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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너희 중에 누가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찾으면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하여주시오, 내 잃었던 양을 찾았다오' 하고 말할 것이다(루가 15, 4~6; 마태 18, 12~13 참조).

이 이야기도 유목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야기 중에 농사짓는 이야기와 양 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그가 그러한 농경사회에서 성장하고 활동했다는 증거입니다. 아울러 그의 청중도 농부와 목동이 대부분임을 비춰줍니다. 이것은 도시에서 나서 도시생활에 젖은 사람과는 대조적인 것입니다.

도시는 인공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어 자신도 모르는 동안 자연과 멀어져가고 있으며, 따라서 하늘과 땅의 관계, 기후에 대해서도 등한해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것들만 보니까 사람의 기술에 압도당해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자연과 협력하여 생명을 창조하거나 지키는 농부들의 환희나 신비한 체험 따위는 아예 모르고 지냅니다.

예수 당시에도 팔레스틴은 이미 농경사회로 정착했는데도 목축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목동은 그때 유다 사회에서 천한 직업으로 간주하여 세인의 멸시를 받았는데도 예수가 목동 이야기를 소재로 자기의 뜻을 자주 밝힌 데는 특별한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비유를 빼고도 목동과 양의 관계를 인간을 향한 그의 심경을 묘사하는 데 적절하게 사용한 것도 볼 수 있습니다(요한 10, 1절 이하). 예수가 목동들의 생활이나 마음 씀씀이를 눈여겨보았다는 것은 당시 그의 관심이 민중에게 쏠리고 있었다는 하나의 실증이 될 것입니다.

당시에 목축하는 사람들이 소유한 양은 오늘날에 비해서 그 규모가 보잘것없었습니다. 적게는 20마리에서 100마리 정도였고, 100마리 정도 사육하면 목축업계에서 안정권에 들었고 그 정도면 자기 자신이 직접 사육할 수도 있으며 목동을 고용할 수도 있는 숫자입니다. 당시에는 실업자가 많은 탓에 아주 싼 임금으로 목동을 고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양이 100마리 이상을 넘어서 200마리 또는 300마리까지 되면 목동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300마리 넘는 양을 사육하는 사람이면 이미 중산층을 넘어선 부유한 농사꾼에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질문형식으로 된 것이 다른 이야기와 좀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비유'라고 하기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현장을 말하거나 구체적인 예를 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예수에게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명을 하는 대답으로서 이 역시 저들에게 자명한 관습을 상기시켜 그들의 회의가 자가당착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한 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루가 15, 4; 마태 18, 12)

예수는 이것을 양을 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당연한 행위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것이 예외적인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목동은 양과 늘 함께 살므로 양 하나하나에 정을 쏟기 때문에 양 한 마리라도 허수히 여기지 않고 그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예수의 질문에서 아무런 반론도 전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지적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그대로 수긍한 듯합니다. 바로 여기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거듭 주목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결과적으로는 양을 치는 것도 생계를 위한 수단이므로 상품으로 팔아버리거나 양을 잡아서 그 고기로 양식을 삼겠지만, 그 관계는 장사꾼이 상품을 대하는 것이나 기계공이 기계부품을 대하는 것과는 감정이 전혀 다르며, 양들을 단순히 하나의 상품으로만 보아 손익계산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목자의 심정에 큰 비중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내버려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맬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특수관계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인의 입장에서 계산을 하면 이런 모험은 불가능합니다. 이 이야기에는 현재 사고를 당하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에 대한 관심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억지로 그 양을 남에게 돌보아달라고 맡겼다거나 또는 맹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혹은 흩어져서 생명이 위협당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떤 울타리라도 만들어 보호해 놓고 떠났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면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허겁지겁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손익계산에 밝은 사람은 99대 1이라는 비율을 따져 이 목동의 처사를 미련하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는 목동은 물량계산을 생각하고 움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목자에게는 잃어버린 양이 백 마리 중에 하나가 아니라 지금 잃은 한 마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한 마리, 지금 당장 찾아서 보호하지 않으면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거나 맹수의 밥이 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 한 마리의 양입니다. 그러니 그가 비교하는 것은 99대 1이 아니라 현재까지 건재해 있는 것, 이제 막 사건이 일어난 것이고, 그는 후자를 결연히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계산적 사고에서 애정관계를 맺은 사람의 행위로 옮겨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결단에서 한 어머니를 연상해볼 수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피서를 나갔다고 합시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보이지 않을 경우 어머니는 그 아이가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익사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고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가 갔을 만한 곳으로 달음질을 할 것입니다. 이 순간 그 어머니는 남아 있는 네 아이들의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순간에 그 어머니는 4 : 1이라는 냉정한 계산 밑에서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 위기 앞에서 있는 아이, 사건이 일어난 아이, 순간도 지체해서는 안 되는 위기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아이만이 안중에 있기 때문에 네 아이를 생각할 사이도 없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이 어머니의 행동을 미련하게 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자식을 가진 어머니의 입장이라면 그런 행동이 충분히 이해될 것입니다.

마침내 이 목자는 위기에 처해 있었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그는 너무도 기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기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않겠느냐고 질문형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이렇게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떠나는 것은 어쩌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잃어버릴 수 있는 모험을 스스로 떠안은 것이며, 만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마저 못 찾는다면 자기가 가진 양 모두를 잃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모험입니다. 그가 장사꾼으로 잇속만 생각했다면 이런 모험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야기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계속되는 이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또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돌아온 목자는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을 거라고 합니다. 기쁨을 나눈다는 것은 당시의 표현으로는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드는 비용 역시 잃어버렸던 양의 값과는 비교할 수 없이 수월찮게 듭니다. 돈으로 따지자면 그 주인은 몇 배, 혹은 몇십 배의 손해를 보면서도 그 기쁨을 나누리라고 상상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 기쁨은 장사꾼의 기쁨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 계산의 차원을 넘어서 잃은 것을 찾았다, 죽은 것을 살렸다라는, 훨씬 높은 차원의 기쁨입니다.

