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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민중 운동의 새 기원
—민중 운동사 측면에서 본 419
민중 없는 우리 역사

나라를 잃을 때까지 우리 역사는 왕조 제도였다. 우리는 쉽게 봉건주의란 말을 우리의 과거 전통을 비판하는 데 사용하고 있으나 엄밀한 의미의 봉건 제도는 없었다. 그러므로 중앙 집권적인 체제로 일관한 셈이다. 이러한 역사에서 국가도 있고 민족도 있었으나 민중이 설 자리는 없었다

국가나 민족을 강조하는 경우는 민중을 동원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사용됐다. 외침(外侵) 내우(內憂)의 위기가 올 때 언제나 국가나 민족을 대의(大義)로 내세웠고 민중의 절대 복종을 요구해서 징병 징용으로 동원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민중에게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거의 절대적인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해서 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내던진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을 충(忠)이요 충의(忠義)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대권(大權)을 가진 역대의 제왕(諸王)이나 그들을 싸고 도는 세력권이 부패하고 제구실을 하지 못한 것이며, 그러면서도 민중에게 충(忠)을 강요한 권리만 행사할 뿐 아니라 저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것을 권리 행사(權利行使)로 안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민중이 더 참을 수 없어 봉기한 사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번번히 역도(逆徒)라는 누명을 씌워 필적(匹賊)을 잡듯 진압해 버렸으며 역대의 사가(史家)들은 모두 저들을 반역자들로 낙인찍고 세력가 중심의 역사를 그려 왔다. 그러므로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된 것은 무엇이나 대의(大義)로 알고 민중의 요청은 정당해도 소의(小義)로 간주하여 그 대의(大義) 앞에 포기하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습성이 우리 민중의 뇌리에 뿌리를 박게 됐다. 그러므로 민족을 사랑하는 민중은 있어도 민족이라는 이름은 민중을 억압하는 도구로 상용(常用)됐다. 실재(實在)한 것은 민중뿐인데 민족이라는 개념만 있고 민중은 없는 역사가 바로 우리 역사였다.

이 같은 민중이 각성해서 나라를 구하는 일과 자기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궐기한 것이 동학혁명이다. 그것은 근세적인 의미에서의 민중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저들은 정부의 학정과 부패 앞에서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일어남과 동시에 서구 문명 앞에서의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민중적 각성이 응결된 철학을 탄생케 하였다.

그러나 민중을 한갖 노예처럼 안 정권은, 민족을 내세우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권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외군(外軍)을 빌어 이 민중의 소리를 짓눌러 버렸다. 이로써 민중의 소리는 땅에 숨고 타락한 권력은 마침내 나라를 팔아먹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일 그때에 이 민중의 소리를 듣고 민중을 위한 정치로 체질 개선을 했더라면 한말(韓末)의 비극과 민족적 치욕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망국(亡國)과 더불어 제왕(諸王)도, 그것을 둘러싼 권력도 없어지고 오직 외세의 압력 아래 흩어진 민중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민중이 강력한 일군(日軍)에 저항해서 봉기한 것이 31운동이다. 그것은 순수 민중 운동이었다. 그들은 손에 바늘끝 하나 들지 않고 오직 정의를 등에 업고 궐기했다. 죽은 듯한 그 민중이 얼마나 세계사에 예민했으며 「命」에 철저했나하는 것은 그 독립 선언서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저들은 그 독립선언을 「자주민(自主民)의 소리」라고 했고 「2천만의 민중의 소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민족뿐이 아니라 민중으로서의 자각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잔인한 일제(日帝)의 탄압 앞에 이 민중의 소리는 다시 땅에 숨어야만 했다. 그만큼 민중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정치 군사적으로 나라는 잃었어도 그것으로 완전 점령됐다고 생각한 침략주의앞에 민중만은 점유할 수 없으며 저들은 엄연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천하에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하나는 아직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울분이 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윌슨의 민족자결 선언이다. 특히 후자가 없었더라면 이 민중이 자체의 성숙으로 그처럼 봉기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419와 민중 운동

해방은 엄격히 말해서 선물같이 왔다. 그것은 민중의 봉기로 제 나라를 찾은 결과가 아니라 외세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고 받았다는 것은 내적 콤플렉스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 정부에 대해 열열하게 환영하고 거의 절대적으로 받든 것은 바로 이 콤플렉스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절대 복종은 결과적으로 이승만을 자만하게 했을 뿐 아니라 독재에의 길을 열어 주었다. 조국을 잃었던 분노와 광복의 기쁨은 민족 지상(民族至上)을 당연한 것으로 알게 했는데 이승만은 바로 이 민중의 감정을 이용해서 민족주의를 지상(至上)의 무기(武器)로 내세움으로써 그것을 타부화(化)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 민중을 눌러버리는 도구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말하지만 민족만 있고 실재한 민중은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문제로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민중은 반일적(反日的) 강경 정책, 대미(對美)의 주권적 행동(主權的行動)으로 미대사(美大使)와의 대립(對立)이나 포로 석방과 같은 처사에 박수를 보내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이 점차 민족보다 정권을 위해서 민중을 이용 또는 억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민중은 점차 회의 속에 빠지기 시작했다. 까닭은 민족이란 한낱 개념뿐이고 민중은 그 이름 밑에 억압되고 남는 것은 정권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권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고, 야당과의 싸움이 치사한 것을 본 민중은 그때까지는 그렇게 분노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을 그처럼 무시하면서도 툭하면 민의를 내세워 시위를 강제진압하고 심지어는 백골단(白骨團)이니 땅벌떼니 하는 깡패를 동원하면서 그것을 바로 민의(民意)의 표현으로 내세울 때, 민중은 자신들이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권을 위해서 도용(盜用)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의 불신과 분노는 축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십여 년을 "그래도" 하는 다시 걸어보는 기대가 민중 봉기를 제동했던 것이다.

