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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종교
1. 주제

이번 학회의 주제가 '성서와 종교'이다. 나에게 주제 강연의 책임이 통고되었을 때, 그 요청하는 바를 물었다. 즉, '종교의 문서로서의 성서를 밝히라는 것이냐?' 아니면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성서적으로 해명하라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번에 함께 참여하는 외국 친구들이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라는 사실이 이런 주제를 설정하는 데 요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따라서 본인은 후자의 경우 즉, 성서에 있어서 종교 또는 종교들이 어떻게 취급되었나하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밝히는 것이 나의 과제라고 이해했다.

그리스도교는 마호메트교와 더불어 가장 배타적인 종교로 알려져 왔다.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불교나 그 이외의 종교들에 비해서 극히 배타적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마저도 주류와 바주류 사이에 알력이 가장 심한 종교였으며, 그것은 주류가 세력을 가졌을 때에는 '이단자 색출'과 그 '처벌'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분파현상 이 일어나 상호 적대시하는 역사를 빚어왔다. 그 이유가 사변에 있는가? 사람들은 쉽게 성서 자체의 성격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 나의 과제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것은 성서 전반을 대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는 구약과 신약을 나누어서 설정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나는 신학을 전공하는 자일 뿐, 구약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주제와 관련에서 볼 때, 양적으로나 질로 보아서 구약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이라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며, 따라서 본인은 본인의 논점을 신약에만 제한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구약을 뛰어 넘어서 오늘의 주제를 다룰 수가 없다. 까닭은 신약은 구약을 대전제로 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둘은 종교들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같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인이 신약을 전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함께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한 시각을 가졌을 뿐 구약의 지식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나의 논점은 여기 참여한 구약 전문가들에 의한 보충과 시정을 전제로 할 것이다.

2. 구약의 경우

종교현상으로서 본 구약 또는 종교들에 대한 구약의 현상을 분석하려면 크게 다음 네 단계로 구분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탈이집트에서부터 광야 유랑기; 둘째, 가나안 정착으로부터 지파공동체; 셋째, 국가형태를 띤 다윗 왕조기; 넷째, 국가 붕괴에 따른 포로기에서 시작하여 형성되는 유대교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경우를 중심하여 비교해 볼 것이며, 그것을 분명히 하는 범위에서 기타의 경우도 참조할 것이다. 그러나 단, 그 현상들에서 분명한 차이를 이루는 이유의 배후를 물을 때에는 그 시대적 조건에 대하여 언급할 것이다.

첫째, 우리는 우선 구약에서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의 폭이 상당히 넓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것은 우선 신의 이름에 관한 것이다.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탈이집트 즉, 모세 이래로 특히 광야에서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출 3장 이하; 호 12:10; 겔 20:5). 모세 이전에는 야훼신앙(출 3:1 이하; 6:1 이하; 수 24:2, 14-15)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에서 '야훼 외의 다른 신' 또는 '신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 'el'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이 이 'el'이 아카드어로 'ilu'라고 한다. 이 낱말은 페니키아, 남부 아라비아에서도 발견된다. 이 낱말의 어근은 '힘'을 뜻한다. 구약에서는 이 'el'이라는 신의 이름이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여러 가지 부가어들과 결합되어 이용되기도한다. 가령 'el shaddai', 'el elyon', 'el olam', 'el bethel', 'el roi', 'el berith', 'el elohe', 'israel' 등등이 그것이다. 'el shaddai'는 산악지역의 지역신이고 'el elyon'은 'israel'이 성립되기 이전 시기의 예루살렘 지역에서 제의 때에 사용된 것으로 '지극히 높은 신'을 뜻한다(이것은 창세기 14장 18절에 '살렘 왕 멜기세덱'에서 '살렘'이 '예루살렘'을 의미한다는 것이 사무엘하 18장 18절에 의해서 입증되며, 시편 76편 3절에도 '살렘'이란 지명으로 '예루살렘'을 나타내고 있다). 'el olam'은 고대 가나안 성소와 관련된 신이며(창세기 21장 34절), 'el bethel'은 베델의 신이 아닌 또 다른 신이며(창 31:13; 35:7), 'el roi'는 사막에서 헤매던 하갈을 구해 준 신이다(창 16:13). 'el berith'는 세겜동맹체의 신이다(삿 8:33; 9:4). 이 신은 하피루(Apiru)의 신이다. 'el elohe', 'israel'은 이스라엘이 민족으로서 등장한 이후에 사용된 신명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el elyon'과 'el olam'을 뺀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산악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사회경제사적인 배경을 암시해 준다. 이 점은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그리고 'el berith'가 Apiru의 신이라는 점을 다시금 명기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el elyon'과 'el olam'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과 브엘세바를 정복하고 그 지역의 신을 야훼의 신앙과 결부시켰음을 암시해준다.

