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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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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선된 역사

선생님! 최근 태연하려고 해도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는 문제들이 마음을 괴롭혀 이 붓을 들었습니다. 이 문제들은 주로 선생님이 제기한 것들이며 제게 고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격이 사담(私談)에 그칠 문제가 아니라 공적 성격을 지닌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어떤 정론(定論)할 만한 확신이 없기에 선생님과 대담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붓을 들고도 드릴 말씀을 미리 정리한 바가 없이 붓에 제 마음을 맡길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숨쉼과 가장 가까운 속알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소 무책임한 표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민중의 깨우침과 역사의 진보

"역사는 또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것이 선생님의 사관(史觀)을 집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러신지 모르지만, 그것이 적중했다면 선생님은 근본적으로 낙관론자십니다. 역사가 앞으로 나갔다고 하는 것은 목적론적 역사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야 앞으로 나갔는지 뒤로 후퇴했는지 알 길이 없지요. 그런데 목적론적 역사관은 그 종말을 전제하며 그 종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변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역사 과정을 가려보고 비판하고 시비하는 데서 내실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역사를 계급 투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하는 경우 그 역사의 종국은 계급 없는 사회를 유토피아로 설정한 것일 수밖에 없듯이, 역사 발전을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선생님의 역사관이 세 단계로 변천되어왔다고 보는데요, 잘못 됐으면 지적을 받고 싶습니다. 첫 단계는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의 단순화된 입장을 전제하고 그 과정에 의해서 그리스도교 도그마적 고집에서 탈출하여 가능한 대로 합리적 내지 과학적으로 관찰하려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숙적인 양 거부했을 진화론 따위를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교인들만의 구원이라는 게토적 사관에서 탈출해서, 인류의 구원에로 눈을 돌린 것은 선구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쓰신 30대의 사관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교적 신관의 승화로 인해 달라진 사관입니다. "성서적 입장"이란 말 대신 "뜻으로 본"으로 바꾼 것이 이런 전환점을 구체적으로 노출한 것이라고 봅니다. 전 같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을 텐데 단순히 "뜻"이라고 한 데는 이른바 그리스도교적 신관에서의 탈출 선언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뜻으로 본"이란 뜻이 대단히 아리송합니다. 선생님은 뜻이 곧 해석자의 뜻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해석자로서의 내가 그 뜻과 통합니다. "주관(主觀)의 주(主)는 누구의 나에게도 통할 수 있는 참 나"라는 전제에서 역사는 주관의 렌즈를 통해 해석돼야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는 "여럿이 가운데서 될수록 하나인 것을 찾아보자는 맘, 변하는 가운데서 될수록 변하지 않는 것을 보자는 맘,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될수록 무슨 차례를 찾아보자는 맘, 하나를 찾는 마음, 그것이 뜻이란 것이다"라고 하신 표현에는 "XX을 찾는 마음"이 곧 뜻이라는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위의 표현에는 벌써 "하나" "불변의 것" "차례" 같은 것이 전제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찾으려는 "그 뜻"이라고 해석됩니다. 또 다른 예로서 "세계의 끝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을 붙잡게 해주는 어떤 분명한 주장을 갖는, 말씀을 갖는 역사"라는 말씀에는 "세계의 끝의 밑을 흐르고 있는 정신"과 그것을 "붙잡게 해주는 역사 해석자"가 연결돼 있습니다. 또는 "이 우주는 자연 발생적으로 된 것도 아니요,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은 절대 가치의 본체요, 그것을 아는 것이 뜻이요, 그 뜻의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이 역사다" 하는 경우 역사의 주체가 하나님의 뜻인지 그것을 파지하는 사람의 뜻인지 아리송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아리송한 데서 달라지는 선생님의 사관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나 있은 다음에 너 있다는 식으로, 신이 있고 그리고 인간이 있다는 식의 생각이든지 신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그 초월성만 주장하므로 인간과 단절시키는 따위의 신관을 지양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것은 신이 따로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 자연 안에, 그리고 역사 안에 있다는 신념이 점점 강해진 증거로 보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배타적으로 자신의 것과 구별하는 범신론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신관은 역사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게 되지요. 가령 자연의 진화를 신의 뜻의 전개로 보게 되고 신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발전한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래서 선생님은 진화론에 심취했으며 또 역사에 대해 낙관하신 것으로 압니다.

