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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그런데 제도화된 그리스도교는 고난당하는 민중의 현장 속에 그리스도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는 신앙을 완전히 포기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서 점점 교회를 강조하게 되었고 마침내 신교는 말씀을 전할 때만, 말씀이 선포되어 그것을 듣고 받아들일 때만 그리스도가 현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또 하나는 성례전을 들 수 있는데, 성례전도 말씀으로 환원될 때 그리스도 현존의 사건이 일어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성찬식을 보면, 빵조각 하나와 포도주 한 모금을 마시면서 그리스도의 산 피와 살을 먹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잘못된 겁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너무도 힘이 드니까 도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종교의식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행해지는 자리,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에만 그리스도가 현존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이름도 모르고, 예수의 이름도 모르는 곳이라도 고난 당하는 민중의 현장에는 그리스도가 현존합니다. '말씀의 신학'이란 고난받는 민중의 현장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에요. 성경을 되풀이하거나 설교하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니라 고난받는 민중현장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현장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다고 말하는 게 우리의 할 일입니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i)의 작품에서 사람 같지도 않은 술주정뱅이들의 입을 통해서 진리를 쏟아놓듯이, 우리도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이 증거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고, 이 증거를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민중사건의 관찰자로서 증거한다면 그 증거가 참될 수 없겠고, 비록 바로 해석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증언'은 '순교'와 통합니다. 참 증언은 결국 민중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수난을 나누는 데서 예수의 사건을 또 일으키겠지요.

▶ 선생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받는 민중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그 증언자들이 꼭 우리들이겠는가, 과연 우리들이 그런 증언을 하는 사람들인가, 예를 들어 전태일이나 『섬진강』을 쓴 시인 김용택이 신학 하고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한 증언자가 아닌가 묻고 싶습니다.

그 말은 내 말과 별로 다를 바가 없어요.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한마디도 안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보고 "이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의 증언자들이다"라고 증거하는 것이 신학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들로서는 그 말을 해야 해요. 그게 바로 신학이 할 일입니다. 민중사실을 놓고 그저 서술하기만 하면 '민중론'에 그쳐요. 민중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됩니다. 그게 민중신학이지요.

▶ 선생님께 지금까지 주로 서구 그리스도론에 대한 비판,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중 그리스도론에 대해 말씀을 들었는데요, 서구 그리스도론은 그레꼬 로마의 신인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양성론으로 전개되었고, 유다교의 묵시문학적인 메시아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장차 올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렸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지만 성서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그레꼬 로마적인 산인의 모습이나 유다교의 메시아상과는 거리가 멀고 철저히 고난으로 점철된 삶이었고, 민중과 더불어 자신의 삶을 나누는 모습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는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죄인으로 보지도 않고, 그들의 죄를 대속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고 그들을 통해 인류 전체의 구원이 온다고 선언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또 선생님께서는 예수사건은 유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 민중의 현장 속에서 계속 분출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말씀과 성례전 안에 현존한다기보다 민중의 현장에 현존하고 있다, 민중현장에서 그리스도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고 신학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몇 분이 민중사실 내지 민중사건을 제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듣기로 하겠습니다.

