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한국에 있어서 우리들의 문제들을 단편적으로나마 서술하려고 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당면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우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다고 추측합니다.
저는 이 목적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최근에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으며 생각하게 하는 한 소설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이 소설은 한국 사람으로서 6ᆞ25전쟁 당시 장교로서 전쟁에 참여한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며 현재는 미국의 어떤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한국 사람이 영어로 쓴 것인데 그것이 주목을 받아 이미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는데 독일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독일 번역의 제목은 Der Martyer(순교자)로되어 있습니다. 이 저자는 제 자신 개인적으로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한국 전쟁 당시 서울은 네 번을 번갈아 가면서 두 세력에 점령되었습니다. 두 번은 북한의 인민군과 중국 공산군에 의해서이고 두 번은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서였습니다. 처음 공산군이 서울을 비롯한 남쪽의 일부만 남겨 놓고 거의 점령했다가 유엔군의 역습으로 퇴각했는데 그때 유엔군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으로 진격했습니다. 이 평양은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들어온 이후 1945년 즉, 2차대전 종결 때까지는 한국 그리스도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평양이 양측으로부터 공격의 중심이 되어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파괴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전쟁시의 평양이 이 소설의 중심 무대입니다.
1950년 10월에 평양에서 공산당이 열네 명의 목사를 체포했는데, 그 중의 열두 명은 총살당하고 나머지 두 명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한군의 정보기관으로부터 바로 이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라는 임무를 받은 이 대위가 평양에 주둔하고 순교자로 죽은 이 열두 명에 대한 정보를 캐고 있었습니다. 남한의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세계에 정확히 폭로함으로 공산군의 잔인성과 인간적인 비극을 선전하는 선전자료로 삼 으려 한 것입니다. 이 열두 명의 목사의 죽음이 구미 사람들에게 알려 져서 공산당에 대한 경고로, 다른 한편 한국 사람들에게 신앙의 용기를 줌으로 반공의식을 강화하는 소재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 대위는 이 사실을 선전 목적으로 과장하여 세상에 알릴의 도는 전혀 없고 일어난 사실 자체를 그대로 밝히려는 뜻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서 열두 목사가 교수형으로 처형된 직접 목격자인 살아남은 두 목사를 먼저 찾기로 한 것입니다.
특히 그 두 목사 중에 신 목사—그는 이 소설의 사실상의 주인공입니다—를 찾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두 사람 만이 교수형에서 제외되었을까? 저들은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동료들을 배신함으로 살아났나? 아니면 그들은 공산당과 비밀리에 내통할 약속을 했던 탓인가? 이 대위는 이런 생각들과 더불어 그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신 목사와 접촉을 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면담을 거부하는 신 목사는 자기 자신이 저들과 함께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증인이 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를 평소에 존중하던 많은 교회인들이 신 목사의 입을 통해서 용감하게 죽었을 열두 순교자에 대한 증언을 듣고자 그를 초청했습니다. 수 많은 청중들 앞에 선 그는 이 대위에게 말한 것과 전혀 다른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열두 목사는 신앙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영웅적인 투쟁을 하다가 순교자로 장렬한 최후를 마친 것을 목도했다고 했으며 자기만은 비겁해서 신앙을 거부하고 항복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동료 목사들과 그를 평소에 존경하던 평양 안의 모든 신도들이 그에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저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러 이 배신자야, 이유다야 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를 죽여 버릴 것 같은 험악한 사태를 빛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 열 두 순교자를 기념하는 추도 예배가 주최되었습니다. 저들은 비록 신 목사 자신을 경멸했으나 모든 대중 앞에 그 순교자들의 용감성을 재확인하고 싶어 그를 다시 강단에 세웠습니다. 이렇게 나선 그는 전과 달리 온갖 정열을 쏟아 저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들의 회개가 얼마나 중요하며 이 순교자들의 죽음이 우리의 시들어 가는 신앙을 살리는 활력소라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그후부터 그는 곳곳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이와같은 증인으로서의 역설로 실의에 빠진 평양의 그리스도 인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 목사는 회개한 가롯 유다, 회개한 배신자라는 입장에서 새로운 운동을 일으킨 셈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인민군이 많이 체포된 중에 신 목사들을 체포, 고문, 처형까지 한 지휘자인 한 소령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증인이 나타난 셈입니다. 그는 신문과정에서 신 목사의 말과 전혀 다른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열두 목사는 그들의 죽음 앞에 그토록 비겁하고 졸렬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기독교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금까지 선전했던 신까지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오직 신 목사만이 끝까지 자기 신념으로 일관했으며, 고문하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항했다는 것입니다. 