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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
 
1

나에게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시 139, 2).
내 마음까지 꿰뚫어 보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통촉하시고(시 139, 2).
내 표현을 전부 아시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며(시 139, 4).
내 앞과 뒤, 과거와 미래를 전부 포위하듯 아시니(시 139, 5).

이것은 2500년전 한 시인이 압도하는 신을 고백한 시구다.

소위 신앙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이렇게 내 삶 전체에서 하느님을 실감하기를 원한다. 정말 우리도 머리카락 하나도 다 헤아리시고,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가 떨어지고 꽃 하나 지는 것도 간섭하시는 그런 하느님을 실감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데 그의 천사가 뒤에서 보호하는 유명한 그림을 안다. 이 그림처럼 하느님이 나에게 그런 분이기를 간구한다. 세상을 불의가 지배하고 또 내 불안이 가중될 때일수록, 하느님이 나의 일체를 통찰하기를 원한다. 그러한 소원에서 하느님을 소위 무소부재(無所不在) 또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고 찬양한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눈을 밖으로 돌렸을 때의 소원이다. 내 원수가 의식될 때,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이 시인은 자기를 전부 통제하고 통찰하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인의 소원이 아니라 그렇게 압도하는 현실을 고백할 뿐이다.

이것은 소원도 아니고 또 자명적인 것도 아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 떨며, 거기서 자기가 그것을 차마 감당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그래서 이 시인은 "이 지식이 너무 기이하고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칠 수 없다"(시편 139, 6)고 한다.

정말 우리는 '무소부재' 한 신을 찾는가? 내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 보는 실재가 정말 있다면 좋겠는가? 수사 전문가들은 완전범죄는 없다는 것을 진리처럼 반복하므로 범죄율을 줄이려고 한다. 그러나 수사망을 감쪽같이 피하는 유명한 도둑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한편 그런 도둑들도 수사망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자기 안의 고발자(양심)는 처치할 길이 없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그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도둑질을 할텐데 왜 새삼 양심을 문제삼을까? 그것은 그가 한 행동을 무엇(누구)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싫은 것이다. 단순하게 신을 믿는 사람이 살인했다. 감쪽같이 살인한 흔적을 지워버렸다. 양심 따위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믿는 신이다. 그 신은 그를 보았음에 틀림없고 지금도 주시할 것이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는 그 신을 처치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어떻게 죽이나? 칼을 쓰나? 총을 쓰나? 그러나 그런 것까지 통찰하고 있는 그를 죽일 순간은 없지 않나? 그래서 그는 신으로부터 도피할 길을 찾아 헤맸다. 우리는 정말 전지전능한 신을 찾는가? 아니, 비록 살인자가 아니더라도 사생활(프리이버시)을 그토록 존중하면서?

2. 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시인

내가 그를 피할 데가 없다.
하늘에 오를까? 거기도 그가 있구나!
지옥에 내려가 숨을까? 거기도 있구나!
새벽날개를 달고 수평선 저 끝으로 도피할까?
거기도 벌써 앞질러 와 있구나!
오! 어두움아! 나를 덥쳐 숨겨주려마!
아! 어두움도 그 앞에는 낮과 같구나!

그는 이 하느님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우리는 이 시인이 하느님의 현실을 실감하듯 그와 꼭닮은 감정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하늘에 오를까?

저 하늘을 훨훨 날아봤으면!"

또는 어떤 초현실적인 바전, 엑스타시한 경지에 돌입해 보려고 하거나 초세상적인 유토피아를 그려서 날개를 편다. 이상주의같은 것은 이러한 사람의 소원의 구체화에 불과하다.

"음부에 내려갈까?"

이 순간이라도 죽어 버렸으면! 또는 극단적인 잔인하고 극한적인 상황에 몰리어 들어가 봤으면! 아니 악 자체가 되어서 이 되지 못한 세상의 선이니 양심이니 질서 따위를 전부 파괴해 봤으면! 이러한 감정을 구체화한 것이 소위 악마주의라는 것이다.

