령 계몽주의의 선봉에 섰던 레싱(G.E. Lessing, 1731-1805)은 궁극적인 것은 이성적 진리이고 역사는 이 진리 구현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성서에서 말하는 계시가 진리라고 하면 그것은 바로 이성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이 가치가 있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이며 그것이 특수한 의미가 있다면 그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이 보편적 진리를 시간적으로 앞질러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성서의 진리를 이성적 진리라는 테두리에서 상대화했으며 둘째는 성서를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상대화함으로써 그 발전 과정의 소산으로 보았으며 셋째는 그것의 비판기준은 이성이라는 사실이다.

또 헤르더(J.G. Herder)나 슐라이에르마허(F.E.D. Schleiermacher) 등은 역사는 인간 정신의 자기 전개(Selfstentfaltung)라고 보고 종교도 바로 인간의 종교성의 자기 전개라고 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성서도 인간 정신으로서의 종교성의 자기 전개의 산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므로 성서란 바로 인간 정신사의 한 기록이다. 이러한 방향을 극단 화한 것은 헤겔의 역사철학을 도입한 이른바 튀빙겐학파다.

그 창시자인 바우어(F.C. Baur, 1972-1860)는 처음 교회의 역사를 헤겔의 역사 발전 형식에서 해석했다. 그는 신약성서를 종교의식의 발전적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보고 유대적 그리스도교(정)와 이방 그리스도교(반)의 대립을 거쳐서 이루어진 결과가 신약성서(합)라고 보았다. 그중에 사도행전이나 복음서는 이 두 이념이 조화를 이룬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은 사상적 측면에서 성서를 보았기 때문에 그 본문의 문헌학적 연구는 소홀히했으나, 성서가 유대주의파 헬레니즘과의 긴장 관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중요한 공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서 성서가 어떻게 해석될 것인지는 백명(白明)하다. 우선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최고선이다. 그것은 이미 역사 안에 내재한 것으로 그것은 그 안에서 자기 발전을 함으로써 이 땅 위에서 완성 실현된다. 그것이 실현된 현실이란 다름 아닌 이성적, 윤리적으로 완성된 세계다. 또 예수에 대한 도그마적인 표현인 이성론(신인) 따위는 계몽되기 이전의 이해다. 예수야말로 가장 참된 인간으로써 가장 완벽한 이성적 진리인 최고 윤리의 설교자이며 윤리적인 완성자다. 따라서 복음서에 기록된 기적사화는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가령 예수가 갈릴리 호수 위로 걸어갔다는 표현은 비이성적이다. 사실은 예수가 이른 새벽에 호숫가를 걸은 것을 제자들은 물 위로 걸은 것처럼 본 것이다. 또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예수의 설교에 감격한 군중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온 것을 내놓아 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은 것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또는 예수의 부활은 가사상태에서 되살아나서 도피하는 것을 본 것일 것이다 등등으로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제에서 그 시대에 이상적 인간으로 그린 '예수전'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일시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출현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에게 이성적 보편적인 모범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저들이 이른바 '예수전'을 쓰는 자료는 네 복음서들인데 저들은 그 넷 사이의 차이 따위는 전혀 가려내서 보지 못하고 그것들을 적당히 조화 배열했던 것이며 부족한 부분은 심리적인 추리에 의존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저들은 예수를 근대인의 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4. 종교사학파와 성서