그런 영구 집권을 위해서 민중의 유일한 권력 행사인 선거를 너무도 노골적으로 더럽히고 자신도 위해서, 자기 측근자의 당선을 민의(民意)를 나타내는 선거를 조작해서까지 관철했을 때 십여 년 길든 짐승처럼 조용한 민중은 분노했으며 그것마저 그대로 보아 넘기면 우리 민중은 영영 죽어버리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이때 419의 봉기가 터진 것이다.

419는 이 민중의 사한선(死限線)에서의 봉기다. 그러나 그것은 동학 봉기나 31운동과는 성격이 달랐다. 위의 사건의 중심은 삶의 현실에서 박해 받은 민중이다. 그런데 419는 생존의 전선에 있지 않은 학생들이 주동이 됐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419가 학생들에 의한 의거(義擧)였던 데는 다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학생이라는 계층이 양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사회적 세력이 됐으며 그들은 이 사실을 의식했을 것이다. 둘째는 당시의 저들은 일제시(日帝時)의 조국을 향한 센티멘트에 젖어서 민족이라는 개념에 무비판적인 계층과는 다른 새 세대(世代)라는 것이다. 저들은 과거에 있지 않고 미래에 살며 그 안목은 세계적이 됐다. 그러므로 저들은 민족을 위해서라는 이 슬로건 밑에 현혹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민족 또는 국가와 정권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불의한 정권이면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딴 면으로 말한다면 저들의 봉기는 새 시대 새 세대의 민중이 낡은 민중에게서 바톤을 넘겨 받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것은 잘났거나 못났거나 내 조국이라는 낡은 민중의 국가관에 대해서 정의가 구현되는 민족 또는 정권, 말하자면 정의가 민족보다 앞서며 민족으로 있으려면 잘나고 의로워서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의식의 민중이 봉기한 것이다.

사실상 419를 계기로 그때까지 내걸었던 민족지상(民族至上), 국가지상(國家至上)의 슬로건이 내려졌고 독립 투사니 광복군이니 해서 유공(有功)의 특권을 요구하는 이들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419는 민족 운동의 중요한 전기를 가져왔다. 그것은 그 때까지의 관념주의와 회고적(懷古的) 감상에서 모든 것을 덮어두는 풍토에서 현실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사고가 민중이라는 힘으로 대두된 것이다. 어제까지 무엇을 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무엇을 하는지가 문제다. 그저 존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존립하느냐가 문제다. 그 어떤 것도 사실을 은폐해도 좋을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 권위 따위는 그 이상 필요없다. 꿩잡는 게 매다. 이것은 419가 가져다 준 민중 운동의 전환을 뜻한다.

419의 반성

419를 일으킨 학생들이 최후 단계에서 일반 대중의 가세(加勢)를 유발했던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학생은 민중 속에서도 일반이 향유할 수 없는 특권을 지녔다. 그러므로 저들의 관심사가 일반 대중의 그것과 유리될 수 있다. 그러나 419 봉기는 민중의 호웅을 받았다. 그러나 학생 데모에 가세한 민중이 정말 민중운동을 했느냐 하는 것은 의문이다. 이것은 419를 일으킨 학생들이 그들의 봉기를 정말 민중 운동으로 의식했느냐 하는 질문과도 관계가 있다.

학생들은 그 정권이 항복함과 동시에 곧 학원으로 돌아갔으며 질서 유지에 나섰다는 사실을 높이 산다. 이것은 저들의 목표가 불의의 정권을 제거하자는 데 국한했음을 의미한다.

민중운동은 바로 민권(民權) 운동이다. 민이 주인인데 오히려 권력에 종노릇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민권을 도로 찾아 주자는 것이 현대의 민중운동이다. 물론 우리는 강대국과는 다른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민족적 차원이라는 것을 한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옳은 민족으로서 제 길을 가려면 민중의 권리가 보장되고 저들의 뜻이 모아져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정권만 교체하는 것으로 새로운 전기가 오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권력에 대해서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나 정당도 권력을 잡는 순간 변질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계속 민중에 의해서 감시와 조종을 받아야 한다. 민권 운동은 그러므로 언제나 권력을 의식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어떤 권력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419의 봉기는 정권 교체에 성공한 데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민권을 위한 민중 운동으로 번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학원에 돌아간 후 건강한 민중 운동이 연속되지 못했다. 물론 민주당정권 때 많은 데모가 연속됐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민중 운동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곧 학원으로 돌아간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며 또 저들이 민중운동을 계속 밀고 나갔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저들은 민권민중 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그 뒤를 계승하는 민중이 없었다. 이것은 그때까지 민중이 자기 권리를 찾음으로써 참 민족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최후 진단일 수 없다. 까닭은 극히 짧은 시일 안에 군사 혁명으로 모든 것이 도절(盜絶)되었기 때문이다.

(『기러기』 1974. 4)


| 평론 |
한국 민족 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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