"새벽날개를 달고 바다 끝에 피할까?"

우리는 때로 로빈슨 크루소를 그리워한다. 저 멀리 수평선 너머 거기 홀로 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도피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살았으면!

"어둠아 나를 가려다오!"

경우를 따지고 폭로하고, 자명적인 것들이 다 싫어지고, 오히려 바보의 세계, 원시사회같은 동물적인 세계로 갔으면! 의식이 다 뭐냐! 정의는 뭐고! 양심이란 다 뭐냐! 이러한 감정을 실천에 옮긴 것의 대표적인 경우가 근경에 유행하는 히피족이다.

이 시인은 '제한성'에 있어서 하느님의 실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밖의 제한성보다도 자기 안에 어쩔 수 없는 제한성을 느끼고 그 자기에서 탈출해 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아니, 자기에게서의 탈출이 아니라 자기 정체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밝히는 그 눈 앞에서 피하고 싶은 것이다.

이 시인은 자기의 경험에서 우리의 실존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사람 일반만이 아니라 예언자, 개혁자, 성자 또는 무신론자의 실존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실존을 말하는 데서 보다는 신을 도피하려는 이 시인의 고백에서 정말 그가 신의 현실 앞에 서 있음을 본다. 폴 틸리히는 "나는 절대로 하느님을 도피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쉽게 말하려는 자는 하느님을 참 경험한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하느님을 단순히 인간 안에 있는 하나의 완전한 상(像)이라 볼 때, 그를 도피할 자유가 인간에게는 없다. 신은 단순히 우리에게 보장을 주고 영원불멸이나 궁극적인 행복을 주는 이라고만 한다면, 인간은 그에게서 도피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이 단순히 우주라거나 자연법이라거나 또 역사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에게서 도피할 필요가 없다. 사실 이러한 신은 사람이 만든 상이고, 내 이미지를 투영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신을 그리워하는 것일 뿐 실재는 신은 아니다. 쉽게 입으로 하느님을 행복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자는 참 성서에서 말하는 신을 모르고 있는 증거이다.

니체는 보통 크리스천보다도 성서에 있는 하느님의 사상의 힘을 더 실감하고 있다. 높은 휴머니즘의 예언자인 짜라투스트라는 살신자(殺神者)인 악한에게 "너는 너에게 철두철미 동참하는 그를 견딜 수 없었지? 너는 그가 증거자이기 때문에 복수한거지? 너는 하느님을 그래서 죽였지?"라고 추궁한다. 이에 대해서 그 악한은 "그렇다. 그를 죽여야 했다"고 하면서 그는 "나의 속 깊이까지 간섭하여 나에게 부끄러움을 자아냈다. 그래서 더 견딜 수 없어서 그를 죽여버린 것이다"고 한다. 사람은 이러한 증거자 앞에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하느님을 이러한 증인으로 실감할 때, 그 앞에 설 수 있을까?

3. 죽이고 싶은 신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우리는 내가 발표하지 않은 마음을 아는 자가 있으면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하느님을 이 시인처럼 실감할 때 우리는 그에게서 도피하고 싶지 않겠는가? 내가 앉고 서는 것, 가는 길마다, 누워 자는 침실에서도 내 속을 들여다 보는 이런 하느님이라는 것을 실감할 때 그런 하느님에게서 도피하고 싶지 않겠는가? 아니 죽이고 싶지 않겠는가? 나는 나 자신에게도 모호하게 내 깊은 데는 넘겨 버리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이 니체의 악한은 정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신에 대한 이런 분노는 니체만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마저도 그랬다. 루터는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바로 이 하느님을 증오했다. 나는 그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다. 비록 부당한 반역은 안했으나 침묵 속에서 그를 저주했다"고 했다. 성(聖) 베르나르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존재하기를 원할 수 없다. 우리는 가장 지혜롭고 힘찬 그를 원할 수 없다"고 했다. 루터는 이 베르나르의 말처럼 바로 자기에게 그런 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시편 시인의 하느님을 경험한 것이다.

