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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그런데 요는 그것이 교회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제기에는 벌써 '교회란 이러저러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요. 바로 그 조건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부터 반성하고 나서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고 봐요. 이미 교회론에서 오래 전부터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나누어 보는 견해가 있었고, 근경에는 '흩어지는 교회'와 '모이는 교회'라는 구분이 있었어요. 이런 견해는 교회라는 것은 외적 조건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고, 제도교회의 한계를 잘 들여다본 결과입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선교론(missio Dei)이 널리 인정을 받고 있고 오늘날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러저러한 조건을 갖춘 것만이 교회라는 고집은 정말 고집 이상일 수 없어요.

이런 판국에서 이른바 지도층, 즉 성직자나 신학자 같은 이들의 역할이 있어요. 그것은 전통적, 인습적 기준을 떠나서 종말론적 시각에서 참교회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가령 유다교로부터 모두 죄인으로 규정당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요 딸이오', '하느님 나라는 당신의 것이오', '나는 당신들을 위해 당신들을 찾아왔소'라고 선언한 예수의 제자라면, 그런 시각에서 '바로 여기에 주님이 현존한다'는 증언을 할 수 있는 이가 참주님의 제자일 것입니다. 가령 히브리서 기자가 "치욕을 걸머지고 성문 밖에 나갑시다. 거기 그리스도가 계십니다"(히브 13, 12~13)라고 한 것이라든지, 마태오에 수록된 최후심판 이야기(마태 25, 3~46) 같은 것은 모든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선 새로운 교회, 즉 민중의 교회를 본 선구적 증언이라고 봐요.

▶ 책을 보면, 서남동 목사님께서도 민중교회론에 대해서 조금 언급을 하시거든요. 어떤 식이냐 하면, 가톨릭은 조직 내지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였고, 개신교는 성서 중심의 교회였으며, 민중교회는 민중운동이 일어나는 장소 또는 민중운동을 하는 기관, 단체 곧 그 현장이다라고 규정하고 계십니다. 이를테면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라든지 법정투쟁의 경우라든지 산업선교라든지 농민선교라든지 하여튼 민중운동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제3의 교회다, 민중교회다라고 하시면서 거기서 민중교회의 모습을 찾고 계시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볼 때 다른 민중운동과 민중사건, 또 현재의 교회운동과 다른 일반 운동을 굳이 구별하여 특정을 말할 수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전에는 31운동에 그리스도교가 공헌한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까닭은 이른바 신학적인 이론의 뒷받침이 전혀 없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다른 면에서 보게 됐어요. 그때 민중민족적 한을 갖고 교회에 몰려들어와 있었던 사람들이, 선교사들이 아무리 정교분리니 '천당'의 복락을 말했어도 31운동의 주역으로 물꼬 터지듯 봇물처럼 터져 앞에 나섰다는 점이에요. 그것은 민족적 한의 표출이자 동시에 승리의 축제였어요. 그런데 제도적 교회는 그들의 민중적 한의 사제가 될 준비도 없었고, 그들의 고난과 희망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용접시키려는 생각도 못했어요. 오히려 제도교회의 존속을 위해서, 저들을 경원하고 점점 저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종교라는 담을 높여만 갔고, 더 피안적인 종교로 변모해 갔어요.

그런 결과로, 현재까지도 민중이 들어올 수 없는 장애물이 무수히 많아졌어요. 제사를 지내도 안 되고, 술을 마셔도 안 되고, 담배를 피워도 안 된다! 하지 말라는 게 자꾸 많아지니까 점점 못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민중들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습, 이를테면 막걸리 정도 먹는 것까지 못하게 하니까요. 그건 교회에 들어오지 말라는 얘기예요. 막걸리가 그리스도교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까지 못 마시게 하니 농사나 제대로 짓겠어요? 제사 같은 것도 다 그만뒤라, 무당 같은 것도 다 끊어라, 그렇지 않으면 오지 말아라.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가 하라는 것만 해라'밖에 안 남았다는 말이에요. 교회가 하라는 것은 뻔하지요. 찬송가를 부르고, 새벽기도회에 나가고, 그 다음엔 헌금하는 것, 혹은 목사의 말에 복종하는 것, 결국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만 남았어요. 그 통에 우리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은 그냥 작두질하듯 잘려버렸어요. 그래서 아예 그리스도인을 한국인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제일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민중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요인들을 막아버린 것이 되고 만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나 와도 좋소'라는 찬송은 겉돈 셈이지요.

'너희 있는 그대로'라는 예수의 전통을 살리는 것이 큰 전제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개방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교회가 기득권을 포기할 때만 가능해요. 기득권 중에서도 교회내에서 갖고 있는 지위와 그리고 재산이 제일 중요하겠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나누어 먹고 사는 공동체도 얼마 동안 등장하는데, 예수의 에토스(ethos)가 한 번 피워봤던 꽃이라고 봐야 될 거예요. 예수처럼 살려면, 예수의 뜻대로 살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던 때지요. 그러니까 그런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공동체는 종말의식과 직결됩니다. 종말의식의 소멸은 종말적 공동체를 해체시켰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는 종말의식이 없어요. 한국의 대(大)교회주의와 거창한 교회당 건축경쟁 현상은 바로 종말의식의 결여를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여기서 기성교회와 예수공동체의 차이, 그리고 나아가서 이른바 교회와 일반 운동권의 차이를 말할 수 있느냐는 물음 자체에 대해서 반성할 필요가 있어요.