종교사학파란 괴팅겐대학에 모인 젊은 소장학자들에 의해서 시작 되었다. 그런데 저들은 그 당시에 구라파를 휩쓸던 리츨학파에 대한 반성에서 일어났다. 리츨학파는 계몽주의의 흐름을 비교적 온건하게 성서이해에 도입했다. 저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신약성서에서 중요한 것은 첫째 예수의 교훈과 그의 인격인데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의 내용은 죄사함과 하나님의 나라다. 죄사함은 개인의 인격과 관계되며 하나님 나라는 한 공동체를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나 죄사함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 도덕의 대상이다. 성서가 지향하는 바는 참 윤리적 인간 그리고 윤리적으로 완성한 사회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서관은 성서를 그 시대의 이성적 사고의 틀에 직접 맞추어 버린 조직 신학적인 귀결이다. 이에 대해서 종교사학파들은 그 가치를 운운하기 전에 성서의 현실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을 역설했다. 이것은 역사학의 철저화다. 그와 동시에 저들은 일반 역사와 종교사를 일단 구별할 것을 주장했다. 까닭은 그래야만 그때의 역사학에 뿌리박은 가치관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적인 주석서로 알려져 있는 마이어 주석서(Kritisch­exegetischer Kommentar zum N.T)의 창시자인 마이어(H.A. Meyer)는 1829년에 낸 첫 권의 취지문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바울의 해석자는 해석자의 '나'에서 떠나서 바울 자신의 선 자리와 그의 사고의 세계에 들어가서 되도록 순수하게 그 현실을 전달하는 데 끌어야 한다. 이것은 해석자가 어떠한 입장을 세우거나 어떤 전제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신약학의 한계다. 그것을 넘어서서 그것의 가치를 운운하거나 또 그것의 실용성을 문제하는 것은 철학이나 교의학의 소관이다. 이러한 입장이 옳은지는 좌우관 이것은 종교사학파의 입장을 단적으로 말한 것이다.

종교사학파는 성서연구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놓았다. 저들의 공로는 대체로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성서를 종교라는 틀에서 봄으로써 일반 역사관의 가치관에서 일단 방어했다. 둘째는 성서가 형성된 역사적 상황을 규명함으로써 성서의 여러 요소들과 그 언어들의 근원을 밝힘으로써 그 본뜻에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을 위해서 저들은 언어학, 고고학, 종교학을 개척한 것은 그 절대 공로다. 셋째 성서의 문체와 그 유형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연구하므로 그 형성사를 알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저들의 노력에서 얻어진 구체적인 것들을 몇 가지 든다면 첫째로 구약이 형성되는 주변인 중동 아시아의 고대종교의 진상과 그 세계관 이 개발된 것이요. 둘째는 신약이 형성되는 주변인 헬레니즘 영역의 종교들에 대한 연구다. 이 둘은 오늘날의 성서연구에 있어서 제외할 수 없는 업적이다. 또 하나 중요한 계기를 준 것은 이미 고정된 물음으로 성서를 대함으로써 벌써 일정한 대답을 결정하고 들어감으로 성서의 전체성을 위축 또는 파괴하는 폐단을 지양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가능하게 한 사실이다.

이러한 방향 설정의 결과는 계몽주의 시대의 성서이해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성서의 중심을 윤리교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종말론에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점이다. 바이스(J. Weiss)는 그의 작은 책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1892)에서 예수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종말론이었지 윤리가 아니었음을 밝힌 것으로서 이날까지의 이성-윤리의 일변도의 자유주의신학의 방향에 브레이크를 건 첫 문이다. 그는 이 문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지상에서 발전하는 최고선으로 도덕적 질서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근거한 초자 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의 한 현실을 말하는 것임을 밝혔다. 그러므로 이것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니엘외서, 에녹, 에스라파 등을 연구해야 하며 영, 사탄 또는 메시아, 인자 등을 도덕적 측면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종교사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저서에 공감 한 슈바이처는 계몽시대 이후의 예수 연구사를 총괄하여 연구 비판함으로써 윤리 일변도의 계몽주의적 성서이해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유대교 연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가령 부쎄(W. Busset)의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종교』(Die Religion des Judentums in Zeitalter Jesu Christo, 1952)가 그 대표적인 경과다. 그는 이 책에서 '인자', '메시아', '적그리스도' 등은 결코 윤리 도덕적인 개념들이 아니라 그것은 바빌론 페르시아 등에 기원을 가진 종교적 종말론의 개념들임을 밝혀냈다.