이 단계는 서구 계몽주의와 그 사고 패턴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계몽주의에 있어선 인격과 역사에 대한 낙관이 그 중추였으니까요.

그 다음으로 세 번째 단계가 씨알의 발견과 더불어 전개됐다고 봅니다. 씨알은 역사의 주체입니다. 씨알을 영어로 '피플'(people)이라고 번역했으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영어의 피플은 정치 사회적 규정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피플의 고어의 뜻은 지배 계층에 상반되는 피지배층을 뜻했는데, 어떤 가치도 없다는 의미에서 사용됐습니다. 그런데 현금의 피플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그 결정권을 갖는다는 뜻으로 승화됐습니다. 이 개념은 자유 시민이라는 유럽적 유산을 받았습니다. 게르만-라틴어인 부르주아 또는 뷔르거(Bürger)란 성(城)에 속한 사람, 즉 시에 속한 사람으로서 봉건주의로부터 탈출하여 시에 소속됨으로써 자유해진 자를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면적인 계층 표시뿐입니다. 이에 반해서 일어선 프롤레타리아도 역시 꼭 같이 정치 사회적 개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씨알을 우주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 평면에 등장하면 정치 사회적 계층이나 "뜻"의 차원에서 볼 때는 그것은 모든 것의 바탕(바탈)입니다. 그리스적으로 말하면 대우주에 대해 소우주입니다. 그것은 다수이나 그 안에 '하나'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므로 씨알에서 영원과 역사를, 하나님과 인간을 종합하려 합니다. 정(靜)과 동(動)이 그 안에 있습니다. 동하면 반항하는 민중이 되고 정하면 "뜻"이 됩니다. 이 다수가 하나 되고 동이 정이 되는 과정이 역사의 진전이라고 하겠지요. 즉, 민중이 깨야, 그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뜻을 깨우쳐야, 바꾸어 말하면 뜻을 깨쳐야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지요. 민주주의가 정말 씨알이 주인되는 제도라면 "역사는 앞으로 나간다"라는 입장에서 볼 때 필연적인 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격류에서 이는 물거품

제가 묻고 싶었던 것은 극히 간단한데 좀 옆으로 나갔다 되돌아와야 하겠습니다. 제게 큰 의문은 정말 역사는 또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는 것이 사실이냐 하는 것입니다.

1970년대 후반은 세계의 독재자들이 물러나는 해로서 우리 나라 신문에서도 그들을 열거하여 기억을 환기시킨 일이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역사의 방향은 제 길로 간다고 하겠는데 이란의 팔레비의 38년 학정이 민중 봉기로 쫓겨났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부와 그리고 비밀 경찰로 된 체제도 민중 앞에는 그렇게 무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내쫓고 들어선 호메이니는 아무리 선의로 지켜보려고 해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팔레비 정권에 대해서 그리고 그를 내세워 착취를 계속한 미국에 대한 그의 분노가 자주적 체제화로 집력(集力)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현대화라는 이름 아래 윤리나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단축한다고 보기에 정신 우위 운동이 절실하다는 점에서 이슬람교 정신의 르네상스를 꾀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재를 축출하기 위해 싸운 자가 더 무서운 독재를 하되 비법적으로 하고, 인간을 위하고 참윤리를 위한다는 것이 그토록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하며, 일반 인도주의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수단을 서슴없이 하되 종교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전환기는 아무렇게나 넘어가서 안되는 것은 저도 잘 알 뿐 아니라 신념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사랑을 말하는 종교라도 정의에게 결재되지 않은 사랑은 주장되는 것만큼 심판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사랑의 신이며 분노의 신이라는 야누스적 야훼의 얼굴은 필요불가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을 내세운 호메이니 파는 증오에만 불타 있으며 이슬람적 국수주의의 화신 같습니다. 부정 부패에 대한 분노에 찬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런 작태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전환기는 그래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긴 역사에서 배운 것은 칼을 뽑아 세력을 잡는 자는 칼을 뽑은 채로만 집권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며, 제가 뽑은 칼을 제 손으로 도로 칼집에 꽂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호메이니는 결코 제 손으로 그 칼을 도로 꽂지는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구체적 증거를 바로 공산혁명의 종주 세력인 소련에서 봅니다.