우리는 '족장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에서나 복수를 뜻하는 'el olam'이 많이 쓰여지는 것 등에서 그것이 종교적 현상으로서 다신론이냐 유일신론이냐하는 논의에 돌려버리기 쉬운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을 형성한 저들이 단일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다른 신들을 믿고 있던 여러 부족들이 어떤 이유에서 결속된 것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였음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유일신이 아니라 오히려 다신론적 흔적이 뚜렷한 복수적인 표현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대로"(창 1:26)라고 한 것이든지, 여호와가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신들에 의해서 둘러싸인 듯한 묘사(열상 22:19; 욥 1:6; 시 82:1; 89:7; 95:3) 등등의 이러한 현상들은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혼합현상인데, 그것은 종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작용하므로 이루어지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경제사적인 요인이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 앞서 온 현상이다. 우리는 최근 구약학계에서 가나안 정복설에 대하여 봉기설이 우세한 것을 알고 있다. 가나안 지대에는 다수의 군주들이 있었고, 거기에 속하는 농노들이 살고 있던 지대들은 산악지대였다. 그리고 가나안의 들어간 하피루들도 산악지대를 점거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그곳으로 들어간 하피루와 가나안의 민중들이 공통적인 정치경 제적 조건하에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들이 결합하여 제 군주들에 대항하여 종족동맹을 형성하는 것은 결사적인 결단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치경제사적인 조건이 저들에게 종교혼합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정치경제적인 생존문제 앞에 종교적 관용이 쉽게 이루워졌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el'의 신을 믿은 계층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el'은 'el berith'가 고대 근동지역의 기층민들이 하피루의 신이었던 것처럼 하층계급의 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야훼신이 하피루의 신이었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구약에서는 이른바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사에서처럼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았다. 다음에 이야기될 바알신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국가 형성 이전에는 별로 긴장된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von Rad).

그런데 이러한 관용성이 군주국가체제를 갖추어 감에 따라 배타적인 경향으로 기운다. "여러분은 이제 야훼를 경외하며 일편단심으로 그를 섬기시오. 여러분의 조상들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도 섬겼고, 에집트에서 섬겼던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수 24:14, 15). 이것은 일신론(Monotheism)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은 정치경제적인 동기에 의해서 결속된 지파에 의해서 형성된 공동체가 내적 통일을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Mono-Yahwism은 제군주들의 속박에서 해방되기 위한 하피루들의 결속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출발한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다윗에 의해서 무산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야훼신앙은 성전종교로 둔갑하여 다윗 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는데 이르는데, 이것은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성서에 나타나는 제신들 중에는 순수 민(民)의 종교의 대상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국가권력을 동반하고 있다. 한 예를 들어보자. 사사기 10장 6절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히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불레 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며 여호와의 신을 섬기지 아니하므로…

여기에서 보듯이 여러 신들의 배후에는 종족이나 국가권력이 있다. 그러므로 종교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그것은 어떤 종족이나 군주들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 이럴 경우에 성서는 그런 것을 준엄하게 거부했다. 솔로몬 왕이 많은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바로의 딸을 위시해서 모압, 암몬, 에돈, 시돈 그리고 헷 등에서 여인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여호와께서 일찍 이 이 여러 국민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통하지 말게 하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들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왕상 11:1-2)고 한다. 이 경고에서 보듯이 저들의 종교들은 바로 저들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사실상 솔로몬은 이런 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저들의 신단을 지었으며, 왕비들의 유혹대로 그들의 신을 섬겼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신들 뒤에 숨어 있던 군주들이 이에 따라 이스라엘을 쳐들어와 솔로몬 왕국은 위기에 처하곤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두 가지 예만 보기로 하자. 하나는 이집트의 파라오요, 다른 하나는 바알신이다.