구약학자 군켈(H. Gunkel)의 『'원시와 종시'에 있어서의 창조와 혼동』(Schöpfung und Chaos in Vrzeibt und Endzeit, 1895) 같은 것도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에 일관된 중동아시아 종교의 종말사상과 같은 관련이 있음을 밝혀낸 불구의 저작이다.

이러한 종교사적 연구는 기독교가 형성된 상황인 헬레니즘 연구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신약의 개념이나 사상은 헬레니즘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예수를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주(Kyrios)로 급전환한 것은 유대교적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 귀결이 아니라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서 새롭게 파악된 종말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례 성찬 등 사크라멘트의 성격을 가진 예배의 내용은 모두 이것과 관련이 있다.

헬레니즘 연구는 처음 교회 특히 바울, 요한 등의 연구에 획기적인 새 경지를 개척했다. 부쎄의 『주 그리스도』(Kyrios Christos, 1913)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고 부분적인 연구로서 아이히호른(A. Eichhorn)의 『신약의 성찬』(Das Abendmahl in N.T., 1898)을 위시해서 하이트뮐러(W. Heitmüller)의 『예수의 이름으로』(In Namen Jesu, 1902), 브레데(W. Wrede)의 『바울』(Paulus, 1905)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러한 종교사 학파의 연구를 거친 결과를 이어서 그리스도주변의 종교양상을 간결하게 밝힌 책은 불트만의 『원시기독교』(Das Unchristentum in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 1949; 허역 역 『초대 그리스도교』)이다.

이상에서 약술한 종교사학파의 연구의 결과는 성서해석에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1) 성서를 종교학의 틀 안에서 보게 됨으로써 이날까지의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한 신념과 주장이 흔들리게 됐다. 까닭은 성서도 시대적 상황의 영향을 받은 것임이 분명해진 같은 평면에서의 우열을 말할 수는 있어도 그 절대성을 말하기는 어렵게 됐다. 이 점은 오늘날 한국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서 야기된 혼란성보다도 더 근본적인 것이다. 까닭은 오늘의 종교적 대화는 되도록 종교간의 공통점을 찾자는 데 대해서 종교사학파의 결론은 기독교 경전인 성서의 성립이 다른 종교적 요소들로 혼합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2) 구약과 신약, 아니 신약 안에서도 그 연속성이 흔들리게 됐다. 까닭은 구약이 형성된 상황과 신약이 선 자리가 다르므로 그 성격이 또한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역적인 차이에서도 오고 또는 연대적 차이에서 온다. 그러면 성서를 통틀어서 이런 것이라고 일원적으로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러다가는 성서의 다원성을 배제하므로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3) 위와 관련해서 그러면 성서해석자는 어느 입장에 서야 하느냐가 문제됐다. 구체적으로는 공관서의 예수냐, 요한복음의 입장이냐, 아니면 바울의 입장이냐? 그래서 이미 저들은 예수냐 바울이냐하는 논쟁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나 이상의 문제 때문에 저들의 업적을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 해서도 안 된다. 어떻게 드러난 사실을 낡은 교리적 개념 때문에 은폐할 것인가! 그러나 저들의 연구는 다음의 과제와 한계성을 드러냈다.

(4) 저들은 성서의 상황과 또 그것에 의해서 된 채색에만 관심했을 뿐 기독교의 메시지 자체의 주도성에 등한했다. 이것을 한 무대와 그 위에 선 배우로 비교한다면 그 무대와 그 배우의 이상이나 제스츄어와의 관계만 보았지 그 배우는 보이지 않는 각본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경시했다.

(5) 위와 관련된 것으로서 저들은 성서에서 기독교의 기본 메시지와 다른 종교간의 접촉에 이루어지는 현상만을 보았지 거기 해석자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전체적으로 부언한다면 저들은 밖에서 안으로 향했지 안에서 밖을 향하지 못했다. 그 안에는 해석자가 있다. 이 해석자의 입장에서 그 시대의 여러 요소들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안에서 밖을 보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제 앞에서 형성된 방법이 다음에 말할려는 양식적연구와 편집사적 연구다.