<사례 1> 민중사건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현존을 만나야 한다면, 우선 이 땅의 농민 민중의 울부짖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이란 시집은 마치 구약성서의 시편이 하느님을 향한 탄원이듯이 오늘날 한국 농민의 하느님을 향한 탄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집에서 절규하는 문제들을 보면 먼저 생산비에 미달하는 농산물 수매가, 각종 세금, 농가부채가 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경작하는 땅의 60퍼센트가 소작지이고, 농가 호수의 46.4퍼센트가 소작농이며, 소작률은 50퍼센트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장폐수와 농약으로 인한 공해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선 농민들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생산비를 받아 내려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 운동이 좀더 심화발전되면 토지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될 터이지만, 지금은 분단상황 아래서 여러 가지 법률에 의해 이런 기본적인 요구마저 거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농민들의 제반 문제들이 『섬진강』이란 시집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시 한 편을 읽음으로써 오늘날 농민들과 같이 현존하면서 부르짖는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들어보려 합니다. 감 농사는 풍년이 들었으나 감값이 똥값이 된 농민들의 심정을 그린 「섬진강 20(감 傳)」, 농촌의 피나는 현실이 이 사회의 구조적인 결과임을 증언하면서 대외의존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라고」, 「밥값」등 여러 시들이 있으나 그 중에서 농촌을 떠나 이사하는 장면을 어둡고 지친 농민들의 모습과 함께 정감 있게 그린 「섬진강 16(이사)」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들은 저녁밥을 일찍 먹고 너나없이 모여들어 이삿짐을 꾸렸다. 거울 깨진 농짝 하나, 테 맨 장독 몇 개, 헌옷 보따리, 때 낀 카시미롱 이불. 그 흔한 흑백 텔레비 하나 없는 이런 촌 세간살이들이 서울에 가서 산다는 게 우습고 기맥히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말없이 이삿짐을 꾸려 회관 마당 삼륜차에 실었다. 아주머니는 연신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코를 풀어 치맛자락에 닦았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모두 서로 얼굴을 마주치거나 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확독이나 헌 덕석, 망태, 절구통 같은 촌 물건들은 대충 이웃들에게 몇 푼씩 주며 팔거나 거저 주며 아주머니는 목이 메이는지 넋을 놓곤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들이 대대로 힘써 살았던 땅, 논과 발과 온갖 과일나무들, 뒷산 몇백 년 묵은 귀목나무, 강 건너 평밭, 꽃밭등, 절골, 뱃마당에 두루바위, 벼락바위, 눈 주면 언제나 눈에 익어 거기 정답게 있던, 우리들이 자라며 나무하고 고기 잡고 놀아 주었던 몸에 익은 정든 이름들이 구로동 성남 신길동 명동, 이런 낯선 서울 이름들과 엇갈리며 우리 머릿속을 쓸쓸하게 지나갔다.

마당의 화톳불이 사그라져가고 새마을 스레이트집은 휑뎅그레 비워졌다. 마을회관 마당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서로 인사들을 나누었다. 아주머니들은 울먹이며 눈물을 훔치며 가다가 애들 빵이나 사주라고 구겨진 돈 몇 푼씩을 치맛속에서 꺼내어주며 복받치는 설움들을 감추지 못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듬성듬성 줄어들어 있었고 우리들은 얼마나 가슴 아파했던가. 이제 떠날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회관 마당엔 어찌하지 못하는 나이든 사람들과 몇몇 아이들만 남아 흐린 불빛 속에 어둡고 지친 얼굴로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는 우리들과 술을 마셨다. 논물 풀물 든 구식 와이셔츠, 장가들 때 맞춘 구겨진 양복과 닳아진 구두, 아이들은 그래도 좋아서 운전석에 앉아 빨리 가자고 조르는데, 우리들은 말없이 술잔들을 비우며 낫에 베이고 가시에 찢기고 삽이냐 괭이에 찍힌 우둘두둘한 겁먹은 손들을 어색하게 덥석덥석 잡아쥐며 말문들이 막혀 그저, 잘 있게 잘 가게 하며 서로 어깨너머 캄캄한 어둠을 보곤 했다. 그는 뿌리치듯 짐 실은 차 뒤칸에 올라타 우리들을 외면했다. 아주머니들은 훌쩍이며 치맛자락을 걷어올려 눈물을 닦고 아이들은 어머니들 치맛자락을 잡고 서 있었다. 저녁 내내 세간살이들과 한데서 시달릴 그를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다. 차가 회관 마당을 서서히 빠져나가자 물소리가 크게 쏴쏴 저 앞 강굽이를 돌아갔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노딧거리를 비췄다. 강물소리가 쏴 하며 우리들 가슴을 크게 쓸었다.

피와 땀과 살을 섞었던 땅,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도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다했던 땅, 그래도 정 붙여 살았던 땅, 나이 서른다섯에 이사라니.

동구 정자나무를 빠져나간 차는 새마을 신작로길을 잘도 달리며 불빛을 여기저기 쏘아댔다. 차 꽁무니의 빨간 불빛이 동구길을 아주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회관 마당에 덩그렇게 남아 서로 얼굴들을 외면한 채 앉거나 서서 담뱃불을 뻔닥이며 캄캄한 앞산을 바라보거나 땅을 내려다보며 그와 살 비벼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헤성헤성한 마음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하나 둘 헛기침을 하며 어둑어둑 헤어졌다. 회관 불빛이 우리들 등뒤에서 각자 꺼지고 시커먼 어둠이 동네를 가득 메웠다. 그의 텅 빈 집 앞을 애써 외면하고 지나며 이제 아무도 이사 들지 않을 꺼멓게 그을린 불빛 없는 그 이웃을 생각하며 우리들은 또 소쩍새 울음소리나 부엉새 울음소리에, 강물소리에 돌아눕고 돌아누우며 며칠 밤 잠을 설칠 것이다. 누가 또 떠나겠지. 누군가 또 떠나겠지.