러시아가 폭력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한 지도 6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공산 사회가 내건 유토피아는 고사하고 그때 뺀 칼을 꽂지 못하고 계속 그 칼로 위협하고 숙청하면서 독제 체제를 이끌고 왔습니다. 이것이 공산세계에로의 과정이 아님은 그들 자신이 자백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타락이 바로 사유 재산제라고 한 그들이 지금은 점차로 사유 재산권의 폭을 넓혀가고 있으며 그들이 반발의 발판으로 했을 자본주의 사회의 바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빙의 징조처럼 긍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은 어처구니없는 오판입니다. 저들은 자주와 민주를 위해 봉기한 헝가리와 동독을 탱크를 앞세워 진멸한 일이 있어 세계인의 분노를 샀는데, 이번에는 아프가니스탄에 꼭 같은 모양으로 진격해 들어와서 제3세계전쟁의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들의 팽창주의야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서도 충분히 노출됐었지요.

이에 대해서 이슬람교국들 모두가 맞싸울 움직임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국들이 맞서기 위해 분주하게 서두르는 판에 이란의 납치사건 따위는 발가락 한번 남에게 밟혔던 것같이 희미하고 작은 일로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상태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작태를 보면서 묻게 됩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희망이 있는 종족인지요? 이른바 교육이니 경험이니 합리적이니 따위가 인간성에 바탕을 두고 날로 발전한다는 전제라면 적어도 수천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경험한 것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며 나아진 것이 무엇입니까!

눈을 안으로 돌려서 현재 우리 땅에서 되어지는 작태를 보면 이 같은 의문은 더욱 심화됩니다. 선생님은 언제인가 지금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거야 뭐 격류에서 이는 물거품이지"라고 했습니다. 흘러내리는 물은 못 막는다는 신념의 토로였습니다. 정말 국내 외의 어처구니없는 작태가 돌에 부딪쳐 생기는 정도의 역반응의 현상으로서의 물거품이고 우리가 이른바 대세라고 믿는 것이 물줄기일까요?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는 확신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회의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폭력주의

선생님이 생의 목표로 내세운 평화주의도 위의 신념이 있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평화니 화해니 총화니 따위의 표어(슬로건)가 얼마나 자주 위장의 도구 역할을 했습니까? 이런 주장은 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뺏기고 소외된 계층만이 할 수 있고 그럴 때만 진짜일 것입니다. 마음대로 억누르고 뜯어먹고 짓밟으면서 불의의 성벽을 구축하면서 평화니 화해니를 내세우면 그 저의는 기득권을 정당화하고 수호하려는 간계일 따름입니다. 참 평화주의자는 그러므로 '약한 강자' '비겁한 용사' '눌려 있는 주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대영제국 치하에 눌린 간디, 백인의 노예 출신 루터 킹 등이 이끄는 인도인이나 흑인은 그럴 권리가 있었고 또 진짜였습니다. 그러나 가령 미국 백인들이 인디언에게, 러시아가 현재 상태로 있으면서 아프가니스탄에게 평화니 화해니를 주장한다면, 평화주의에 똥칠하는 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국민총화 등을 주장할 자격도 어디까지나 억눌리고 빼앗긴 피지배층의 국민에게서 나와야 호소력이 있지, 법을 넘어선 절대 통치권으로 국민 감정에 못을 박고, 한이 귀신 이 되어 밤잠을 뒤숭숭하게 할 판국을 그대로 두고 국민총화를 내세울 때, 곧이 들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평화주의에 수반되는 것은 폭력에 대한 반대입니다. 이 점에서 선생님은 간디를 전폭 지지하시고 계십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한 평화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악순환을 정지시키려면 어느 단계에서든 "칼에는 칼로" "이에는 이로"라는 순서를 뛰어 넘을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폭력을 누가 행사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 폭력이냐라는 문제도 되겠습니다. 법에서도 정당방위 행위를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지만, 폭력이란 다른 선택의 길이 있는데도 힘을 행사할 때를 일컫는 것이지 생존권 방어 외에 다른 길이 없을 때, 주먹이나 무엇을 휘두른 것을 폭력이라고 한다면 비폭력주의란 약육강식의 현실을 방조하는 것밖에 의미가 없습니다. 폭력은 원칙적으로 강자, 구체적으로는 집권자 등에게만 가능합니다. 법에 없는 권한 행사, 비록 법을 따른 것이더라도 그 법이 폭력 행위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아직 세계에 만연되고 있으며 우리는 몸으로 체험해 왔습니다. 따라서 비폭력 주장도 강자나 기득권자가 해서는 안 됩니다.

