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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해방과 참여의 신학

이렇게 살다가는 부조리 자체에 그치지 않고 인류가 다 망한다는 급박한 종말의 위협을 앞에 놓고 사회개혁을 촉 구하는 것이지요. — 안병무

오늘날 신은 보다 나은 자유정의에로 역사가 추진할 어떤 힘을 의미하지요. 힘이다, 참여하라, 이렇게 해방의 신학은 말하지요. — 서남동

본회퍼는 사회현실을 몸으로 체험,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제시했다

서남동: 현대신학은 오늘날 대체로 본회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본회퍼에서부터 시작해서 종교화다, 세속화다하는 것이 신학적인 발전이라고 할까 매듭이 바뀌어지지 않았는가 보여집니다. 그를 기점으로 해서 볼 때 확실히 그 아전과 비교됩니다. 그 혼자 한 것은 아니겠지만 본회퍼 자신의 생활도 그렇거니와 표현도 확실한 기점이 되었는 데 세속화, 현실참여, 사회정의라는 개념이 부각됐습니다. 기독교라는 것이 내세적이거나 타세적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고 또 전통적으로 어떻게 교리적인 '도그마틱'한 그런 것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교회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내건 본회퍼의 통찰이 적중했지요. 현재까지 적어도 '교회신학' 하면 엄격하게 교회 안에 있는 신학과 교회 테두리를 관심하지 않고 넓게 하는 신학으로 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교회 안의 신학에 있어서는 '본회퍼'가 본 것이 주류를 이루고 현시점에와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해방, 즉 '리버레이션'이 교회 안의 신학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 있는데 역시 본회퍼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것에 연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또 WCC 총회가 명년에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서 열리는데 거기 주제가 누가복음 4장에 있는 "억눌린 자를 해방시킨다"는 예수의 처음 설교가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이나 가톨릭 교회에서 명년을 '성년'이라고 하고 구약에 있는 그대로 50년만에 한번 온다는 성년에 대한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제가 전적으로 해방 곧 리버레이션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라이프에 있어서 클라이막스에 접근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느낌을 가지는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안병무: 제 견해로서는 본회퍼가 오리지날하게 새로 시작한 것은 아니고 아무래도 그 본회퍼의 신학적인 사상은 두 배경을 전제하고 있는데, 하나는 1차 대전 이후에 칼 바르트(Kal Barth)가 소위 '비종교 운동'을 적극적으로 한 데서 찾을 수 있고 그 다음엔 신약신학을 하면서도 언어가 좀 문제는 되지만 '역사성'이라는 데 강점을 두었던 불트만(Bultmann)이었지요.

신학이라는 것을 인간학이라는 측면에서 굉장히 개척했고 비신화 화론이 극점에 이르렀는데 그런 면에서 역시 본회퍼가 두 전통을 이어와 그것을 발전시켰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단순히 강단신학으로서 이론적으로만 전개한 것이 아니고 독일이라는 현실에서 몸으로 구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는 종교와 일반사회와의 사이에 있는 담을 구체적으로 시인하고 이를 헐어야만 된다는 것을 실감했으며 그래서 그는 소위 '유신론', '무신론' 하는 담을 헐고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유신론을 전제로 하는 세계이다' 하는 전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감옥에서 실제로 체험했지요.

그가 사회구조, 사회현실을 구체적으로 몸으로 체험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을 실제로 적나라하게 제시했다고 하는 데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후에 소위 '혁명 신학' 등등으로 발전됐지요.

조직신학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람은 지금까지의 조직신학의 전통, 신학적인 계보 위에 서면서 거기에서 발전해서 현실 문제에 내려오려고 애쓴 몰트만(Moltmann)이 있고 그 다음에 독일의 경우 '죌레'라는 여자가 대중 속에 파고들면서 적극적으로 좀 더 구체적인 현실에까지 파고들어 오고 있어요.

현실 문제에서 출발해서 성서 내지 신학으로

그러나 같은 노선을 걷는다지만 몰트만이나 죌레 같은 사람도 다른 면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데 역시 이들은 전통적인 신학의 큰 주제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배경이 너무 막중해서 구체적인 현실에 못 내려오고 관념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몰트만이 비판받고 있습니다. 몰트만은 그들의 견해대로 하면 신학적인 전통 속에서 현실에 내려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된다. 현실 문제에서 출발해서 성서 내지 신학으로 소급해야 된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것입니다. 성서 자체에서 현실에 오는 것도 안 되고 기독교 전통적인 신학에서 현실에 오는 것도 안 되고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를 안고 그 문제를 가지고서 성서 또는 신학으로 소급하는 방법만이 길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이 기독교 신학에서 '사회윤리'라고 합니다마는 독일에선 이 분야에서 첨단을 걷고 있는 사람이 퇴트(Tödt)라는 사람이고 브라켈만(Brakelmann)인데 이 사람들이 제일 관심 가지는 것은 이론 즉 '테오리'와 실제 즉 '프락시스' 사이의 갭을 어떻게 메우느냐 하는 데 대해서 주저없이 실제에 먼저 들어가서 그것이 마침내 이론으로 가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취급한 현 세계문제, 평화문제라든가 계급문제라든가 해방문제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꼭 같이 다루어서 신학적인 것을 주장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람들은 역시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Pannenberg)같은 사람들도 너무 관념적인 영역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보는 것 같아요. 역사라는 것을 발견했다는 면이 이미 불트만 같은 이지만 사회라는 개념이 희박했고, 사회란 막연한 얘기가 아니고 '사회구조성'을 정말 발견하고 그것과의 싸움이라 할까 그 안에서 신학을 추구한 것은 퇴트나 브라켈만 그리고 숄(Shaul) 같은 선구자입니다. 조금 거슬러 올라 가면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도 사회라는 것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고 악도 개인의 악이 아니고 사회악이라고 했지요. 이들은 크리스천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을 본 사람들입니다.

서남동: 지금 그런 점에서도 역시 본회퍼 자신이 굉장한 어떤 자기 신학의 조직적인 무엇을 다른 신학자에 비해서는 많이 남긴 것이 아니 지만 그래도 기점이 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생각됩니다.

정치신학, 혁명신학, 해방신학 등이 나오게 되는 신학의 경향이 본회퍼 그때부터 신학의 박자라고 할까 무드라고 할까가 이미 달라졌다고 볼수 있지요.

그런데 지금 퇴트나 브라켈만의 관점에서 보면 본회퍼도 '현실에서 출발해서 성서로 소급했다'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안병무: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잘 모르겠지만 본회퍼가 히틀러 당시 결국 독재정권에 대한 해방운동에 참여하기 전에 신학적 작품이라는 것은 전통적 의미의 신학작품들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탈피된 것은 『옥중서한』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신학하던 사람들은 소위 강단신학인데 이것은 강단신학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고 새 출발을 한 것입니다. 삶의 실제 체험에서 새 출발을 했으니까 그것은 물론 조직 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두 경향은 나누어져야 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서남동: 전통적으로 성경이나 이어 받는 교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현실에서 출발했습니다. 혹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의 현실에서 소급해 간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이 대전환인 것 같아요.