섬진강 물소리가 한 번 큰 숨소리로 뚝 그쳤다가 힘겹게 이어졌다.

<사례 2> 저는 지금 마흔이 조금 넘은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전체 경제흐름을 주도하면서 농촌에서 땅을 빼앗기고 도시화의 물결에 적응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심각한 문제가 되었지요. 이 여인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로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 와서 정착을 못하고 계속 맴돌다가 경기도 파주군 임진각 근처 미군부대 부근에 임시로 정착을 했어요. 결혼했다가 남편과 사별한 후 어떤 건달 같은 사람과 재혼했는데 이 남편이 직업도 없고 늘 술 먹고 때리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이 여인은 개 장사를 하면서 거렁뱅이처럼 5, 6년 살다가, 그 지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삶의 기반이 없어져 서울로 왔어요. 서울에서 천막을 치고 움막 같은 데서 살면서 남자는 노가다판에 나가고 여인은 병마개 공장에서 일하면서 겨우 연명해갔어요. 그 여자는 국민학교도 못 다녀서 글자도 모르는 처지여서 생활을 꾸려가기 어려워 빚을 지기 시작했어요. 고리채, 달러돈을 끌어 쓰다보니 천만 원을 빚지게 되어 구치소에 들어가고 말았어요. 인생의 나락에 떨어져 이 여인은 죽느냐, 사느냐는 몸부림 속에서 잠이 들었는데 시뻘건 불덩어리 같은 것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신비체험을 했다는 겁니다. 그후 구치소에서 나와 그런 경험을 다시 하고는 죽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환상속에서 불쌍한식구들의 모습을 보고 방언(方言)도 하게 되었답니다. 그후 순복음교회에 나가면서 열심히 교회생활 하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새사람이 되어 시어머니와 시누이와도 사이가 좋아지게 되었지요. 또한 동네 사람들도 교회로 인도하고 열심히 일해서 빚도 400만 원 정도밖에 안 남게 되었답니다. 이 여인이 달라지게 된 원초적 경험을 잘 보존하고 해석해서 사회과학적인 인식과 적절히 결합시켜서 새 질서 수립을 위한 빛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례 3> 저는 빈민에 관한 사례를 얘기해보려 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느 목사님이 보고한 것인데 농촌에서 품팔이하는 노동자의 죽음에 얽힌 것입니다. 이 노동자는 벙어리 부인과 함께 53년 동안 가난에 찌든 일생을 살다가 깊은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정부에서 주는 극빈자 양곡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죽기 1개월 전에 그 목사님이 방문을 했는데 위독한 것을 알고 보건소에 데려갔으나 의사가 극빈자 황색카드가 없다고 진료를 거부했으므로 황색카드를 발급받아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의 말이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50리 길을 걸어갔으나 무료환자는 11시까지 밖에 진료를 안 받는다며 시간이 넘었다고 진료를 거부해서 50리 길을 돌아왔습니다. 그후에 다시 갔으나 이번에는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거부해서 다시 돌아와 그 목사님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노력하는 도중에 이 사람은 죽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목사님을 생각해서라도 예수를 믿고 죽으라고 하자 그는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 하고 죽었답니다.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해서 누가 이 사람에게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용택의 시집은 나도 읽었어요. 그 시인은 당하고만 있지 않고 민중으로서 민중의 자리에서 고발을 하고 있어요. 이 시들이 현대판 시편이라는 데 나도 이의가 없어요. 그 시인은 개인이면서도 개인이 아닙니다. 증언자는 내가 당한 일을 그냥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당한 일을 어떤 의미에서 전체의 일로 아는 순간이 참의미에서 메시아적 민중이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떤 민중의 어려움을 볼 때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법적인 기존관념을 가지고 규정해버리지 않고 오히려 슬픈 경지 속에서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는 것, 내가 못 가진 것을 경험하는 것, 이것을 나는 메시아적 경험이라고 봅니다.