즉 신 목사만이 끝끝내 그의 주장과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그의 늠름한 자세에 감동되어 이 공산당 소령은 그를 다시 감옥으로 후송했다가 후에 역전될 때에 그를 석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대위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신 목사를 단선적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면 그의 용감함을 존경하는 심정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사람들을 거짓말로 용기를 북돋으려고 할 수가 있느냐는 생각은 그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동시에 그에게는 신 목사의 행태에서 진리란 무엇이냐라는 빌라도의 물음을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신 목사는 계속 거짓으로 폐허상태에서 실의에 빠진 저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했으니까요. 그는 여러 차례로 신 목사와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 목사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소위 진리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광대놀이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이 대위에게 또 하나의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 목사는 또 한걸음을 나가서 그 자신이 비록 목사이지만 아직도 구도자의 위치에 있지 지금까지도 신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열둘이 처형될 때 그와 더불어 나은 젊은 목사가 고민 속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은 피안의 구원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그를 고민에서 풀어주려고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이 젊은 목사는 정신이상이 되어서 처형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는 평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침묵하기로 결심했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이 이 모순 속에 가득한 고뇌의 현장에서 하느님을 찾는 저들에게 어떤 대답을 주려고 했으나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람들의 순진한 신앙을 흔들어버릴 마음은 없었고 어떤 환상을 주어서라도 강하게 해 주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으로 만이 이 고뇌에 찬 삶, 의미 없이 계속되는 죽음의 현장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위는 그의 진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회의는 깊어만 갔습니다. 그때에 중공 의용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므로 다시 남한군은 평양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동행할 것을 거듭 설득해 보았으나 아무 성과가 없이 그를 평양에 남겨두고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신 목사는 평양에 남은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다시 공산정권 지배 아래의 평양에 남았습니다. 그 후 38도선이 그어진 채 휴전 상태에 있게 된 후에 그를 알던, 그리고 남쪽으로 피난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에 대한 풍문이 단편적으로 들려왔습니다. 그는 공산당원에게 죽었으나 계속 이곳 저곳에 나타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늦게 피난 온 사람들이 전하는 말이었습니다.
구미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신 없는 성자라고 합니다. 까닭은 그가 신에게 아무런 응답도 듣지 못했으면서도 인간을 위해 자기를 희생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은 어디까지나 구미적 해석이지 사실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 목사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같은 덧없는 고통을 허용하는 데는 하느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서구화된 것입니다. 그는 신을 한 이론적 체계 안에서 파악하려고 합니다. 즉 언어화하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도 안에 내포된 신 이해는 아시아에는 없습니다. 신 목사를 괴롭힌 신에 대한 부름의 양식은 오직 그의 서구적—그리스도교적 교육의 소산입니다. 그가 신을 이해하는 시도는 엄격한 인과적 사고체계입니다. 그는 한국 전쟁에서 수난에 직면하여 하느님은 철저히 해롭거나 아니면 없다라는 양자택일의 서구적 논리에 쫓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적 사고가 그로 하여금 신을 부정하는 데로 몰고 간 것입니다.
불교나 도교적 사고에서는 이같은 양자택일적 사고, 이런 물음은 부상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좀 더 밝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불교적 인식에 따르면 참 현실은 공(sunyata)입니다. 불교도는 우리의 진정한 현실 즉, 우리의 경험에 근거한 범위 안의 모든 것은 우연이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우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공(空)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며 그것은 바로 니르바나에서의 입문입니다. 불교에서도 가시적 세상에 궁극적인 것은 없다고 봅니다. 현실을 공으로 인식하는 것은 바로 그것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니르바나란 모든 기존의 것에서의 탈구조화이며 공에의 도달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교도에게 그에게 신은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당신은 무신론자냐고 묻는다면 그는 이를 부정할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논쟁을 시도하면 그는 침묵할 것입니다. 이렇게 묻는 사람은 공으로서의 현실의 이해가 바로 이 공을 궁극적 현실로 긍정하고 있음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도교도 현실을 무(Nichts)로 파악합니다. 이로써 모든 기준의 것, 가시적인 것, 규정할 수 있는 것, 개념들, 구조들의 의미를 상대화해 버립니다. 이래서 불교나 도교나 결국 존재적 침묵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묵은 결코 어떤 소극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Etwas)에의 총체 신뢰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나'와 모든 것(all)이 하나가 되는 것이 참 삶의 시작입니다.