현대신학의 길이랄까, 그 방법이 대륙 특히 독일신학은 항상 기독교와 당대 문화와의 관계, 좁게는 '이데올로기'-문화 관계를 다룬 것인데 영미 사람들의 신학전통도 큰 관심은 신학과 자연과학과 양립할 수 있느냐 어떻게 종합될 수 있느냐 이런 대조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어디에선가 얘기했어요.

어떻게 오늘의 신학이 신화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기점으로 해서 출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판넨베르크나 몰트만 이후는 신학도 역시 이 시대에 재래의 방식 이 적어졌다는 그것은 그 전통을 이어받는 사람한테는 의미가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현대지성 대다수가 서 있는 시점, 입각지는 그것이 아닌데 남의 자리에서 출발할 수 있느냐 그렇게 비평하면서 퇴트나 브라켈만은 지금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요.

미 사람들은 그런 신학하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니버든지 숄이든지 그 계통 이외의 사람들도 그 비슷한 평을 많이 해요.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현실적인 경험에서 출발했다', '새로운 과학적인 지식에서 출발했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그런 것은 공통적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안병무: 구체적으로 출발의 기점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통적 '진리'라거나 '신학', '성서'에 두지 않고 퇴트나 브라켈만은 사회현실 문제에서 출발했는데 그렇지 않고 다른 면에서 출발하는 기점을 예를 들면 자연과학이나 우주관찰이라든가 인간 자체, 인간성 자체에서 출발하거나 또는 자연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라든지 이런 데서 출발하는 것이 역시 서 교수가 전문으로 하고 계시는 숄, 떼이아르 샤르뎅 그런 사람이겠지요.

서남동: 달리 보자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신학의 2대 산맥이랄까 2대 구분은 역시 자연과학과 계시신학이라 하겠습니다. 교회의 신학은 항상 계시 전통에 대한 새 해석 또 해석을 되풀이해 나갑니다. 또 자연신학이라면 성서적인 욕망이나 욕구나 이런 것은 번지수가 어디인가를 다룹니다.

어떻든 오늘날은 주어진 전통, 좁혀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이라든가 계시라든가에서 출발하기는 상당히 어려워요. 또 신을 말한다 할 때에도 항상 신이 교회에서는 주로 구속자인 신을 얘기하는데 구속하시는 신은 요즘에는 더 강하게 되었다 할까, 분명하게 되었다할까, '해방시켜 주시는 신이다' 이렇게 되는데 성서의 신은 구속의 신만이 아니고 '창조의 신'이지요.

'창조'라는 것은 기독교 이외의 세계에서 '우주'라거나 '자연'이라거나 '세계'라는 말에 해당하는 성서적 용어이지요.

창조란 무엇이냐 이렇게 볼 때에 인간이 자연을 보는 안목, 자연에 대한 지식이 혁명적으로 굉장히 증가되고 새로워졌으니까 하느님이 자연 전체, 우주 전체를 창조하고 또 창조해 가시는 분이라면 새롭게 알려지는 창조, '자연 전체'라는 것은 뭐냐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의 이해도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의 전통적인 신이 현대지성에 대해서 점점 멀어지고 모호해지고 무력해지고 설득력이 적어지는 것이지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이 이미 낡은 후퇴된 과거의 자연관이나 우주론하고 결탁되고 만 그런 것이기 때문이지요. 새로 자연과학적인 지식이 반영되고 그것이 성서적 계시와 부합되면 기독교신학이 전체적으로 다시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가 있고 창조주의 복권이라고 할까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새로워지는 관계를 맺지 않는 한 기독교 창조신은 '교회안의 신'이지 교회 밖에서 통용되는 신 전체를 창조하는 신은 못되지요.

현대 지성인이 보는 전체 우주 창조 속에 있는 그런 신으로 다시 재현해야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도 현대적인 새로운 발견이나 지식에서 다시 역광선에 비춰서 보는 입장은 사회적, 정치적인 현실에서 출발해서 성경적인 것으로 소급해 간다는 것이 되지요. 결국 이렇게 보면 형식적인 진행은 비슷한 점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느낍니다.

이성 대 반이성, 자연 대 초자연 식으로 보지 말고

안병무: 이런 면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2차대전 전의 신학에서 눈을 크게 뜬 것이 역사라는 것과 인격이라는 것이지요.

2차대전 후에는 급전환되어서 이른바 자유주의신학이 발전 못되고 중단됐어요. 어떤 면에서는 그때에 대화가 중단되었던 것이 이제 다시 시작된 면이 있어요. '인간', '인간의 종교성'같은 것을 문제로하고 그런 대로 다시 돌아온 것 같은데 역시 불트만 같은 사람도 그런 측면에서 현대인은 신화적인 영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대전제 밑에서 '비신화론'을 내세웠는데 요즘 다시 문제로 되고 있지요.

현실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 과거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던 데 대해 저항운동이 일어났다고 보는데 그것은 요새 일종의 반문화운동과도 관련이 됩니다마는 기본 문제로 다루고 있지요. 그들의 제일 큰 고민은 이성주의랄까 이런 것에서 오는 '주객 도식의 대립'이지요.

그리스적인 전통을 가진 서구적 사고를 신학에 도입한 데서 현실이나 이성의 뜻이 좁혀졌다는 것이지요.

이를 다시 확대해서 현실이라는 것이 보통 생각되듯이 '인과율적인 현실'만이냐하는 전제 밑에서 이성에 관해서 소위 '로직'이라는 것이 전부 현실을 포괄하느냐 하는 데 대한 저항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다시 요새 신화에 관심을 갖습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어쨌든 인과율적인 것 말고 또 하나의 현실이 엄연히 있다. 여기에 대해서 관심하는 측면이 생겨서 다시 연구를 시작하고 있어요. 신약에서 나오는 기적도 이것을 단순히 우매한 시대의 신화라고 보지 않고 인간적인 것을 포괄하는 무엇이 있다고 보게 됩니다.

기존 질서라는 것은 인과율적인 바탕 위에 법, 도덕, 윤리라는 것이 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엄연한 현실이 있다. '하느님'이라고 할지 어떨지 하여간 현실을 한데 포괄하는 세계관이 성서 같은 데에 있다. 그래서 성서학 같은 데서 다시 전에 신화라든지 기적 얘기 같은 것도 우주관으로 이해하려고 하지요.