5. 양식사와 편집사적 연구
1) 양식사적 연구

계몽주의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전'에 도취했으나 종교사학파를 거쳐서 큰 암초에 부딪치게 됐다. 그 까닭은 첫째, 종교사적 연구는 예수를 근대의 예수에서 24년 전의 예수로 환원시키고 그와 24년 이후의 인간들과의 사이의 거리를 메꿀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가령 슈바이처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초자연적인 것이고 그의 윤리는 그 나라를 전제한 극한윤리(Interimsethik)라고 하므로 우리에게는 통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 그 예다.

둘째, 1901년에 브레데(W. Wrede)가 마가복음 연구인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이라는 저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서 그는 마가복음은 결코 객관적 역사 서술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을 통한 예수의 삶의 보도이기 때문에 예수전을 위한 자료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셋째, 1903-1906에 벨하우젠(J. Wellhausen)이 그의 복음서 주석에서 브레데의 연구를 구체적으로 규명한 결과 복음서는 결코 한 번에 서술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출처의 단편적인 자료들을 수집해서 예수의 생과 결부시켜서 연결시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러한 사실들이 드러난 마당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성서는 그저 하나의 과거의 유물로서 분석해 본 것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그것과 현재의 인간과의 어떤 관련성을 모색할 것인가? 이러한 막 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연구로써 등장한 것이 양식사적 방법이다. 양식사적 연구는 구약학자 군켈 등이 시작했는데 신약연구에 그것을 적용한 대표적인 선구자들은 슈미트(K.L. Schmidt), 디벨리우스(M. Dibelius), 불트만(R. Bultmann)이다.

이들의 과제는 벨하우젠 등의 연구 결과에서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복음서 분석에서 발견된 복음기자들의 편집에서 이미 있던 전승자료를 분리시킴으로써 거기서 비록 단편적이나마 역사의 예수를 발견할 거점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집구와 원전승을 철저히 가려내야 하며 그것을 가려 내기 위해서는 처음 교회를 지배한 신앙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들 정황을 밝혀야 했다. 그것은 또한 복음서가 어떻게 전승 형성됐나하는 역사적인 추구가 될 수밖에 없다.

슈미트는 그의 『예수사의 틀』(Der Rahmen der geschichte Jesu, 1919)에서 예수사의 줄거리와 전승자료를 분리했다. 그는 거기서 마가의 구성은 결코 예수의 생애의 과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으며 그 편집자료로 연대적인 배열이 아니라 그 내용이나 양식에 따라 분류했음을 밝혔다. 가령 2-3장은 예수와 반대자들과의 논쟁을, 4장은 비유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은 것이다. 또 마가는 시간 장소 같은 것을 전혀 명확히 연결시키지 않았다. 가령 "그가 회당에서 나와" "그는 다시 바다로" 등과 같은 접속구들이 많이 나오는데 언제 들어 갔으며 어디에서와 같은 연관이 없다. 그는 계속 "그리고"를 쓰나 그것이 어떤 일 다음인지 알 수 없는 것 등이 그 예다. 따라서 그는 이 모든 접속구들은 복음기자의 소관이라고 했다. 그런데 슈미트는 전승 자료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그 전승자료들이 그대로 보존됐는지 아니면 마가에서 변동이 생기지 않았는지를 계속 추구하므로 그 전승자료의 전승과정을 밝힌 것이 디벨리우스와 불트만이다.