모세와 이집트 왕 파라오의 싸움은 실상은 야훼와 파라오신의 싸움이었다. 이집트는 제4왕조인 호루스(Horus) 때부터 왕의 이름 앞에 파라오를 붙였다. 호루스 때부터 왕의 이름 앞에 파라오를 붙였다. 호루스는 전능한 '하늘의 신'이며 그것이 수육화한 것이 바로 '파라오'이다. 호루스의 눈은 해와 달이고 그것은 매의 모습으로 그 날개는 하늘을 덮고, 창조의 힘인 이른바 'ka'를 보냄으로써 권력의 거점도 되며, 생산의 근거도 된다. 그러므로 파라오는 야훼의 신앙과 정면충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바로 파라오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는 것은 종교적 신앙 따위는 아랑곳 없는 정치적 야합이다. 이에 대하여 출애굽기에 서술된 파라오와 야훼의 대결은 대조적이다. 그런데 그것은 표면상으로는 종교적 대결이지만, 실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계층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야훼가 이겼다는 것은 곧 하피루의 해방을 뜻한다. 이것은 종교간의 투쟁이라는 것이 계층간의 이해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의 한 실례이다.

바알은 열왕기상 11장 1절에서 복수로 제시된 것에서 보듯이 한 종족에 매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서 소유자를 뜻한다. 'Baal-Peor'(바알-부올, 민 5장; 3:5; 신 4:3), 'Baal Hebron'(바알 부린) 등등이 그런 것을 나타낸다. 일정한 기간까지 이스라엘은 바알신앙에 저항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영향을 많이 받은 흔적이 있다. 그런데 바알신앙이 이스라엘 왕국 성립 이후 가나안의 봉건제도와 왕권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할 때부터 예언자들의 바알신에 대한 강렬한 투쟁이 일어났다.

구체적인 것으로는 여로보암 2세 때의 토지제도의 변화와 아합 왕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토지를 왕권으로 빼앗듯이 권력과 소유권이 밀착되고 그것이 바알신 사상(이세벨)과 밀착됨으로써 경제적 부의 집중현상이 일어남으로써(왕상 21장) 바알신에 대한 투쟁이 벌어졌다. 갈멜 산에서의 야훼신과 바알신의 대결은 역사적으로 바로 그 산에서 야훼신단과 바알신단이 편갈리는 전투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하여간 바알신은 그것이 이세벨의 본국 시돈이거나 이스라엘 왕 아합이거나 그들의 권리나 부를 보장하는 이데올로기가 됐을 때 그것을 거부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바알신과 싸움은 그 배후에 있던 경제적 계기가 주요인이며, 그러므로 그것이 일정한 민족이나 국가에 매어 있지 않은 데서 보듯이 한 민족 또는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계급의 이데올로기였다고 보여진다. 그렇게 출발된 것이 점차 우상의 상징처럼 됐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십계명의 첫 계명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 '어떤 상도 만들지 말라.' 이것은 Mono-Yahwism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른 종교와의 경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절대군주제에 대한 거부가 그 본래의 의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신약의 경우