또 다른 측면에서 이것이 작용하지요. 현 기존 질서가 확고하게 아성처럼 버티는 데 대한 저항심도 모티브가 되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꼬집어서 누구다 하기는 어렵지만 상당히 여기 저기에서 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남동: 안 박사 말씀 그대로 같아요. 되풀이가 되겠지만 불트만이 '비신화화'를 제창하고 또 그 후에 본회퍼가 '비종교화'라고 했다고 해서 지금와서는 불트만은 신화라는 것을 이해를 못했다고 비평받고 본회퍼는 '종교'를 나쁜 의미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왔다고 비판을 받는데 어느 정도 그런 비평을 받을 만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마치 불트만이 신화화의 프로젝트가 전적으로 잘못된 양으로 생각한다든지 본회퍼가 기독교는 몽땅 비종교화해야 된다고 한 듯이 오해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요.

1백 퍼센트가 인정되는 시기가 지나고 차츰 인정도가 낮아지는 단계를 거쳐서 비판도 나오는 것인데 '비신화화', '비종교화'를 모두 잘못됐다고 주장하면서 신화를 어떤 의미에서 절대시한다든지 종교를 절대시하는 또 다른 잘못된 극단으로 신학의 세계가 발전하는 것은 곤란하지요. 그런 사람도 더러 있지요.

이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이성이 아니면 반이성으로 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역시 곤란합니다. 일찍이 틸리히 같은 사람은 엑스타틱 리슨(Ecstatic Reason) 즉 '황홀한 이성'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반이성은 아니지요 우리가 아는 이성은 너무 좁은 개념이라서 그것을 가지고 실제로 모두를 포착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못하거 든요. 거기서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겁니다. 틸리히는 '황홀한 이성'이라고 했는데 어떤 카운터 컬처 이론가는 비록 반문화가 반이성 적이라고는 하지만 좁은 의미의 이성을 넓힌다는 뜻에서 틸리히의 '황홀한 이성'에 동조하지요.

가령 과학의 본 바탕 속에서도 지금까지 전통적인 좁은 의미의 과학가지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얼마든지 있어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원리라든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라든지 양자역학이라든지 이렇게 물리적 실재에 대한 이해가 전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신학적인 사고에 어느만큼 도입되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익스트라센서리 퍼셉션 혹은 파라 사이콜로지라는 현상이 최근 문제되지요. 원격감옹이다, 초자연적 현상이다 하는 것이지요. 천리 밖에 있는 모자간(母子間)의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길이 있다고 하는 경험을 갖게 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연구하고, 생각한다는 소련(러시아)이 제일 많이 그런 면의 연구가 개발되고 있어요. 다른 나라보다도 제일 많은 투자를 이 '초심리' 문제에 투입하고 있거든요. 좁은 의미의 지금까지의 논리나 과학이나 시공간의 틀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이 현실적으로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에 와선 '초자연'이 아니고 '자연'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성 대 반이성, 자연 대 초자연으로 가지말고 더 최근의 우리들의 경험이나 지식에 의하면 이성이 그렇게 좁은 것이 아니고 '황홀한 이성'이며, 자연이 그렇게 물려받은 어떤 격식을 가지 고만 짜여진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지금까지 초자연이라고 했던 부분이 자연 안에 엄연히 있으며, 자연에 대한 개념이 깊어지고 넓어졌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성이나 자연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달라진 양상이 나타났다고 그것은 순수과학 자체 안에서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토마스 쿤이라는 사람이 『자연과학의 혁명』이라는 글에서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라는 유명한 말을 썼지요.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문법의 어미변화의 원형이 아닙니까. 과학에 있어서 패러다임이 달라졌다는 식이지요.

상대성원리나 양자역학은 뉴튼의 물리학도식 가지고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다른 차원이 실제로 나옵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범주표가 달라지는 셈이에요. 성뿐만 아니라 자연자체가 다른 양상으로 우리 앞에 떠오르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성서의 악마는 현대말로 '구조악'이다

안병무: 자연이 달라진 것도 이성이 달라진 것도 아니지요. 단지 어떻게 정의를 했느냐, 어떤 범위까지 금을 그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말할 때 이성이라면 그리스적 배경을 가진 누스(Nous)라는 범위에 그 틀을 가지고 그 현실을 다라고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다시 절감하지요.

지금까지 말해 온 자연이라거나 이성이라는 것을 놓고 현대신학이 제일 관심하는 것은 그 위에 모든 것을 건설하는 현금질서의 세계라는 데 문제가 있어요. 이성이라거나 자연이 자연 자체도, 이성 자체도 아니고 일종의 정의인데 그 위에 비교적 오래 건설된 현대질서가 형성됐지요.

그 위에 권력이라거나 현대질서가 형성되고 그 뒷받침을 이것이 하고 있게 되니까 절대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신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요. 그들이 정의하는 범위밖에 없게 되니까요.

신을 종교적인 것을 배제하고 세웠던 오늘의 현실이 문제가 되는 것이죠.

신학이란 어쩔 수 없이 다른 학문과 같이 현시대라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현재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있는 것이 되지요. 그래서 현대의 세계관과 싸우는 면이 있고 구체적으로는 사회구조, 권력구조, 경제구조 자체 소위 '구조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지요.

성서에서 말하는 악이라든지 죄를 개인의 윤리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생각했던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서 구조악이라는 생각이 굉장히 깊어졌고 악마라는 것도 현대말로는 주저없이 '구조악'이라는 말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기독교 안에서 사회윤리하는 사람들은 하고 있어요. '악마가 제거된다는' 말은 '기존 구조악이 제거된다', '악마가 없어진다'는 말은 '새질서, 새세계가 도래한다'는 말과 연결시킨다면 싸움의 대상은 지금의 구조악과의 싸움이 아니겠나 싶어요.

서남동: 지금 악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 할까, 새로워졌다 할까 했는데 전통적인 신에 대한 생각, 그리스도의 의미 영상에 대한 것도 이해가 굉장히 새로워지고 그것이 지금 세계적으로 신학의 초점이 아닌가 생각해요.

구조악이라 할 때는 정치적인 어떤 체제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통용된 어떤 잘못된 개념도 됩니다. 가령 여성해방운동도 암암리에 우리가 거기에 잘못된 개념을 만들어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마치 하느님이 만들어 내신 질서고 생리적으로도 그런 줄 알고 있는데 실제는 사회적인 문화적인 것 때문에 생겨진 어떤 편 견, 스스로 그렇다하고 자기한테 덮어씌우고 있는 그런 것이지요.

그런 신학의 하나로 현대에 가장 유력한 표본이 미국의 '흑인신학'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 모로 최근 신학의 가장 유력한 새 모형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신학 전체가 '해방의 신학'인데 타파해야 될 것은 피상적인 의미로 구조악이지만 내면에는 자기네들 의식구조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노예냐, 백인들에게 우리가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시키려는 투쟁인 반면에 우리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인식하려는 것 같은 양면이 다 있는 것 같아요.