디벨리우스는 『복음서 양식사』(Die Formgeshichte des Evangeliums, 1916), 불트만은 『공관서 전승사』(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1921, 허혁 역, 『공관복음전승사』, 대한기독교서회 발행)에서 이 연구의 결과를 밝혔는데 두 사람의 관점은 약간씩 다르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혀냈다. 첫째, 복음서에 편재한 전승자료들은 그 유형과 의식에 있어서 일정한 공통의 법칙이 있다. 둘째, 마태, 누가를 마가와 비교하면(불트만) 발전된 흔적이 보이는데 그것은 각복음서에 일정 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로써 마가에서 문출화(文出化)되기 이전에 그 전승자료의 형성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넷째,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이것이 형성됐나? 그것은 모체는 바로 처음의 교회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이다. 그 삶의 자리는 바로 부활을 믿는 처음 교회의 신앙의 증언이다. 물론 그 안에 역사의 예수의 사실이 내포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고 신앙을 매개로 해서 형성 전달됐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 안의 전승들은 예수의 삶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보도한 것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가 교회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이른바 '케리그마'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상에서 양식사적 연구의 출발과 그 착륙지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역사의 예수에 접근하려다가 결국 처음 교회의 '삶의 자리'에 착륙하고 만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예수를 찾아 떠났다가 초대교회의 설교 '케리그마'를 발견한 것이다.

2) 편집사적연구

양식사적 연구는 복음서의 편집적인 틀에서 전승자료들을 분류하고 그것을 또 분석 설명했다. 그러므로 복음서들을 분해했을 뿐 그 복음서들을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의미'와 그 뜻하는 바를 묻는 일을 하지 않았다. 즉 복음서들이 그 전승자료를 왜 그렇게 편집했으며 또 그 전승자료들을 약간씩 변동시켜야만 했는가하는 물음을 하지 않았다. 편집사적 연구는 바로 이러한 물음에서 복음서들의 특성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은 이미 브레데와 로마이어(E. Lohmeyer, Galiläa und Jerusalem, 1936) 등이 시도했는데 양식사적 연구의 뒤를 이어 본격화한 선구는 누가복음에 콘첼만(H. 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1954), 마가복음에 마르크센(W. Marxsen, Der Erangelist Markus, 1956), 마태복음에 보른캄(G. Bornkamm, Oberlieferung und Auslegung in Matthäus-Evangelium, 1960) 등이다.

이 연구는 전승의 단편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승사의 최종의 결정인 복음서 전체의 편집작업에서 드러난 신학을 묻는 것이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마가의 편집에서 나타난 특성은 처음 교회의 고백—가령 고린도전서 15장 3절 이하 또는 빌립보 2장 5절 이하 또 사도행전에 산재한 설교 등에서 볼 수 있는—과 같은 관련이 있다. 즉 그는 처음 교회의 고백에 따라서 전승자료를 편집하므로 그 고백을 분명히했다(불트만은 이미 복음서는 확대된 케리그마라고 했다). 마태는 마가와 다른 어록을 배합 편집함으로써 예수는 단순히 신앙 안에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과거)에 주시며 십자가와 부활의 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또한 현재의 스승이라는 사상을 나타낸다. 누가는 마가에서처럼 도래할 종말이 아니라 구원의 때인 오늘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를 나타낸다(이 두 연구방법이나 결론을 손쉽게 소개된 것은 E.R.Mcknight, What is Form Criticis m?; N. Perrin, What is Reduction Criticism?, Fortress Press).

편집사적 연구는 현금의 신약연구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므로 그 귀추가 주목되나 주목할 것은 양식사적 연구에서와 같이 복음서를 케리그마로서 취급하는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는 역사비평학적 방법을 배제하고 씌어진 성서 그대로를 읽는 옛 상태로 되돌아 간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연구는 역사적 비평-양식사적 비평연구의 결과를 받아서 진일보한 것이지 결코 그 연구결과를 배제하고 할 수는 없다.

이상에서 오늘까지의 성서연구의 과정을 일람했는데 이로써 볼 수 있는 것은 아직도 성서의 참 모습을 파악하기에는 요원한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정착지는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성서연구의 과정에서 얻어진 지식 없이는 성서의 참 연구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비록 자신이 이러한 연구를 거치지 못하더라도 이같은 연구의 테두리에서 쓴 주석서를 충분히 참고하지 않고는 성서의 뜻을 제대로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부터 이상과 같은 연구의 결과를 참작하면서 직접 본문을 취급하므로 그 본문에서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지 시도해 보기로 하겠다.

(『세계와 선교』 1971.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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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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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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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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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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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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