이 시편 시인, 중세기의 성자, 개혁자 그리고 무신론자 니체에 이르기까지 공통점이 있다. 이 공통점은 이 하느님은 나와 다르다는 것, 하느님은 나를 감시하는 이라는 것이다.

4. 자기에게서 다시 살아나는 신

우리는 하느님은 전지전능, 무소부재한 이라고 교리화함으로 허상과 싸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현실을 나 자신에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홀로 있을 수 없다. 내 안에 감추어 둔 것이 드러나지 않는 법이 없다. 결국은 모두 세상에 폭로되고 만다. 나는 나를 감출 데가 없다.

니체의 악한은 그래서 형이상학적 신을 죽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 안에 있는 신을 다시 발견한다. 그러면 바로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 아니, 사람은 결국 내 안에 있다. 그러면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살기 위해 신으로부터 도피하다가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그를 죽이려는 순간, 그것은 다름 아닌 '나'임을 발견한다. '나'는 찾아내는 나와 도피하는 나, 죽임당하는 나와 죽이는 나로 분열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자기와의 싸움으로 심화된다. 이 하느님의 감시가 싫어서 피하려던 이 시인은 13-18절에서 그 하느님의 눈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자기를 발견하고, 새롭게 그 하느님에게 눈을 돌린다.

주께서 나를 어머니 뱃 속에서부터 창조하시었다.
그의 창조는 끝없이 신비하며,
그의 하시는 일이 기이하다.
내가 숨은 데서 지음을 받았다.
내가 어떻게 주 앞에 숨기랴!

하느님을 피한다는 것은 나를 피한다는 말이다. 이 주께 나를 맡기는 일 외에 내게 더할 일이 있으랴! 이러한 생각에서 이 시인은 주께 감사하며 "하느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라고 찬양한다. 즉, 나를 주목할 때 나는 도피하고 싶었으나 하느님의 편에서 생각할 때 내게는 그런 불안이 필요없고, 오직 찬양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품에 대한 새로운 감격의 재발견이다. 그는 자나깨나 주와 함께 있음을 알고 감격한다. 하느님을 도피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안에 신이 현존하는 증거이다. 그는 나의 존재근거이기에 나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하느님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할 것을 인식한 그는 이제 이 하느님 편에 서서 생각한다. 그래서 그 하느님을 위해서 살려고 한다. 여기서 원수에 대한 복수심과 하느님을 위한다는 생각이 결부되어 정열을 일으킨다.

하느님이여! 주께서 정녕 악인을 죽이리이다.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저희가 주에 대해 악하게 말하며 …
여호화여 내 어찌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않으며,
주를 치려 일어나는 지를 한하지 않으리까!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19-22절).

이제 이 시인은 자신이 마치 하느님의 파수꾼인 양 자부한다.

종교적 신념이란 언제나 위태하다.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많은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이러한 신념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심정에까지 도달하고 곧 행동에 옮겼으면 그는 광신자(狂信者)로서 살인자가 될 것이다. 그가 이러한 복수심에 그대로 사로잡혔다면 결국 신의 뜻을 다시 배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다시 옳은 자세로 돌아간다.

하느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절).

요행히 그는 자기의 신념을 곧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신념이 옳은지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는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래서 방금까지 도피하다가 안되니까 없애버리고 싶던 전지전능한 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다시 하느님이 철저히 자기를 감시해 줄 것을 기원한다.

5. 끝말

수천 년전의 한 시인의 신에 대한 마음의 행로 한 구석을 보았다. 이 시인은 비록 수천 년전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실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자명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그에 대한 물음은 바로 나의 존재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신을 묻는 것은 바로 자신을 묻는 것이다.


|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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