재미있는 것은 밖으로 나가서 힘으로 제약하고 부수고, 개혁해야 승리의 목표에 도달한다는 점도 있지만 의식화 이론 같은 것을 보면 상당히 시사적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해방이란 뭐냐, 선언에 있다고 봐요. 내가 종으로 사는데 '내가 종 아니오' 하고 깨달아서 선언 하면, 목표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것이 요즘 신학의 요점이라고 생각해요. 심리요법 같은 것도 자기가 잘못을 인정하면 치유의 99퍼센트 이상이 달성된 것이거든요.

하여간 여러 모로 '흑인신학'은 예언자적인 전통, 성서적인 복음이 현대에 있어서 아주 구체화한 하나의 모델 같이 보여요. 나는 깊이 섭렵하지 못했지만 거기서 기독교 해방의 '메시지'가 뭔가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으로 등장한 것 같아요.

안병무: 저도 흑인신학을 그렇게 알지만 기본적인 자세는 기독교신학이 형성되는 데 있어 서구인들의 세계사적인 위치나 사고의 영역에서 형성, 고정화된 것 때문에 거기서 탈피하기는 어려운데도 그런 노력을 한다는 겁니다.

원래 기독교가 서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데도, 서구에 와서 체질화되었는데 거기서 탈피하는 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처음으로 흑인신학이고 여기에 거점을 우선 만들고 나면 어느 정도의 테제가 나오겠지요. 어쨌든 백인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정도로 과격하게 나오고 눌렀던 자기 의식을 되살리려고 하고 방법론도 완전히 갖춘다고 하데요.

하여간 현대의 특징이 신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신화적인 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측면에서 봐야겠지요.

가령 불트만처럼 인간의 실존이 폐쇄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나 미지의 미래를 향해서 자기를 개방한 상태가 신을 믿는 상태라고 하는 식으로 신을 파악한 데 대해서 지금은 신이라하는 경우 구체적으로 사회심리적으로는 현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거점으로 삼고 있지요. 언제나 신에 대한 신앙은 기존 질서에 폐쇄되고 차단되고 억눌린 데에 저항한 구체적인 흔적으로 파악하고 그런 면에서 자꾸 의식화시키거든요. '너는 여기의 주인이 아니다. 네 주인은 딴 데 있다' 하는 것은 사회심리적으로 보면 저항의 흔적으로 보고 있고 그런 면에서 신학이 점점 신의 이해를 다르게 합니다. 해방의 신, 우리를 탈출하게 하는 신아 굉장히 강조되고 아까 말씀한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의 말씀 "내가 온 것은 눌린 자를 해방하고 감옥에 들어간 자를 해방하고 병든 자를 해방하고 가난한 자를 해방하고 …" 이런 해방의 선포처럼 신은 역시 인간이 소원하는 기존 질서에 억눌린 데에서 해방해야 되겠다는 요청과의 합일된 어떤 실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해도 과거에는 도그마적으로 이해했지만 불트만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실존적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했지요.

지금은 그리스도가 어디 있느냐 실존 한복판이라고 하지 않고 사회 속에, 수난을 당하는 군중 속에, 할 말을 못하고 억울하게 눌려 죽은 자 속에 억울하게 죽는 깔려 죽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지금 찾게 되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 같은 것도 과거에는 비판할 여지가 굉장히 많고 반이성적이고 광신적인 데로 끌어가기 쉬웠지만 지금은 다른 측면에서 굉장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역시 제도화되고 구속하고하는 기존 질서에 눌려 있을 때 '성령'이라는 것이 카테고리나 틀을 탈출할 수 있는 굉장한 실제적으로 심리적으로 힘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단 꼭 신화적인 것이나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요청적인 것을 해방해야 되겠다, 혹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중요한 거점이 된다 해서 자꾸 사회적인 측면에서 과거에 기독교에서 말한 도그마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운동이 신학적인 중요한 경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서남동: 같은 얘기인데요. 전에도 그런 깨달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 지만 눌린 자를 해방한다, 억눌린 자를 신원(伸寃)한다, 그것이 신의 뜻이고 신의 명령이니까 우리 크리스천은 종사해야 된다는 말로 그치지 않고 요즈음 신학적인 표현은 "신이 하신다"고 씁니다. 신이 우리를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억눌린 자를 해방하시고 있다." "약소 민족에 대한 해방과 독립을 지켜가신다", "신이 지금 하신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거기에 참여하고 종사하라고 부름을 받는다" 하는 표현을 쓰거든요.

그런 깨달음을 세속적으로 번역하면 결국 신이 뭐냐하는 데 귀착합니다. 보다 나은 참된 자유, 정의에로 역사가 추진할 어떤 세력을 의미하고 있거든요. 힘이다, 참여하라, 그렇게 얘기하는 게 전적으로 주류가 정치의 신학, 해방의 신학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챔피언인 몰트만의 책을 읽어 보고 흑인신학의 콘의 것을 비교하면 역시 몰트만은 관념론적이거든요. 직접 흑인 신학자가하는 것은 리얼하고 힘이 있거든요. 훨씬 더 실존적이라 할까.

그것을 미루어보면 지금 제3세계에서 자유를 위해서 헌신하고 스트라익을 하고 하는데 거기서 정말 옳은 신학이 나오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안병무: 저도 유럽에서 그런 반성을 하고 그런 얘기 한 일이 있는데 특히 독일의 신학이 왜 현실에서 유리되었느냐, 대학이라는 사회가 그들 시야의 전부여서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생각하고 주소를 옮겨야 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어요. 지금 자주 주소가 옮겨져요. 주도권이 대학사회 안의 강단신학에서 다른 데로 옮겨가는 것이 현실인데 요새 우리도 그런 의미에서 외국을 볼 때 별 것 아니 구나하는 생각을 갖고 그들 자신들도 우리들 발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주목할 단계에 온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역시 우리는 전통 같은 것은 별로 없고 그런 의미에서 학문적인 의미에서는 그들과 비교가 안 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 삶에서 몸부림 치면서 신학적인 자각을 해 가는 것이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질서정연한 논리의 틀 위에 세워진 신학보다 산 신학이 될 소지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신학의 주소는 교회가 아니고 한국의 현실