불트만은 『고대 종교들의 틀 속에서 본 원시 그리스도교』(Urchristentum im Rahmen der antiken Religionen)에서 그리스도교와 관련된 종교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1) 구약의 유산, (2) 유대교, (3) 희랍의 유산, (4) 헬레니즘. 이 헬레니즘 안에서 스토익파의 현인들의 사상, 천체종교, 운명신앙 그리고 점성술, 신비종교 그리고 영지주의를 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같은 제반 종교들의 현장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혼합주의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신약에 있어서 유대교를 제외한다면 어떤 특정의 종교를 집중적으로 거부하거나 비판한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점성술이나 신비종교 또는 영지주의 등 당시 그레꼬-로마 세계의 종교적 표상들을 도구로 수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에게서는 다른 종교에 대해 시비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군중들과의 접촉에서 그는 어떤 다른 종교적 습성이나 욕구 등을 배제하거나 정리하려는 흔적이 전혀 없다. 가령 저들이 예수에게 병고쳐 주기를 바라서 몰려들었고 저들이 예수에게 일종의 신앙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단 한번도 그 신앙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구분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고유성을 정립하려는 태도는 흔적도 없다. 오히려 저들의 소원에 그대로 끌려가듯 응하는 것이 그의 자세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로 상징되는 유대교와의 충돌은 계속 반복되어서 복음서들은 그것이 그를 죽음에까지 몰고 간 것처럼 서술한다. 그러면 그것은 종교적 경쟁현상인가?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복음서 기자들의 바리사이파에 대한 평가다. 그 중에서 구체적인 지적들을 지적해 보자. 첫째는 저들에 대한 예수의 비판이다. 그 비판은 마태오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확대된 것이고 비교적 짧으나 정곡을 찌른 마르코의 것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는 것과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과부의 집을 삼키며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으리라(12:8-40).

이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저들이 대변하는 유대교 자체의 내용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 그것을 대표하는 저들의 행태를 비판한다는 사실이다. 비판의 대상인 저들의 행태는 저들은 상류계층의 형세를 한다는 것이요, 둘째, 저들은 위선적이라는 것이며, 셋째로, 저들은 약자(과부)의 재물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로서가 아니라 계급으로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러한 작태가 여러 모습으로 비판되고 있다.

다음은 저들을 예루살렘과 결부시키다는 점이다. 하시딤(Hasidim)이 하스몬 왕가에 실망하여 다시 탈예루살렘할 때, 바리사이파는 예루살렘 잔류파가 된다. 저들은 얌니아(얀내우스Jannäus, 주전 103-76) 왕 때에 박해를 받을 정도로 민(民)의 편에 섰으나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주전 76-67) 시대에 세력권에 수용됨으로 변질하게 됐다. 저들의 국민 운동이 기층 민중을 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마침내 저들은 모두 죄인으로 정죄하게 되는 체제를 만든 것이다. 저들은 그들이 만든 체제를 지킬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계층만 상대했고 그것을 지킬 수 없는 가난한 다수를 수용하지 않았다. 저들은 산헤드린의 실질적 지배 세력이 됐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과 예루살렘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바리사이파가 헤롯당과 야합하여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는 간단한 지적이다(막 3:6). 이같은 지적이 또 한번 있다(12:13).

헤롯가는 유대인 전체가 증오한 대상이다. 그가 로마의 철저한 충복으로 이스라엘을 수탈한 것도 물론 그 이유이지만, 그 혈통이 이두매아계라는 점에서 멸시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는 토라(Tohra)로 무장한 민족주의자들이다. 그러한 저들이 목적을 위해서 바로 그 헤롯세력과 야합했다는 것은 그 체질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헤롯당이란 신약에서 마르코 자료에만 나온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견해가 분부하다. 헤롯의 부하들, 헤롯가의 세력을 등에 업은 유대인들인가? 그러나 여기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요는 그것이 헤롯가의 정치세력을 등에 업은 부류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만약 이것이 예수 시대를 반영한 것이면 헤롯 안티파스(Antipas)여야 한다. 그런데 헤롯 아그립빠 1세(41-44)가 한 때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팔레스틴에 군림했을 때 그리스도교를 배격하기 위해 바리사이파와 야합한 일이 있다. 따라서 이 지적은 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됐을 수도 있다.

이러한 바리사이파와의 충돌이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적 충돌이라고 볼 수 없다. 바리사이파의 견지에서는 그랬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 운동의 견지에서는 오히려 민중을 억압하는 세력과의 충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리사이파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예루살렘과 성전이다. 예수는 그의 생의 최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진했다. 예루살렘은 그의 운동의 마지막 대결의 장으로 삼았다. 이것은 그 당시의 탈예루살렘파들과 맥을 같이한다. 에쎄네, 젤롯당 등은 한결같이 부패한 예루살렘을 숙청하는 것을 목표로했는데, 그것은 하시딤에서 시발된 것이다. 마르코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전기적 단편을 전승하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서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10:32). "놀라다", "두려워하다" 등을 누미노제적 표현이라고 봐야 할 이유는 없다. 이것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낸 것이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사영지(私領地)이면서 왕도(王都)가 된 것이다. 다윗은 그 곳에 야훼신의 법궤를 유치함으로 신전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야훼신을 다윗 왕조의 이데올로기화하는 정략정책이다. 다윗과 그 세력은 예루살렘을 성도화(聖都化)했으며, 다윗 왕조의 정통성뿐만 아니라 세습화 그리고 영구화의 길을 터놓았다. 그러므로 마침내는 이제 올 메시아 왕국의 성도로 삼기까지 된 것이다.