정권을 통째로 폭력으로 뺏고, 살기 위해 남의 물건을 흉기로 위협한 송사리떼 폭력배를 처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음거리입니까! 국가 안정은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폭력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폭력을 행사해서 권좌에 앉은 것이 비폭력을 말하고 안정 제일주의를 주장해 봐야 효력이 없습니다. 까닭은 그 위장의 꼬리가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비폭력은 바로 폭력에 의해 희생된 자들만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럴 때 그것이 호소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가령 보복을 하지 말라는 호소 등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폭력과 저항 또는 비판 행위 사이의 한계선이 어디까지인지가 문제입니다. 선생님은 자유당 때, 그리고 군사 쿠데타 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판 정신의 상징이셨습니다. 서릿발 같은 폭력 앞에서 깊은 침묵을 깨고 필인(筆刃)을 휘두른 것은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결과 폭력 앞에 치욕적인 고배를 마셨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는 가정 아래서도 비폭력주의가 호소력이 있을까요? 비판하는 말도 제한되고 비판 의사의 전달의 길이 막힐 때 결과적으로 폭력적 폭발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그것은 누구도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런 위험의 길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 비판이나 저항의 어떤 행위도 그만둬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니 정치를 얘기한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기만이며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수난당한 사람들과 살며 또 자신들도 그 축에 속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중에 누가 평화나 비폭력을 강조하면 청중은 노골적으로 저항감을 나타내는 것이 현재까지의 진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난자들 앞에 서면 되도록 강경하고 선동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된다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는 정황이었습니다. 이게 지금까지의 어려운 점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변칙적 처리 앞에 희생된 자들이기에 원칙론에 저항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원칙이란 궤도에 돌아가는 발길을 누구든 옮겨야 합니다. 바로 이런 교차점에 "간디 같은 이의 죽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비판적 저항과 비폭력이 몰고가는 데는 수난의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우리에게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던 폭력의 과정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집권자들은 그럴 수 있는 요인 제거에 아주 인색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의로운 자의 수난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법의 참 정신