서남동: 구체적으로 그 사람들도 상당히 그런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 많아요. 일전에 NCC에 들러서 거기에 온 설교를 하나 읽었는데 미국의 연합장로교회총회…. 미국의 큰 장로교파가 남북 둘이 있는데 이번에 같은 시에서 동시에 총회를 하고 서로 교류하고 굉장히 접근했다는 말이 있어요. 거기서 어떤 분이 긴 설교를 한 것이 있는데 마지막 대목에 상당히 길게 사회정의,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없는 자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된다는 신학을 전개하면서 출애굽을 언급하고 바르멘선언을 언급하고 나서 "현재 출애굽과 바르멘선언이 더 유력하게 새롭게 선포되고 생생해진 곳이 한국"이라고 말하면서 1973년 한국기독교인 선언문의 중요한 요지를 1페이지 이상 인용했어요. 이것은 대단히 의미있다고 보는데 큰 두 개의 교회 총회에서 기조 연설 가운데 한국 교회의 신학적인 의식이라 할까 자각을 출애굽하고 바르멘선언과 우리 신앙의 역사상 중요한 매듭에다 연결시켜서 높이 평가하고 있거든요. 이것은 하나 나타난 예지만 그와 비슷한 인식을 오히려 외국을 여행하면 상당히 많이 받게 돼요. 어떤 강한 신학이 한국에서 나오지 않느냐, 교회가 정말 산 신학을 하고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서 정말로 구원, 해방을 선포하고, 십자가를 어떻게 지고 가느냐 그런 표준에서 한국신학이 굉장히 부각되고 기대되고 세계가 우리한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안병무: 대체로 1960년대의 한국 신학자들이 세속화, 토착화라는 문제를 내걸고 토론했던 것은 결과는 어떻게 되었든 그냥 남의 것을 전수만 하던 상태에서 비로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시야를 넓힌 계기가 아니겠습니까? 한국 땅에서 신학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반성이 이른바 토착화신학운동이라고 한다면 70년대 초에 들어와서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신학의 주소가 교회가 아니고 한국의 현실이 되었지요. 거기에서 한국의 정치문제, 경제문제들을 곧 우리의 문제라고 보기 시작해서 정치적 차원에서나 경제구조적 차원에서나 인권문제라든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하면서 점점 살고 있는 우리의 문제로 보면서 그러면서 신학적인 테마가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면에 들어오면 어느 세계적인 신학과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양보할 수가 없는 거지요.

우리가 절실히 실감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신학을 전개하니까 이때부터 비로소 독립적인 위치에 서서 남에게도 아류적인 것이 아니고 진통 속에서 형성된 신학이라고 보게 된 것이 70년대 초라고 생각해요.

서남동: 독일의 젊은 신학자 신학총서에 『미래』라는 책을 쓴 마쉬(Diecher Marsch)라는 사람의 책을 제가 "기독교사상"에 번역한 바가 있는데 신학의 주소를 어디에다 잡느냐 하면 세 가지로 나누었어요.

불트만은 '실존', 다분히 개인적인 실존에 둡니다. 자꾸 근대 산업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이 극복해야 될 두통거리고 저항해야 될 두통거리라는 것이지요. 둘째로 신학의 주소를 '교회'로 삼는다. 이것은 칼 바르트 같은 사람인데,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 세 신학자들은 신학의 주소가 뭐냐, 민족 국가라고는 안했고 '인류, 사회 문제'라고 했거든요. 확실히 신학의 주소가 달라졌다. 신학의 번지수가 달라졌다고 하는 어떤 변화를 잘 나타내는 분석같은데 지금 신학은 적어도 교회 울타리를 벗어난 신학의 양상이 아닌가, 구체적으로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 공동사회 혹은 민족 국가문제입니다. 하지만 또 세계가 신학의 무대라고 할 때 사회부조리에 대해서 교회가 저항하고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이외에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지금 인류존망에 관계되는 환경문제가 있습니다. 굉장히 심각해지는 인구문제, 식량문제, 오염문제 등이 있는데 20세기 후반기에 교회가 지금까지 예언자의 사상에 의해서 사회부조리에만 저항하고 생물학적인 인간의 존재가 위험 시되고 있는 시대에 이 걱정은 신학의 관심 밖에 두어서 UN에서나 걱정하고 환경문제 전문가들 또는 세계인구회의에서나 걱정해라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세계교회도 연구를 많이 합니다마는 구체적으로 독일 교회, 한국 교회, 미국 교회는 어떻게할 것이냐가 중시돼야겠어요. 인류의 생물학적인 운명은 완전 멸종이거든요.

그럴 수 있겠느냐, 실제 속해 있는 사회적인 부조리에 관심을 갖는 그만큼 실감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이 급박한 문제를 인류에 대한 걱정을 교회관심사 밖에 둘 수 있겠느냐 그런 생각을 해요.

이번 여름에 WCC의 중요한 한 부서에 참석해서 2주일 동안 회의도 해보았는데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교회의 일치, 기구적인 일치 보다도 어떻게 하면서로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뭐냐하는 것이었죠.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것을 거기서도 최근 세계 여러 나라가 어떻게 하면 빈곤과 독재와 무지를 극복하느냐, 소망은 그것이다, 하는 얘기로 끝내고 있는데 엄청난 인구문제, 식량문제, 공해문제는 도외시하고 있어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고 선택되었다고 자부하는 공동체가 걱정을 안 하면서 사회 부조리만 걱정하느냐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안병무: 퇴트나 브라켈만 같은 사람은 사회부조리를 얘기할 때 인류의 멸망이 앞에 있다는 것을 대전제로하지요. 피히트(Picht)도 마찬 가집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부조리 자체에 그치지 않고 인류가 다 망한다는 급박한 종말의 위협을 앞에 놓고 사회개혁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원래 그래야 되겠지요. 기독교 자체 예수 자신이 내세운 제일 중요한 것이 인류의 궁극적인 미래였으니까 그것을 떠나면 안 되겠지요. 물론 순간 순간 당하는 사람들에게 눈 앞에 불을 끈다는 느낌 때문에 멀리는 못 보아도 그리스도가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인간 세계의 궁극적인 구원은 그리스도의 희망이고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문제는 구체적으로 과학적으로 지구의 수명이 어떻게 된다든지 생태학적인 지식 같은 게 결여는 있겠지만 신학의 방향은 아무리 부조리에 저항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살다가는 망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부조리만 지적하다가는 쇼비니즘에 빠질 수도 있고 우리가 안 되더라도 전인류 전세계가 살아야 되겠다, 평화로와야 되겠다, 글쎄요 어떻습니까? 지식적으로는 결여되어도 그것을 빼고는 원래 신학이 성립 안 될 것 같아요. 물론 그걸 못하고 있지만요.