서구 그리스도교는 이에 대해서 신을 '충만'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신으로부터 한 완전한 그리고 분명한 대답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 반응이 없는 무(無) 앞에서 절망선 상에 서게 됐습니다. 이 절망은 바로 그의 서구적 사고의 결과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목사는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나의 해석은 신 목사는 서구적 신의 표상을 아시아적으로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까닭은 그는 신이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고난에 있다, 그 자신이 수난하고 있다, 신은 이 현실 밖에 존재하므로 어떤 설명이나 대답을 기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신 앞에서는 사람은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입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거나 기도가 바로 침묵이든지.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는 이러한 물음을 서구적 신학의 설명의 도움으로 대답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물음 자체를 시정해야 하는 시점에 왔습니다. 이 경우에 먼저 위에서 스케치한 전통적, 아시아적 사고가 성서에 부합되는가, 성서는 어쩌면 서구적 사고 형식만 용납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단순한 눈으로 읽으면 어떤 말에 담을 수 없는 현실을 만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앞서 십자가에서 죽음당하는 예수의 처형의 현장이 떠오릅니다. 예수가 그 수난과정에서 결국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요? 이것은 말로 담아서는 안 되는 어떤 현실을 제시한 게 아닐까요? 바로 십자가상의 예수에서 서구전통의 신표상은 불가능한 것임을 이미 제시한 것이 아닐까요? 나에게는 부활 보도를 한 처음의 복음인 마르코복음에서 예수의 부활을 언어화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빈 것'만 말하는 것은 뜻이 더 깊은 데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르코복음의 경우 마지막 구절은 "여인들은 놀라 정신없이 무덤에서 나와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워서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16:8). 서구 신학은 '무서워서'는 거룩한 것 앞에서의 경외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런 설명보다는 이 여인들은 언어화할 수 없는 현실 경험을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서구 신학이 부활사건을 언어화하고 조직화해 보려는 지금까지의 시도는 잘못된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본대로는 예수는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어떤 정의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신, 그의 나라, 사랑, 은총 등등 예수는 아주 중요한 장면, 가령 '죄인' 들과 더불어 지날 때 별다른 해명 따위는 안했습니다. 특히 그때 유대교에서 이미 고정화된 교리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었고 그저 그들과 거기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가 설교한 경우는 물론 보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를 보면 그는 개념화하거나 더욱이 신학화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바울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합니다. 이것은 그가 직면한 현실은 '말에 담을 수 없는 어떤'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없을까요? 그 현실은 바로 존재적 침묵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상의 간단한 스케치로서 제가 말하려는 것은 지금까지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은 너무도 일방적인 측면에서만 찾은 것이 아닌지, 그것은 서구적 요망인 개념화ᆞ조직화에의 욕구에서 나온 과오가 아닌지? 우리가 만일 예수에서 침묵하는 측면, 말로 담지 못하는 측면에 주목한다면 어떤 아주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현실을 신학화했습니다. 즉 조직화했으며 언어화했습니다. 가장 전형적 예가 그의 예수의 십자가 해석입니다. 희랍세계에서는 모든 진리는 표상될 수 있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잊지 않고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말씀"은 거리낌, 논리적 거리낌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여간 진리란 아시아인에게는 공, 무, sunyata 그러므로 침묵 속에서 인식됩니다. 바로 그런 탓에 바울이 "말로 다할 수 없는 말"이라는 말(고후 12:4)에 관심을 갖습니다. 비밀스러운 그의 말, 서구 신학이 단순히 "신비"라는 말로 싸서 소화시키려하지 않는 많은 그의 말 들에 관심합니다(가령 그의 말중 "en chainto" 따위).
성서에는 분명히 양면이 있습니다. 말로 할 수 있는 것, 말에 담을 수 없는 것, 표상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 말함과 침묵, 은혜의 충만(요 1:14, 16)과 비움(공)(빌 2:7) 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바로 가시적 언어화할 수 있는 찬 것 등에 지나치게 관심했기에 일방성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 속에서 무(無)나 공(空)을 내세우는 아시아적 전통에서 어떤 새로운 돌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968, 「독일교역자대회」에서 한 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