종말의식은 의(義)를 위해서는 생명을 내거는 힘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성교회에서 그런 분위기가 있는가? 없다면 그래도 그것을 교회라고 할 것인가? 이에 반해 일반 운동권에서는 눌린 자의 인권을 위해 감옥도 가고, 죽음도 각오한다면! 그 정열은 어디서 올까? 이런 물음을 앞에 놓고 서 교수의 교회론을 음미할 필요가 있어요.가톨릭은 성직자 중심의 교회였고, 신교는 성서 중심의 교회였으며 지금은 민중 중심의 교회라고 하는데, 그 구분은 옳으면서도 설명이 없으면 오해가 있게 됩니다. 나는 성직자와 민중의 상반성은 이해되나 성서와 민중을 분리시키는 데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서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글입니다. 그런데 성직자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지요. 과거의 교회상도 신학자를 포함한 성직자들이 제시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나름대로 성서를 뒷받침했어요. 그러나 지금 성서를 보니까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눈이 뜨인 것은 민중사건에서 받은 자극과 충격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참예수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다!'라는 기준은 성서에서 찾습니다. 그중에 한 예로 위에서 말한 것, 즉 종말적 의식이 여기 있다, 그것은 성서적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교회다 또는 아니다할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일반 운동체와 교회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전거로 하여 '이것이 주(主)의 교회다!'라는 증언을 하는 것이 신학이 해야 할 의무입니다.

그런데 종말적이라는 것을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상의 형성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기존 체제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계층성이 있을 수 없지요. 또 종말이란 '역사'의 끝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역사적 현장의 온갖 비리도 끝나는 현실이 하느님 나라지요. 그러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제도가 있고, 제도가 있는 한 위와 아랫자리, 가르치고 배우는 자, 주고 받는 자, 나아가서 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 나라 표상은 묵시문학적이었어요. 저들은 묵시문학적으로 그 나라가 도래할 것을 기대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민하였고, 그 고민은 마침내 교회를 형성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 신학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비록 묵시문학적 종말관계열에 속했다고는 하나, 그는 그 나라에 대한 어떤 객관적 진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나라는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그가 하느님 나라 비유를 많이 했으나 그 나라가 어떤 것이냐를 말한 데는 한 곳도 없고, 실현되는 그 나라 앞에서의 결단, 한걸음 나아가서 그것에 알맞는, 아니 그것을 이루는 현장에서 싸웠고, 싸우기를 지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표상한 대로의 그 나라가 보이지 않으니까 '그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또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바울로에게서 볼 수 있어요.

바울로에게서는 하느님 나라가 크게 후퇴하고 그 대신 하느님의 의(義)와 교회가 큰 비중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로에게는 현재적 하느님 나라 신념과 미래적인 것이 교차되고 있어요. 그것과 병행해서 교회도 그 나라를 실현하는 공동체라는 면과 그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아직 역사내의 집단이라는 전제에서 그 제도, 질서를 세우려는 노력이 병행해요. 그런데 민중전승을 중심으로 한 마르코복음에는 다시 하느님 나라가 크게 부각돼 있어요. 마르코복음 1장 15절의 'engiken'을 놓고 어떻게 번역하느냐로 논쟁이 많았으나 그것을 문법적으로 시비하기보다는 예수의 행태를 보면 판가름이 납니다. 이미 지적한 대로 민중에 대한 예수의 행태는 그 나라가 실현된다는 신념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해요.

그런데 마르코보다 적어도 20년쯤 지난 마태오와 루가의 시대에 오면 그 나라는 사실상 후퇴하고 '교회의 시대'라는 것이 설정되고, 그 자체를 역사내의 특수한 시기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도화는 정당화됐어요. 이것은 그 나라의 현재성을 후퇴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된 것이냐? 여기서 그 나라와 제도적 교회를 일치시키는 중세기 교회관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 교회는 이미 기존세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음에도 말입니다. 이 말은 제도 교회가 바로 기존질서 위에 한자리를 갖게 됨으로써 사회계층성이 그대로 교회내에서도 유효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지요.


List of Articles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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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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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판권
표지
예수를 예수로 만든 힘의 담지자
머리말
   
첫째 마당 一 예수의 수수께끼
    예수를 향한 추구
    너무도 평범한 사람
    예수의 수수께끼
    전권을 이양받은 자
둘째 마당 一 예수의 시대상
    마카베오의 봉기와 하스몬왕권
    로마·헤로데 왕조시대
    헤로데왕가
    총독정치
    경제적 상황
셋째 마당 一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
넷째 마당 一 갈릴래아로:예수의 소명
    석가와 공자와 예수
    갈릴래아로!
다섯째 마당 一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나라 도래를 위한 투쟁
여섯째 마당 一 예수와 민중
    유다 사회의 민중
    예수가 만난 사람들
    오클로스
    하느님 나라와 민중
일곱째 마당 一 사탄과의 투쟁
    치유
    민중사건으로서의 기적
    반로마 민중운동의 한 예
여덟째 마당 一 예수와 여인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위상
    여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
    예수를 움직인 여인들
아홉째 마당 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公) : 회개
    땅은 하느님의 것
    물(物)의 사유화에서 해방
    권력의 사유화로부터 해방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예수를 따라서
열째 마당 一 체제와의 충돌
    예수운동의 적대자들
    예루살렘세력
    예루살렘세력과의 대결
    정치권력과의 충돌
열한째 마당 一 수난사
    그리스도교와 십자가
    복음서와 예수의 수난
    예수의 수난의 맥락
    예수의 민중운동
    처형
열두째 마당 一 민중은 일어나다:부활이야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
    부활이야기 분석
    부활의 의미
    예수의 고난에서 찾은 부활의 현실
    우리의 수난, 우리의 부활
   
판권
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성서는 신을 어떻게 말하나
    해방의 신
    성전종교의 포로가 된 신
    예수 이후의 하느님
    민중의 하느님
    하느님 사건의 전거
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교회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예수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였다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바울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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