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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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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고발
1. 종교의 정의

종교를 고발하려면 먼저 근본적인 기초작업이 정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선 종교에 대한 정의다. 다음은 고발자의 입장이다. 즉, 고발자가 어떤 입장에서 출발하느냐가 문제이다. 즉, 사회, 정치, 경제의 각도에서 출발하느냐 아니면 인권이라는 입장에서 출발하느냐? 아니면 그 종교의 현상을 그 종교의 본질에서 파악하느냐, 인간의 엑 스타시적인 현상 중의 하나로 이해하느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최측의 입장은 퍽 애매하다. 우선 포스터가 나오는 바로 그 날에 교섭한다는 점과 또 말하라는 것이 퍽 애매했다. 적어도 심포지엄이라면 우선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가설적인 정의를 먼저 내리고, 이런 각도에서 고발할 것이 있느냐 해야 할 것이며, 또 근대화면 근대화 그 자체의 본질에서 말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자기 입장에서 남을 또는 남의 입장에서 자기를 보는 일정한 방향과 입장이 정립되어야 심포지엄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심포지엄은 그런 것이 없으니 결국 강사들이 각기 제 소리하게 될 것이고, 나도 결국 그런 소리를 한마디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많은 종교에 대한 정의 중에 종교는 참된 인간의 자유를 그 목적으로 한다는 입장에서 풀려고 한다. 이런 전제에서 종교의 일반 현상에 초점을 두고 출발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구속할 뿐 아니라 인간을 협박, 굴복, 내지는 생사권마저 장악하게 하는 우상을 만드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 종교현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상이란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해서 인간 사회에 군림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 안에서 구체적인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면(현상적으로 보면 그렇다), 타부(Taboo)나 토템(Totem) 같은 것을 내세워 인간을 위협하는 원시종교에서부터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해서 인간의 자유는 물론 그 생명을 마음대로 변조하는 공산주의까지도 종교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한다.

원시종교는 일정한 지역, 물질 등을 절대화해서 사람의 자유를 구속했고, 소위 고등종교는 어떤 인물이나 제도 또는 교리 같은 것을 거룩한 것이라고 규정해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 인간의 비판의 자유를 구속하고 나아가서 그 영역을 거점으로 폭군적이게 하는가 하면, 현대에 와서는 어떤 이데올로기가 절대화되어 법 이상의 권한을 가져 인간의 자유를 구속한다. 민족지상, 국가지상, 주의지상 따위는 결국 이러한 우상에 불과하다. 그 배후에는 이름짓지 않은 종교적 계율과 본질상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다.

참 종교의 역할은 그것을 '불'(佛)이라고 하거나 'Gott'라고 하거나 하여간 초월적인 절대자를 주장하는 것은, 본래 이 인간 사회에는 절대란 없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인간은 모든 기존적인 것에서의 자유, 그럼으로써 인간은 주체적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절대자를 땅 위에 있는 어떤 것과 일치시킴으로써 그 본래 뜻을 역행한다.

상대적인 것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종교다. 이 점에서 불교 같은 종교가 철저하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상대 적이라는 주장은 이원론적인 인간관을 낳게 함으로써, 인간을 '현실에서의 도피'라는 무책임한 존재로 만든다. 사실은 상대적인 것만 있는 현실에 인간이 산다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구체적인 사건들 안에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해야 하는 책임적인 존재이게 해야하는 것이다. 어떤 주장으로든지 인간을 책임적인 존재에서 도피하게 하는 것이 종교라면 그것은 우상이하는 일이며, 그 우상은 원시적인 모습이 현대적인 언어로 자리만 이동한 증거다.

2. 기독교

내가 기독교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서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제한한 것이다. 현금에서 가톨릭과 신교가 한 길로 가는 것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으니까 신교를 가톨릭의 상반개념으로 강조할 수는 없다. 그 대신 프로테스탄티즘을 중세기 기독교와 상반된 점을 굳이 지적한다면, 그 출발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 초점이다. 법황(法皇)의 절대권, 교회제도, 교리의 절대화 그것을 우상으로 선언하고 출발한 것이 신교이다. 그것은 옳은 출발이다. 하늘 아래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지상 명령을 받아들인 결단이다. 그러나 그렇게 출발한 신교는 여러 가지 또 다른 우상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첫째는 성서주의, 둘째는 교파주의, 셋째는 개인의 종교 경험의 절대화 등을 신교가 만들어 낸 대표적인 우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의 한국 신교에서 판치고 있다. 그것들이 우리네의 토착적인 종교심과 결합하여 여러 가지 특유한 현상을 빛어내고 있다. 그 중 몇 가지만 예거하면 첫째는 성서축자영감설로 나타났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고집이다. 성서학에서 이미 성서가 형성되어 전승된 단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설령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에게 그 원본이 없으며 사본에 차이 있는 것이 많아서 선택할 수 없어 병행시킨 것도 많다.

둘째로는, 각 교파의 교리지상주의이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분열과 분쟁의 모든 발화점인데, 그것은 가톨릭의 해석권 독점에 저항하고 나은 자체에 대한 반역이다.

