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부터 읽으려고 한 김은국 씨의 『순교자』를 최근에야 읽었다. 그 소설이 독어로 번역된 것을 읽고 감격한 편지를 보낸 독일의 한 친구에게 자극받고 곧 다른 일을 제쳐놓고 읽었다. 한국 사람에게서 이만한 작품이 나은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구상이나 사상은 빈틈없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6ᆞ25동란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겪은 한국 사람으로 절실한 물음을 던진 것이다. 그는 이 전쟁의 참상을 부조리로서 성격화 한다. 따라서 '섭리하는 하느님'이란 없다는 전제를 가진다.
신 목사는 하느님이 없음을 절감한다. 그러면 사람은 이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것을 위해서는 삶의 의욕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한 의욕과 용기는 어디서 오나? 그것은 희망을 안겨줄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나? 그는 대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하느님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으나 그것은 곧 절망만을 가져올 따름인 것을 본다. 이것은 쟌 파울이나 니체가 무신선언과 함께 다른 허무, 혼란에 직면한 것과 같다. 신 목사는 희망을 안겨줄 길은 하느님을 내세우는 길 외에 다른 길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서 그는 니체처럼 '신이 죽었다'는 선언과는 달리 '하나님은 살아 있다'는 거짓 증언자로 둔갑한다. 그의 거짓은 사랑의 표현을 위한 불가피한 도구가 된 것이다. 그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거짓으로 일관한다.
이 작자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휴머니즘이다. 거짓말하면서도 인간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겠다는 그 거짓 위에 세워진 성실함은 거짓을 오히려 거룩한 것에 아르는 통로로 변하게 한다. 그는 거짓 증인이라는 점에서는 위선자이다. 그러나 그의 인간애가 이 위선자를 '성인'으로 둔갑하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이러한 '성인'이 가능한가하는 것이다. 이 성인도 도대체 거짓과 성실이라는 모순율에서 있다. 처음부터 부정된 성실 위에 발을 디딘다. 그의 이 휴머니즘이 그의 거짓마저 정당화할 연속선을 가졌는가? 결국 이 신 목사도 부조리 아닌가? 또 이러한 '성인'의 실재를 염원하는 것이 인간의 리얼리티에서 볼 때 가능한가? 이것도 결과적으로 니체의 초인처럼 인간 아닌 인간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그런 초인의 실재의 믿는다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과 그 어려움에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인간에게 그 만한 초인적인 휴머니티가 있다면 세상에 비극이 일어날 리 없으며, 절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6ᆞ25도 안 일어났을 것이다.
작자도 이 사실을 안 모양이다. 그러기에 인간 신 목사는 이 모순 속에서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그 대신 죽은 그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는 후문으로 끝마침으로써 지금의 그 인간 신 목사로서는 한계가 있고, 죽었다가 새롭게 탄생하는 신 목사에게 기대를 걸게 한다. 이러한 서술법은 아마도 예수의 부활설화에서 얻어 왔으리라. 인간 예수는 거짓이 아니라 성실한 신념 위에서 사랑하고 사랑을 부르짖었다. 그는 부조리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에게 오고 있는 미래(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죽어야만 했다.
그것은 인간성의 한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탄생하게 했다. 그 믿음 위에서 그의 '휴머니즘'이 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철저한 휴머니즘이 신앙(하느님) 없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딴말로 하면 인간의 능력과 그의 존엄성에 거점을 둔 휴머니즘의 수명이 얼마나 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작자가 부활한 신 목사를 말하는 것은 그런 휴머니즘의 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신은 죽었다'는 소리는 결코 악마의 소리거나 인간의 교만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인간의 한계성을 실감한 부르짖음이다. 그러나 무신론에서 반신론 마침내는 살신론에까지 들어간다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것은 신을 낳게 하는 첨병 역할 이상 더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새로운 신은 더 무서운 부조리의 신이 될 위험성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