전통적 덕목만 강조하면 결국 구조악은 외면하게 될 것이 아닌가

서남동: 아침마다 학생들 상대로 예배를 보고 15분이나 20분 고명 하신 분을 모시고 설교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좋은 말씀을 해 주신 교훈 설교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 전통적인 윤리 도덕의 입장에서 말씀해 주시거든요. 그럴 때 상당히 많은 사람이 감격하지요. 정직하게 자기 임무에 충실하라는 얘기지요. 사태가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지고 인간관계성, 사회가 전연 다른 상황으로 접어들었는데 우리의 연대성, 구조적인 '라이프 투게더'이런 데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거의 없어요. 그런 교훈이 과연 현대에 사는 인간을 인간답게 이끄는 교훈인가, 사회적인 책임은 전연 빼놓고 개인적인 전통적인 도덕만 강조하는 것이 현대의 옳은 세계관이나 사회관의 뒷받침을 만드는 것인가, 아닌가 의문이에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가 다른 어느 단체보다도 뒤져서는 안 되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인간의 존엄성을 얘기하지요. 죽음을 내걸고 싸우는 일도 있고 제도고 법이고간에 하여간 '인간의 존엄'이 제일이다, 그렇게 우리의 신학이나 표어나 사상이나 모든 정성이 쏠리는 사이에 그런 철학, 그런 신학 그런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산아제한은 못한다, 가족계획은 틀렸다, 더구나 실험실에서 아기가 나오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해도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제일 훌륭한 정직과 충성, 덕의 강조가 현대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우리의 공동사회성이나 구조악에 대해서 전연 맹목적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결국 악에 대한 봉사를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해 주면 악마는 좋거든. 개개인이 정직하고 근면하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거든요. 그렇듯이 인간의 존엄성을 교회가 강조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면 이 엄청난 문제에 대해서 오히려 역효과라 할까 그런 것을 하고 있거든요. 인간의 존엄성 때문에 가족계획은 반대다, 인공유산도 반대다, 더구나 인간이 실험실에서 과학적 계획적으로 생산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래서 내걸고 있는 최선의 진리가 다음 세대의 생존을 위해 저항이 되는 때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안병무: 그런 현상이 우리 한국에도 있지요. 신학이 세계신학도 그렇고 한국도 어쨌든 목표는 전체의 구원이지 부분적인 구원은 아니고 우리가 아쉬운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 할까 그것이 비록 잠정적이라도 없다는 것이 더 걱정이에요. 무엇을 수호한다는 네가티브한 면만 있고 미래상에 대한 생각을 하고 노력을 하고 보여주고 제시하고 스스로도 보면서, 포지티브한 것을 보면서 네가티브한 것이 되어야 하겠는데 물론 신념으로는 있지만, 표상으로는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쉬나 피히트나 퇴트 같은 사람은 미래상에 굉장히 노력하고 있어요. 신학적인 측면에서 미래를 위해서 현재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미래인가 확연히 보여주어야 되고 우리 스스로도 알아야 된다는 것이 한국에서도 앞으로 큰 과제로 생각됩니다.

또 하나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서구신학자들은 한국의 신학하는 사람들 보고, 부러워하고 당신들은 여건이 좋다, 불교 전통, 유교 전통, 여러 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유리하게 돼 있다. 우리는 그런 전통이 없고 이론화된 기독교 전통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눈이 좁아지는데 앞으로는 그런 풍요 속에서 신학을 연구해야 되겠다 그럽니다. 그렇게 들으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진 종교적 문화적인 전통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굉장한 재산으로 생각이 됩니다.

서남동: 미래 바전 얘기를 하셨으니까 말인데 정치도 그렇고 민족의 운명도 그렇고 교회신학도 그렇고 안 박사가 칼을 다듬기만하고 써보지는 못한 모양인데, 공산주의하고의 문제, 교회 밖의 사회나 교회 안에서나 마찬가지인데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너무 일방적이고 너무 고정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최고 지식층에서부터 최하까지 전부 총으로 극복해야 하는 미래로만 내다보지 다른 어떤 선택의 가능한 길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하게 하고 이렇게 좁은 시야에 정말 좋은 미래가 있겠느냐, 세계는 그렇게 내다보지 않는 것 같아요. 꼭 총칼을 가지고 정복하고 넘어가야 할 관문이냐 상당히 급박한 문제 같아요.

안병무: 저도 동감인데요, 우리는 그런 면에서 중요한 과제를 가지고 있고 아무래도 해야 될 문제인데 이북 공산집단과의 좋으나 나쁘나 어떤 형태의 대결이 있게 되어 있는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중요한데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반공법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공산주의 이전의 사상으로서 마르크시즘 자체에 대해서 백치에 가까운 상태에 있어요. 서구에서는 마르크시즘과의 대화는 굉장히 중요한 과제로 되어 있어요.

아무리 마르크시즘을 연구한다 해서 크리스천이 마르크시스트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마르크시스트가 크리스천 되는 것도 아니고 점점 선명해지고 있는데 피차 자극을 받고 자기가 잃어버렸던 것을 도로 찾고 못한 것이 뭔지 다시 발견하고하는데 서로 피차 오해한 것이 수정되면서 대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 한국도 그 문을 열지 않으면 큰일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마르크스 자신이 유대인이고 대전제가 히브리적인 사고를 하고 구약에 젖어 있는 사람이고 기독교 전통인 유럽에서 자라서 기독교인 패턴 혹은 헤브라이즘의 패턴에서 자라온 사람이지요. 그 사람의 역사철학이 기독교적인 배경이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데 어쨌든 근대에 와서 마르크시즘이 처음으로 인류의 미래를 앞에 놓고 마지막까지 추구해 들어가서 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비전 앞에서 인류를 한 방향으로 밀어 몰아간거죠. 현실적으로 우리 나라만 해도 절반이 공간적으로 점령되고 30년 동안 거기에 사람들이 훈련돼 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지금까지 반공만하고 아무것도 생각 안하고 있지요. 무기로 정복한다는 의미만 아니고 크리스천이 도그마로 정복이나한다는 생각 이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그런 면에서는 똑같지요. 그런 것이 아니고 미래의 비전을 어떤 형태로 내세웠는데 그것을 인수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더라도 우리 자신은 뭘 가지고 있느냐, 그들이 보는 패턴이 성서적인 것이 굉장히 많거든요. "하나님이 일하신다"라는 말에서 '하나님' 대신 '역사'라는 말로 바꾼 것과 같지 않습니까? '역사가 한다'라든지 '역사의 흐름 앞에는 어쩔 수 없다' 이런 용어로 바꾸어 놓고 있거든요.

엄밀한 의미에서 앞으로 사상적으로 대결이라 할까 대화라 할까 할 수 있는 것은 신학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한국신학자들의 과제는 막중합니다. 더군다나 이북의 체질은 다른 데와 달라서 기독교전통이 있는 위에 세워진 공산주의도 아니고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이 시작하고 있어요. 체코나 동독은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세력이 강한 위에 형성되어서 오랫동안 체질이 개선되어서 마르크 시즘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되었는데 북한은 완전히 제멋대로 된 공산주의 체제인데 현재는 내놓고 연구할 만한 길도 보장되지 않고 해서 고민하고 있지만 앞으로 한국신학이 해야 할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서남동: 기독교 전체를 보아서도 그렇고 한국으로 보아서도 그렇고 공산주의와의 문제 또 새로운 세속적인 휴머니즘 내지 새로운 과학사상과의 문제 등 큰 문제를 안고 있지요. 어떻게 잘 시련을 겪으면서 신생, 거듭나는 체험을 못 하면 조그만 종파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돼요.