남북왕조가 패망된 이래 예루살렘은 역대로 외세와 야합하여 기득권을 수호하는 어용세력으로 유지됐다.

성전은 예루살렘을 있게 하는 핵심이다. 성전의 대사제가 동시에 산헤드린의 장이었다는 것은 그것이 순수 의식종교의 본산이 아님을 말한다. 성전은 유대 민족의 이름으로 점령 세력과 협상하는 중심적 담보물이었다. 성전을 중심한 헤게모니 싸움은 곧 정치세력의 싸움이었다. 종교 귀족은 곧 정치세력이었던 것이다. 성전을 미끼로 경제적 수탈행위가 인정되었다. 그 대신 성전 안에 점령세력의 신단을 허용한 것이다. 그것은 그 세력을 인정한다는 강력한 표시다. '황폐하게 하는 가능한 것'(막 13:14)이란 바로 그것을 두고하는 말이다. 이런 일들이 모두 야훼의 독점권 주장 아래 자행했던 것이다.

이러한 예루살렘에 예수 일행이 돌입하여 성전 숙청을 했다는 얘기는 아직도 그 정확한 진상이 규명되어 있지 않으나 예수의 반예루살렘, 반성전 사건을 일으켰움이 틀림없으며, 그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문제인 것이다.

바울에 있어서 타종교에 대해 시비하는 것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레꼬-로마 영역의 종교현상에 대해서 관용하거나(방언문제, 열광현상 등)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대율법 자세를 유대교와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를 하나의 타종교로 보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한 책 즉, 토라 해석의 투쟁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교리싸움으로만 보아 버려서는 안 되고,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보아야 옳다. 종이 아니라 아들됨,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아방 인, 종과 주인, 남자와 여자의 간격이 철폐된다(갈 3:27-29)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바울의 선교활동을 보도한 루가는 좀 더 폭넓게 헬레니즘 영역의 종교들을 포용하는 바울을 소개한다. 그 중 아레오파크의 바울의 설교(행 17:16 이하)가 대표적이다.

알지 못하는 신은 판테온(Pantheon)이었으리라. 그런데 저들의 종교심이 깊다고만 하고 아무런 비판이 없고 '알지 못하는 신'에 그리스도교를 접붙이려고만 한다. 이 서술에 대해 지금까지의 서구의 성서학에서는 그것은 바울의 말이 아니며 그리스도교의 입장일 수 없다고 하여 고립시켜 버린다. 바울의 서한에 나타난 바울의 입장과 비교하면 거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리스도교의 독점권 수호 내지 절대주의에 입각해 있음으로 그 종교들 자체에 대한 분석 이전에 내리게 되는 결론이다.

또 하나의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교가 묵시문학을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미 후기 유대교가 묵시문학의 영향권 안에 있었지만 예수도 묵시문학권에서 이해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미 나라를 잃은 민족으로서 그것을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신약에서 도처에 묵시문학적 틀이 깔려 있음을 보는데, 그것이 본격화되어 표현으로 나타난 것은 로마제국의 카이저 숭배가 강요되었을 무렵이다. 묵시문학은 그러므로 중동의 저항의지를 상징적인 종교언어로 나타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될 것이다. "종교보다 더 큰 것은 해방이었다"고 말이다. 해방을 위해서는 종교간의 담도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성서 전체의 결론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성서를 근거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토록 배타적이 됐나? 그것은 성서가 캐논(Canon)화 되고 교권을 확립하고 마침내 강자의 이데올로기화될 때 비롯된 것이다.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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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인간혁명
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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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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