이 경험은 그 사람 자신과는 별문제예요. 저는 이 경험 자체가 곧 메시아적 절규라는 말을 했는데 전자의 경우 문제가 개인의 문제로만 머물지 않고 농민이면 농민 전체의 문제로 고뇌하고 절규하는 데서 메시아적 절규가 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냥 일반적인 측면, 윤리나 법 또는 종교적인 규율마저 넘어서서 그의 슬픔과 아픔을 인류 전체의 슬픔과 아픔으로 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인류 전체의 문제로 삼을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메시아적 경험이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일이라면 아까 말한 한 여인의 얘기는 윤리적으로 쉽게 규정할 수도 있어요. 천만 원 빚진 것 자체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 여자 개인의 삶 자체에는 아무 감흥을 안 느껴요. 다만 그 배우지 못한 여자가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할 상황인데도 악착같이 일어나는 데서 '야! 내게는 도무지 없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그녀의 삶에서 힘을 경험할 수 있어요. 거기서 힘을 경험한다는 그 자체가 구원아라면, 구원은 민중에게서 온다고 말할 수 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는 이러한 메시아적 경험 또는 메시아적 증언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누이뻘 되는 사람이 쓴 수기에 의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교활하고 의심 많고 술과 도박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범적인 인물이 못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적인 자기 삶의 영역을 넘어서서 전체 또는 어느 계층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고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름으로써 윤리나 법, 종교마저도 넘어서서 그리스도 증언을 하고 있어요. 공창(公娼) 허가를 받은 창녀 소냐, 그는 배우지 못하고 말도 없는 그녀를 통해서 가장 대표적인 그리스도 민중을 그렸어요. 그래서 저는 일찍부터, 그는 공산주의가 일어나기 전의 시대에 예수를 가장 잘 아는 예수의 증인이었다고 생각해왔어요. 비참한 가난 속에서 아버지는 옛날만 되씹으면서 술주정하고, 후처로 들어온 여자는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옛 생활을 유지하려는 도도하면서도 혹독한 여자였어요. 이렇게 꼼짝없이 앉아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슬그머니나마 공창에 등록을 하고 돈을 몇 푼 씩 들고 들어오는 소냐, 그러면서도 한편에 성경을 들고 있는,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소냐! 마침내 소위 지성인인 라스콜리니코프를 굴복시켰던 그녀!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냐를 통해서 종교나 법적인 척도로 잴 수 없는 그리스도 민중을 형상화시키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이 소냐와 같은 민중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아까 읽은 김용택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인이 직접 땅을 파는 농민은 아니지만 훌륭하게 증인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봅니다. 감 문제 하나를 농민 전체의 문제로 확산시키고, 마침내 사회구조 전체가 병들고 잘못됐다는 고발에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태일의 경우에도 개인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게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떨어뜨린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배를 사먹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전태일이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해야겠는데, 고발할 길이 전혀 없으니까 자기 몸을 태우면서 고발을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고통의 문제를 자기 개인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노동자 전체의 문제로 승화시킨 데서 민중적 메시아상이 드러나게 된 거지요. '전태일이 메시아다'라는 말을 쓸 필요는 없어요. '그리스도는 전태일에게서 이렇게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 그리고 지식으로 민중의 삶을 규정하거나 규탄하려는 자세는 예수와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예수는 병자, 특히 정신병자 그리고 창녀와 세리(稅吏)를 친구로, 하느님의 자녀로 조건 없이 받아들였어요. 창녀, 술집여자도 실은 희생의 제물인데 오늘의 교회는 나쁜 여자들, 음탕한 여자들로만 규정해왔어요. 그런데 예수가 이런 여자들의 친구였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적, 정치적 입장에서 민족반역자로 낙인 찍힌 세리마저도 포용했다는 것은 상당히 이색적이고 우리가 소화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의 이런 삶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거대한 화산맥이 예수에게서 용솟음치듯 분출되어 나왔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전부터 연기도 좀 나고 지진도 있었지만 예수에게서 처음으로 분출되었다가 그 이후 이것이 여러 형태로—꼭 예수의 이름과 관련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분출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계속 폭발되어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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