전통적 도그마 고수하는 것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인가

안병무: 이번에 제가 관련한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된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라는 책이 나왔어요. 제가 번역을 했는데 마코비치라고 체코 사람이 쓴 것인데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무신론자이며, 마르크시스트로 전제하고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그가 예수를 보는 눈이 특이합니다. 주목할 것은, 특별히 예수와의 대화 속에서 마르크시즘 자체의 체질의 변동, 공산사회 안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것은 놀라와요. 예수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지금까지 못 보았던, 사회, 경제적인 모티브를 통해 예수를 그리는데 주목할 만한 책입니다. 서구에서는 계속 베스트셀러로 나갔는데, 구체적으로 나는 무신론자다 하면서도 예수에 대한 불이 붙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한 두 사람 아니에요. 가르다브스키라는 사람도 체코 사람이지만 공산진영 안에서도 예수에 대한 평가가 굉장하고 다시 성서를 읽고 기독교를 재평가합니다. 마르크스의 그리스도교 평가는 역시 그 시대에 제한된 평가였는지 결코 맞는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자체도 마르크스가 과녁을 겨누었던 때에서부터는 완전히 떠나 있다, 그것을 가지고 그대로 쏘아서는 하나도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코비치 자신도 이제는 기독교에서 우리가 공격하던 유신론은 물론, 기독교의 약점들이 모두 회의스럽게 됐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신앙이 한 걸음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예수에 대해서 긍정적인 서술을 하고 양보하다가 마지막에 예수의 비폭력적 정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정면으로 걸리는데 분명히 칼 마르크스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라고 했어요. 마코비치 자신은 마르크스보다도 예수에게 옳다고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체코나 그쪽에는 기독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마르크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체질이 변동됩니다마는 한국은 굉장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한국 교회와 신학 관계를 보면 제일 먼저 문제되는 것이 성서학같아요.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학이 한국 교회의 풍토에 현재까지는 적용 못됩니다.

성서학이 이른바 역사비평학적인 방법을 적용해서 형성되는데 역사비평학이란 말은 성서는 다른 문서나 마찬가지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거지요. 그렇게 연구하는 것인데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성서의 축자영감설이라는 근본주의니 뭐니 하는 성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영감으로 쓰여졌다 해서 그 자체의 형식적인 권위를 절대 고수하는 전통을 현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성서의 구절을 비판하면 이단시하는 경향이 아직도 거의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신학하는 사람들은 보수계고 뭐고 할 것 없이 그 자체의 정당성을 이해는 하지만 적용은 별로 일부 이외에는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자체 안에서 문제도 나고 성서를 함부로 비판하는 것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기준이 되어 있어요. 성서 자체의 말들을 비신화화도 안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니까 기독교가 동화 내지 신화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밖에는 냉혹한 현실에서 살고 있고 기독교 안에는 동화나 신화의 세계에서 살아야 되는 이중구조를 형성하고 있지요.

중학교쯤만 가도 자연과학을 배우고 우주형태를 배우는데 교회에 가서는 그대로 동화세계에 있는 묘한 체질이 되어 있어서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깨지지 않으니까 다른 신학을 아무리 가르쳐도 자기네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도그마에서 모순되면 배척하는 경향이 지금까지 농후해요. 아마 그 체질이 바뀌어지려면 아직도 요원할 것입니다. 일부 상부층의 자각있는 사람이 언제나 마음을 해방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많은 다수는 아직도 의식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외적 구조도 달라지고하지만 기본적인 자세는 맨처음 기독교가 들어 올 때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 교수 같은 분은 백안시당하는 수난을 겪고 있지요.

서남동: 성경관을 비판할 줄도 알고 학문적으로 대하는 것도 알면 관련되어서 다른 것도 계몽될텐데 너무 성경을 우상시하니까 주문(呪文)에 대한 것 같이 생각하게 돼요. 외국도 우리와 대동소이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더한 것이 좋은 크리스천이다, 참된 교인이다 하는 표준이 뭐냐하면 그가 어느 만큼 인류에 대해서 남보다 올바른 태도와 생활을 하고 있나가 기준이 아니고 실지로 어느 만큼 교회에 충성하느냐 하는 것이 교회교육의 중요한 커리큘럼이거든요. 그러니 일종의 그룹 에고이즘을 양성하고 무조건 교회의 말은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내가 먼저 그런 경험을 가지고 투서까지 받은 일이 있는데 왕년에 만원권에 석굴암 불상을 넣는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교회의 최고지도자부터 시작해서 전부 반대 서명운동을 하거든요. 이것은 뭐냐, 마치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 돈벌이에 조금이라도 손해나면 국가나 민족을 위하는 것은 둘째 문제고 자기 장사를 위해서 결사 반대하는 그런식이지요. 그런 심리로 예수를 믿으면 뭣하느냐, 만원권에 불상이 들어가면 어떻고 안 들어가면 어떤가요. '교회가 세계를 위한 기관이다' 하는 말은 더러 듣는데 따지고 보면 교회는 교회를 위한 기관입니다.

걸핏하면 신학을 '교회를 위한 학문이다'라고 정의를 쓰는데 그말은 70-80퍼센트 인정해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외는 나는 배척해요. '교회를 위한 학문'이라는 칼 바르트의 정의를 자꾸 되풀이하지만 신학이야 교회를 비판도하는 것이고 보통 일반 사람들의 세계관이나 유신론적인 것도 손뻗치는 것이지 교회를 위한다는 정의 가지고 직접적으로 교회의 기존 질서, 제도, 역사적인 공동체, 그것에 대한 유리한 변명만하는 것은 아니라고 내용이 되어 있거든요.

예수는 교회를 세우지도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병무: 한국 교회의 잘못만이 아니고 서구에서 받은 유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서구에서도 굉장한 진통을 겪고 있어요. 어느 의미에서 우리는 가벼운지도 모르지요. 교회 재산이 적으니까.

외치기는 교회는 세계를 위한 것이니까. 남을 위한 것이다, 스스로를 위한 교회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 자신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 것이 아니고 세계를 위해서 자기를 바친 것처럼 교회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없애면서, 비우면서 세계를 살리게 한다, 자기를 비운다, 예수 자신이 자기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란 숨어서 세계가 세계되게 하는 데에 교회의 의미가 있다하는 슬로건을 내세우지요. 그러면서도 서구는 어려워요. 굉장히 부자고 튼튼하게 서 있고….

한국도 지금까지는 교회를 궁극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이 곧 '노아'의 방주처럼 이것만 타고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사고가 있어서 교회의 안과 밖을 구별했는데 교회는 교회지, 성당이 아니예요. 템플은 하나의 건물밖에 아무것도 아니예요.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란 금 그을 수가 없어요. 시간적으로도 금 그을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보수계 사람이라도 눈에 보이는 조직을 가지고 교회라고 안 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어요. 지금까지 전통에 젖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충분히 납득시킬 만한 소지는 있다고 보는데 사실 교회에 대한 개념이 시정되어야 하겠지요. 교회가 거룩하다는 의미는 전연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운 일도 없고 세우려고도 안했습니다. 교회란 성서적으로 말하면 종말적인 의식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궁극적인 새 세계가 올 것을 기다리는 공동체지, 그 자체가 궁극적인 공동체는 아니거든요. 그것을 착각하고 있다고 봐요. 자꾸 교회를 강조해서 견고해지고 터전을 마련한 데는 효과가 있지만 한국 교회가 살려면 자기들의 비친 그림자에서 넘어서서 최소한도 민족 역사에까지 시선이 가지 않으면 하나의 섹트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 자각으로 옮겨가야 될 것입니다. 어쨌든 한국의 현실에서는 민족을 위해서 봉사하고 그 미래를 위해서 있는 것이 교회지, 교회 스스로를 위한다고 고집한다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허락이 안 돼요.