정국이 폭력적인 상태로 발전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새 헌법을 마련하고 '국민적 합의'에 의한 정권 이양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야당이나 재야 세력의 주장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유신헌법을 버리고 새 헌법을 만든다는 데 이론이 없는 것 같고, 그것만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해괴한 현상이 연속되고 있습니다. 유신 헌법을 폐기하는 데는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며 새 헌법 마련하는 발언에서 대통령 직권을 축소하자는 견해가 압도적인데도 왜 유신 체제를 없애야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축도 없고, 또 허락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눈감고 아웅하는 격입니다. 다 알고 공감하는 것이며 또 지나간 사실이면 왜 그것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반성할 틈이 주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눈 감고 아웅하는 분위기는 국민 합의의 길을 저해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거듭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아라"(Forgive, but not forget)란 어떤 이의 말을 반복합니다. 용서는 할 수 있어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그리고 잊지 않음으로써 그런 과오를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는 유신 체제의 모순을 분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주어져야 합니다. 그 당시 권력에 밀착됐던 사람들이 간간 "지난날의 잘못" 운운을 애매한 맥락 속에 비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과거를 다 밝히면 계속 집권에 지장이 오리라고 생각해서일까요? 그러나 어리석은 소행입니다. 국민을 납득시켜 집권을 하겠다는 사람이면 국민을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국민이 그렇게 어물쩍 넘어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렇게 넘어가기에는 뼈에 사무친 한에 찬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직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는 마당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는 격언에서 비치듯이, 바르고 성실하게 잘못한 것을 승인하면 다 용서할 줄 아는 국민성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간디를 스스로 잘못했다는 말을 깨끗하게 누구에게나 할 수 있어 위대하다고 했습니다만,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이면 잘못 없음을 기대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국민의 심판을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 비판을 못하면 당한 사람들이라도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허락돼야 정치 발전이니 뭐니 가능한데, 그것을 꽉 막은 채 정치 발전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헌법 청문회니 뭐니를 가져도 결국 듣고 싶은 것만 듣겠다는 것 이상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선생님이 어떤 반응을 하실지 눈에 뵈는 것 같습니다. "난 정치는 싫어. 정치가 다 망치는데!" 선생님의 정치에 대한 불신 감정은 우리 국민들의 감정과 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저 싫다고만 해서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까닭은 정치가 사실상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 어느 구석에도 침투하지 않는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그렇게 화나게 해서 본래의 길에서 보면 외도한 듯한 삶으로 유도한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가 한 일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많은 재야인들처럼 "나야 인권을 위해 싸웠지 무슨 정치"라고 하실 것이고, 그게 사실이기도 하나 결과적으로는 정치 행위가 됐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 요술입니다. 이쪽의 소박한 행위를 정치적으로 규정하고 벌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현재도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해도 언론와 자유가 절실하니까 또 정치적 행위로 규정받을 행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이제 이루어질 헌법에 대해서도 무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벌써 여러 가지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저는 그런 모임에 단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만, 비록 그 면에 문외한이지만 요점은 짐작할 정도입니다. 이해 관계에 있는 집단은 집권 가능성을 표준으로 헌정 질서를 생각하고 있음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은 법에 대한 기본 입장입니다. 법이 왜 필요합니까? 현대법의 시범으로 마그나카르타를 듭니다만, 그것은 왕 스스로가 왕권의 제한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법이란 집권자가 다스리기 위한 도구로 알고 권력의 유지를 위한 법을 계속 만들려는 태도가 벌써 범법적입니다. 법은 어디까지나 집권자의 권력 행사를 제동하는 장치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수난의 원인이 권력 남용에서 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땅 위에 독재가 설자리가 벌써 영원히 사라져야 했을 터인데, 아직까지 법 자체의 제정 근거마저 불투명한 상태에 있음을 보면, 인간이 발전해서 지혜로와진다거나 선이 악을 추방하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전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는 삼권분립이 아니라 그것에 더해서 노동권과 언론권 등이 절대 자유화하는 등으로 분권이 확산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법정신이 성서에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선 어떤 우상도 거부한 것은 종교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의 금령입니다. 우상이란 상대적인 것이 절대를 주장하는 일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옛날 종교 우위 시대에는 어떤 신조가 그랬고 이데올로기 우위 시대에는 이데올로기가, 그리고 오늘 같은 정치 우위 시대에는 권력이 바로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구약 계율의 근간을 이룬 십계명에 야훼 신 외에 무엇에도 예배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모두 인간을 노예로 할 수 있는 날조된 절대권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금령은 야훼신의 명령으로 돼 있습니다. 그는 전능한 창조자로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이 인간과 계약을 맺은 것이 법(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계약을 했다면 신 자체가 자승자박하므로 인간을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했다는 뜻인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법정신입니다. 법은 전능한 신이 그 전권을 제삼의 장치에 의해 제한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금에 와서는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법이란 집권자가 내린 선물이 아니라 국민 편에서 수권자가 월권하지 못하도록하는 제재 장치입니다.

이러한 법의 기본 정신 아래 구체화된 법의 내용을 보면 그 정신을 구현한 필연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약의 법전으로서 「계약의 법전」(출 20, 22, 23), 「신명기 법전」(신 12-26), 「레위 법전」(레 17-26) 등이 있는데 그것들은 주전 12세기 내지 6세기로 소급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어느 것을 보나 모두 눌리고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자는 데 초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법으로 묶을 대상은 부자강자의 횡포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아는 가장 오랜 「함무라비법전」도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법이 오히려 약자나 가난한 자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얽어매는 올무의 구실을 하게 된 것에 참을 수 없어, 그 법의 그물을 찢고 그것에 걸린 민중을 건진 것이 예수의 행각 중에 중요한 부분으로 부각됐습니다. 법과 싸워야하는 이유는 실은 법 자체 때문이 아니라 법을 운영하는 자와 싸우는 것입니다. 저는 동양에도 이런 법정신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붓에 마음을 맡겨 쓰다 보니 속없는 긴 사설이 된 듯도 하고, 점점 대화가 아니고 제 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것을 느껴서 아직도 두세 가지 더 드리고 싶은 문제가 머리에 떠오르나 그만 줄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부각된 문제 제기가 선생님이 직접 풀어주시는 계기로 주어진다면 크게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씨알의 소리』 1980. 12 신년호/『옳은 민족 옳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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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판권
 
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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