셋째로는, 신비주의에 샤머니즘과 야합하여 구복신앙 내지는 개인 중심적 신앙 양식을 만들어 냈다. 그런 현상은 종교적 이기주의자만 만들어 냄으로 성서의 기초를 흔들고 있다. 따라서 수없는 우상 밑에 깔려 자유를 찾아온 인간은 오히려 질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서와 하느님을 직접 일치시키고, 종교교리와 하느님의 뜻을 일치해, 개인 경험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키는 따위는 이것은 모두다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것들이고 그것이 바로 오랫동안 저주해 온 우상 그것이다. 그러면 종교는 어떠해야 할까?

3. 참 종교의 제 모습 찾기

과거의 종교가 그러했다면 이제부터 즉, 미래의 종교는 어떠해야 할까? 나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 복고주의인가? 아니, 그것은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먼저 긴 역사에서 절대주의 화석화된 것에 탈출해야 한다. 따라서 미래의 모습은 그 본질에의 회복과 유리될 수 없다. 여러분은 종교의 미래상을 물었는데 그것은 상황이 달라짐으로써 그것에 맞게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제시한 물음인줄 안다. 그런데 미래상은 제 모습을 되찾는 데 출발하여 그 본래의 정신을 끝까지 관철함으로써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미래상은 사람이 만들면 벌써 그것은 순수 미래는 아니오, 과거 또는 현재의 투영(투사)에 불과하다. 미래상은 오게할 것이지 그것을 구상하면 벌써 새 가능성은 아니다.

종교는 제 본래 모습에 돌아가라 그것이 종교개혁의 지름길이다. 그러면 본래 모습에로 어떻게 돌아가나? 그것은 역시 우상타파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위에서 종교전반에 대해서 말할 때 종교의 사명은 우상타파에 있다고 했다. 종교는 고발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그 고발을 신솔하게 수용할 때 제 모습을 찾는다. 기독교도 오고 있는 미래에 어떤 형태로나 '절대'화하는 것에 안주하고, 그곳에 인간을 안주시키려고 하는 일체의 책동을 타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마침내 자기 절대화에 빠져서 자체가 우상이 돼 버린다. 그래서 스스로를 또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절대화한 종교는 '너를 위해서', 즉 '인간을 위해서'의 우상타파가 아니라 자체와 상반되는 것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타파한다면서 결국 이해관계에서 자기 이익을 관철한다. 즉, 기준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결국 우상과 우상과의 싸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종교재판의 진상이다. 기독교의 절대화된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과 싸운 것 등이 그런 예이다. 그래서 갈릴래오를 죽이는 따위는 과오를 범했고, 현금에도 생사권이 없어서 못할 뿐 교권싸움에서 경쟁대상을 우상으로 규정하고 그 타파를 주장한다. 그러나 제 모습에로 돌아가려면 자기타파, 자기부정이 앞서야 한다. 즉, 과거에서의 탈출이다. 이것이 본래의 모습에 돌아가는 길이다.

예수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라'고 했다. 이것은 종교는 종교로서의 자기마저 부정해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종파주의, 교파주의에서 탈출해야 하나에로의 길로 들어서는 길이고, 성속의 차별을 자양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길이다.

그런데 종교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초월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참 종교일 수 있다. 이 말은 그럴 수 없으면 참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기독교가 정말 하느님을 역사의 주재자로 믿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기초월은 가능하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은 무조건 내맡김이다. 그런데 서구 사회의 자아의식이 발달되고 마침내 개인주의(Individuism)가 발달하는 데 오염되어 신앙이란 자아의식 나아가서는 자아욕구를 날카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도 결국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의 행복을 더할 때만 참 나의 신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기도'는 바로 욕심의 몸부림이 되고 만다. 이 점에서는 불교나 노장사상에서 중요시하는 무허무위 등을 겸손한 자세로 받아 들여 믿음의 참 모습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나 교권 그리고 신앙으로 자기를 무장한다. 그리고 기도나 심지어 봉사까지도 자기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아는 경향이 많다. 이에 대해서 자신을 무의식에로 몰입시켜 버리려는 불교의 목표는 믿음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규정도 없이, 그 이름마저도 그리고 존재마저도 확인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완전 무장해제하되 무의식에로까지 몰입하려는 것은 무조건 무엇엔가 내맡겨 버리는 신뢰의 철저성의 발로 아니겠는가! 이렇게 되면 자기부정, 자기초월을 위해 새삼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방향 설정이 옳지만 그것이 실천가능한 지는 별 문제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충만'이라는 것을 즐겨 쓰고 그것을 소망하고 있으나 예수의 형태나 자기를 철저히 비우는 데 있었다. 그의 십자가 사건은 철저한 자기부정 행위요, 신 부재의 현실에서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버리는 신을 끝끝내 믿음으로 신앙의 참 모습으로 제시했다. 그는 무에서 신앙이란 인공위성같은 믿음을 쏘아올렸다. 버림을 받았음을 인식하면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응답이 없는 채 숨을 거두면서도 그의 품에 온몸을 내맡기듯 죽어갔다. 여기 그리스도교의 본 모습이 있다.

(1969, 서울 문리대)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종교고발
성서와 종교
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 본 회개
하나님, 이웃, 나의 관계
의식 종교와 사랑
율법을 지키는 일과 참 복종
전통(유전)과 하나님의 뜻
두 질서
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순교자 개념의 어제와 오늘
신약에서 본 교회사의 한 단면
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비유와 설교(1)
비유와 설교(2)
혁신과 보수
하나님의 나라
 
제4부 한국 신학의 과제
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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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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