서남동: 지식사회학에서 그런 이론을 전개하는데 신학을 누가 하느냐 하면 목사와 신학자들이하고 있어요. 자기 직업의식이 반영됩니다. 자기 목줄이 거기에 달려 있으니까 그런 종류의 신학이 형성됩니다. 더 오리지날한 통찰은 마르크스의 통찰인 줄 알고 있지만 내가 이런 말해서 좋을지 모르지만 교회를 섬긴다하는 데는 의문이 있어요. 영어도 서브(serve)한다는 말은 넓은 의미인데 우리 나라 말에 '섬긴다'는 말은 교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우리 말에 '섬긴다'는 것은 인격이나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니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 회사를, 조직체를 섬기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엄연하게 삼위일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지 교회를 섬기지는 않지요. 처치이즘의 신앙, 교회를 섬긴다는 그것은 목사의 의식에서 나온 말이지요.

안병무: 서구에는 교회 자체에 노인들밖에 없어서 문제가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몰락했느냐 하면 천만에, 그렇지는 않습니다. 참 크리스천은 교회 밖에 나가 있다, 그렇게 보여요. 히브리서에 "성문 밖으로"라는 말이 있지요. "성문 안에서 밖으로 나와라, 예수 그리스도는 성문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이 있듯이 크리스천 냄새를 안 피우고 교회 밖에 나와서 사회부정이나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역시 크리스천이지요.

무시 못할 일이예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적다, '우리 교회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점점 적어지지만 인류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라는 의미의 크리스천은 여전히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한국도 앞으로 교회를 위해서라는 식의 크리스천은 줄어들고 그런 주장을 하는 교회는 약화될 것이고 최소한도 시선을 민족이라는 현실로 넓히는 크리스천이 늘지 않겠는가 생각돼요.

서남동: 그것이 진리인데 현실에선 내 교회다, 교회를 섬긴다면서 어떤 이익이 있는데는 잘 모이고 그렇지 않은 데는 잘 안 모이고 하니 그게 문제거든요.

'가난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고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

안병무: 그게 문제예요. 어느 교파는 비교적 슬로건을 사회정의니 이런 것을 주장했다가 교인의 수가 다른 교파와 비교해서 늘지 않으니까 갑자기 반성해서 내 교회에 열성을 내는 데로 방향을 옮기는 그런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다른 교파, 지금까지 자기 교회만 주장하던 일부에서는 바로 교파가 의문을 가진 그 슬로건을 내걸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우리도 그 방법을 쓰자할 경우 이렇게 하면 모인다, 무엇을 위해서 모이게 하느냐, 역시 낡은 더러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로 교인들을 어떤 방법으로나 모이게 하면 된다고 하면서 그래도 그리스도교회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문제인데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하는 데는 비교적 수가 적고 이익이 따르는 데는 모이고, 대개 그런 현상 같은 것이겠지요. 다른 집단도 역시 미래 창조를 위한 것은 수가 적지 않느냐, 그런데에 너무 초조하다 보면 자기상실이 되지 않느냐 생각돼요. 내 교회라고 생각하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무서워하지만 인류의 미래세계를 위해서한다면 그런 것 관심 안 해도 어디인가 그 정신이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하게 될텐데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

서남동: 한국에도 최근 2, 3년 내에 교회에서 사회정의를 많이 외치고 그전보다 활발해졌다고 들리는데요. 한국 교회의 교인수가 3백만 명을 호칭하고 있어서 적다고 하지만 다른 나라 기독교인 전체 상황과 비교하면 이 세력이 상당히 크고 주목할 만한데 새로운 교회의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교회에 인텔리의 가담이 작년, 금년에 많아져 갑니다.

안병무: 하나 밝히고 싶은 것은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피안적인 '천당'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그건 성서에는 없는 개념입니다. 불교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동양에서는 용어 자체가 천당간다는 피안적인 사고인데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간다가 아니고 온다고 돼 있어요. 어째서 그렇게 강조되었느냐 하면 역사적인 배경도 있었지요. 피안적인 도피적인 사고가 지배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피안적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장사나 이해관계에서는 너무도 현실적이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엄밀한 의미의 피안이 미래라는 의미도 아니고 관념적인 주사맞는 것 같은 역할밖에 못해서 큰 미래가 현재를 강하게 하는 그런 소망은 못 되고 있어요. 이것이 굉장히 문제인데 하나님의 나라라든지 주기도문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라고 해서 하늘이 먼저라고 생각하는데, 근래에 예수 자신을 보는 눈이 점점 달라져가서 예수를 종교적인 카테고리에서만 보는 버릇이 과거에는 많았는데, 그런 눈으로 보지 않고 구체적으로 사회경제,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려고 하고 그의 말도 종교적인 영역에서 좀더 나아가서 문화적인 영역에서 이해하려고 하고, 근간에는 역학관계에서 그 말을 연구하는 경향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 한국에서는 70년 이후로 '눌린 자'는 다 종교적으로 이해하고, '짐을 진 자' 하면 전부 개인의 내적 고뇌 같은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사회적인 차원에서 점점 이해하고, '가난한 자' 하면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로 이해하는 것도 최근의 일인데 아마 이것이 체질 개선에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 자신을 구체적인 구조적인 사회라는 측면에서 재발견한 것이 중요하고 앞으로도 한국 교회 체질 개선에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생각됩니다.

서남동: 현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인 견해가 구체적으로 사회혁명가로 생각해서 결론내는 연구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물론 반론도 있고, 시비도 많으니까 일반 사람은 현대의 양상을 옳게 파악 못하는 감이 있다고 생각해요. 대충 현대신학의 논의를 보면 압도적으로 '혁명가로서의 예수'라는 아이디어나 테마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신의 존재 문제에 관련해 기독교를 볼 때 전통적인 신학에서 기독교인의 신은 예수이니까 예수를 최고 절대자라고 따라가면 그것이 크리스천이지 별것이 아닐텐데 전통적인 우주론과의 관계를 지어 신의 존재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가 아니겠어요?

안병무: 예수보다 그리스도지요.

서남동: 그리스도도 최고 절대 존재 신 아닙니까? 전통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자가 크리스천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다른 측면으로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신론, 무신론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신학의 문제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자라고 따라가면 크리스천이지요.

(『월간 중앙』, 197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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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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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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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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