이제 예수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미 대답은 나은 셈입니다만,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에도 실려 있습니다. 말투에는 약간 차이가 있고 루가에 비해 생략된 부분도 있습니다만, 같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두 복음서에 실린 이야기 중 루가의 것을 선택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루가와 마태오는 비록 같은 Q자료를 싣고 있으나, 어떤 경우에 이 이야기를 했는가 하는 위치 설정에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차이를 자세히 보면 같은 이야기라도 약간씩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마르코에 있는 이야기를 루가나 마태오가 실었을 경우나 Q자료를 루가나 마태오에 병행한 경우에는 언제나 그 이야기가 어떤 맥락에 자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성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통례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마다 이렇게 보다보면 주변의 것이 오히려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 것을 흐리게 하고 복잡하게 하기 때문에 피해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예를 들어 두 복음서의 이해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제대로 밝히는 데 있습니다. 마태오에는 이 이야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전제가 실려 있습니다. "너희가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뵙고 있기 때문이다"(10절). 그리고 이 이야기를 끝낸 다음에 덧붙여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작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길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14절)고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이처럼 앞뒤 말의 맥락에서 보면, 잃어버린 자란 결국 '작은 자'를 의미합니다. '작은 자'는 그 사회에서 이름도 없고, 지위도 없고, 볼품도 없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이른바 '무명(無名)의 사람'입니다.

관리의 세계로 생각한다면 사람이 거들떠보지 않는 음지의 더러운 곳을 소제하는 청소부에서부터 아무리 뼈빠지게 일을 하고 좋은 생각을 고안해 내어 기안을 올려도 자신의 이름은 상부에 보고되지도 않고 평가 한 번 못 받는 말단공무원 같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세계에서는 '작은 사람'으로서 멸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끝에 "길을 잃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자'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이란 정말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일까요? 사실 소외된 상태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계층적으로 규정된 상태를 말합니다. 저런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내버려두듯이 흠없는 모범적인 시민이나 집단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회원들을 도외시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루가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설정합니다. 그 상황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식사를 하고 있는 현장입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의 행태에서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식탁을 같이한다'는 것은 너와 나의 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다르면 같은 식탁에 앉지도 못합니다. 양반과 상놈이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러한 구체적인 예입니다. 한가족이라고 해도 온 식구가 같은 식탁에서 식사할 수 없는 것이 지난날의 우리의 관습이었는데 지금도 그러한 가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 안의 위계질서가 가져온 불행한 습성입니다. 즉, '식탁을 함께한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신분이나 계급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실증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같은 관습은 유다 사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습성은 새로운 공동체, 평등의 공동체인 그리스도교회에까지 침두되어 그것을 없애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가 유다 사람들이 철저히 소외시킨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릴 뿐만 아니라 식탁을 함께했다는 것은 유다 사회의 법도를 존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자신을 그들과 같은 무리로 격하시키거나 아니면 저들을 일반사람들과 같은 위치로 격상시킴으로써 사회질서를 교란시키는 범죄행위로 비쳤습니다. 바로 이런 장면을 본 바리사이파와 율사들이 예수를 걸고 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끝머리에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로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이란 루가대로 한다면 바로 죄인으로 치부된 사람 또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마태오에서의 '작은 자'와 루가에서의 '죄인'이라는 말은 꼭 상치된 것은 아닙니다. 죄인은 예의없이 작은 자, 즉 멸시의 대상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자는 전부 죄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비록 지은 죄는 없으나 신분상 천하게 태어났거나 배운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기피하는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또는 극히 가난한 사람들은 작은 자이기는 하지만 죄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로써 두 복음서의 이해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안에는 작은 자라는 말도, 특별히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작은 자를 값이 안 나가는 새끼 염소라거나 죄인에 비긴다면 주인의 말을 듣지 않고 이에 반항해서 다른 데로 뛰쳐나갔어야 할 텐데, 이 이야기에서 그런 암시는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단지 '잃었다'는 사건만 크게 부각될 뿐입니다. 그것은 맹수가 물고 가버린 경우일 수도 있고, 풀을 쫓아 헤매다가 양의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고, 힘에 부쳐서 어디선가 도중에 주저앉아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오히려 양의 잘못 보다 그를 지켜야 할 목동의 잘못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오나 루가의 이와 같은 풀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선 자리,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속한 교회의 상황이 반영된 까닭입니다. 아직도 그들이 속한 교회 안에 비천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풍조와 유다교에서 규정한 죄인들을 멸시하는 버릇을 그대로 답습하는 층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런 혼탁 속에서 헤어나는 길은 '잃어버린 양이 누구냐?'라는 것을 묻는데 그치지 말고, 바로 그 양을 찾아 떠난 목동에게로 옮겨가야 할 것입니다. 이 목동의 눈에는 작거나 잘못한 것이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어느 쪽에 있든지 지금 궁지에 빠져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잃어버린 양에게 온 관심이 몰려 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가 이 목동의 심정으로 민중을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자는 쉬지 않고 인(仁), 즉 사랑을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인자(仁者)는 어떤 아이가 우물에 빠졌다면 그대로 뛰어들어 그 아이를 건져내는 것이 옳으냐고 묻자 그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인(仁)이라고 해도 법도에 따라서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물에 빠진 그 아이를 건지는 일보다 사모관대를 한 군자의 체통을 지키는 순서를 밟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인'을 실천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예수의 이야기는 이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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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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