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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신학의 동향
정치신학(1)

서구신학의 동향을 집필하도록 요청을 받았으나 필자는 독일의 신학계를 중심할 수밖에 없다. 독일신학을 소개하는 데 있어서도 몇 가지 난점이 있다. 그것은 첫째 미국과 같이 긴밀한 연락이 없기 때문에 주로 신학잡지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입수되는 신학잡지도 제한이 있다. 필자가 입수하는 것으로는 『신학과 교회』(ZThK)와 『신학평론』(ThR) 그리고 『신학문서시보』(ThLZ) 정도다. 그런데 위의 두 가지는 계간이고 후의 것이 월간이다. 그런데 그것이 도착되면 벌써 3, 4개월이 지난 것이다. 또 그것들은 방대한 논문을 실리고 있기 때문에 한 논문을 소개하는 데도 많은 지면 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세밀한 소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미리 말해 둔다.

슈라이(H. Schrey)는 '정치신학과 혁명의 신학'1)"Politisch Theologie und Theologie der Revolution", Theologie Rundschau, 1971. 4호, 1972. 1호 연재.이라는 제목으로 최근의 신학적 논조를 총결산하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는 이 논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발췌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이른바 네오 맑시즘과의 대화 또는 대결과 더불과 나타난 신학적 흐름으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1) 희망의 신학 : 이것은 역사철학과 관련된 것으로 성서의 종말론의 새로운 이해에 거점을 둔다.(2) 정치신학 : 공동체의 구성 성분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 것으로 예언자적 정의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거점을 둔다.(3) 혁명의 신학 : 이것은 이론과 실천의 분리를 극복하고 행동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슈라이는 이것들은 맑시즘의 '전진'과 '미래'—사회의 혁신—이론과 실제를 행동(Aktion)으로 표시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느냐 하는 관심이 이상과 같은 신학의 조류를 낳게 한 것이다.

희망의 신학은 네오 맑시스트 에른스트 블로흐와의 대화에서 결정적인 자극을 받아서 이루어졌다. 몰트만이 그 주동 역할을 했다. 이것은 몇 차례로 한국서 소개됐으니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후에 정치 신학이 대두됐다. 이것은 가톨릭의 메츠(J.B. Metz)와 그리고 몰트만이 구체화했다. 이와 더불어 혁명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활발 한 논의가 진행됐는데 둘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셋 모두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까닭은 이미 지적한 대로 셋은 네오 맑시즘이 제기한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1. 멧츠와 몰트만

멧츠는 '세계의 신학에로'에서 종말적인 모든 신학은 사회 비판적 신학으로서의 정치신학이 되어야만한다고 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는 우선 신앙의 초월화, 개인화 또는 실존화를 비판하고 종말론적 복음을 오늘의 사회적 조건 밑에서 재이해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유럽의 종교전쟁 당시에서처럼 종교와 사회의 무비판적인 단순한 동일시를 경계하면서 이 두 사이의 관계의 새로운 '2차적 성찰'을 주장한다. 이러한 성찰을 위해서 그는 성서해석학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신약의 케리그마는 결코 단순히 개개인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공동사회와의 관련에서의 공적인 선포로서의 약속이라고 함으로써 내재적 개인화된 실존론적 해석학을 비판한다.

몰트만은2)"Existenzgeschichte und Weltgeschichte. Auf dem Wege zu eine politischen Hermeneutik", Evang, Kommentare I, 1968. 정치신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정치적 해석학을 앞세운다. 그는 이해의 해석학에서 혁신의 해석학에로 이동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복음 이해의 수평에서 현대 세계의 현실 수평으로의 이동을 뜻하는데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으로 부자유한 현실에 자유로 성격화된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적공적', '정신적정치적', '내적외적' 따위의 이분법을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이제부터는 '종교의 진리'자체를 문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사회에 어떤 기능을 갖느냐에서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맑시스트들이 교회의 설교가 마취제의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사실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참 자유에로 이끄는지를 엄숙하게 성찰해야 함은 당연하다.

이 두 사람은 정치신학을 응용신학, 실천신학 또는 정치윤리 등 신학의 한 분과로 생각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신학 전체의 성격이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학 자체가 '실제적', '행동지향적' 신학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시에 정치신학을 기독교 이전의 스토아적 자연 신학이나 루소나 홉스의 '시민종교' 또는 나치스 시대의 독일 그리스도교나 러시아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와는 구별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어떤 기존 세력과의 동일화의 신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것과의 투쟁의 신학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신학은 무엇보다도 '우상타파'에 초점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게 된다. 저들은 이것을 구약의 어떤 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 계명을 철저화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이런 우상타파의 측면에서 철저화한다. 물론 저들은 지금까지의 신학이 우상을 배격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으로만 해석했다. 이에 대해서 정치신학은 이 우상의 개념을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민족적 소외의 현실에로 확대해야 한다.

여기서 저들은 현교회를 비판한다. 까닭은 교회는 그 자체로서 이 세계와 유리된 방향과 조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교회를 부정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단지 교회를 개인 구원의 장소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체질을 이 올바른 정치 세계의 전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옳은 정치 세계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기존적인 것의 우상화를 타파하는 길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중심은 종말론적이다. 교회는 그러므로 이 종말론에서 보는 미래를 향하는 체제의 권위로서 앞장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권위라면 기존 세계에 주저앉을 수 없고 언제나 현재의 극복이 그 체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슈라이는 이러한 저들의 기본 입장은 불트만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단지 차이라면 불트만이 종말론을 개체적 자의식에서 멈추고 있는데 대해서 저들은 그것을 넘어서 사회적 행동지향이라는 차원으로 확대한 것뿐이라고 한다.

2. 렌도르프(T. Rendorff)

이에 대해서 렌도르프는 몰트만 등은 교회의 모습과 기독교의 신앙의 인식을 정치적인 기능성에 확대함으로써 그 자체의 성격을 투시하려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참 정치신학은 직접 현실문제에 직결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는 제도적 교회에서 기독교를 해방하여 직접 정치세계의 구조 분석에 집중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이 작업의 목적은 기독교적 관점에 있어서 휴먼의 보호와 실현이라고 한다.3)"Politische Ethik oder Politische Theologie", Das Humanum und die christliche Sozialethik, 1970. 그는 일정한 위치를 설정하고 현실참여 운운하는 것은 사실상 현실정에 설 자리를 못 가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떻게 이 정치적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는 우선 교회와 기독교를 구별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바로 기독교의 보편화를 뜻한다. 이러기 위해서 신학은 교회의 학문이어서는 안 되고 기독교 학문(Christenums wissenschaft)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새것이 아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으로 뒷받침된다. 그는 무엇보다도 헤겔에 있어서 기독교와 역사의 대립이 신테제(합)로서 새로운 면모로 등장한 것을 그 모델로 한다. 또 다른 면에서는 포이에르바하에 의해서 예시된 세속화의 현상을 신앙의 결과로서 적극적 의미를 주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세속화의 과정은 반제도적 교회 현상이기는 하나 그것은 반면에 참 기독교 신앙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이미 고가르텐이 신학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주장은 결국 제도의 교회를 해체하고 기독교 국가에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기존적 정치개념에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는 정치적 현실이란 기존의 어떤 제도적 정치 현실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들이 자유롭게 약동할 수 있는 개방적 현실이라고 본다. 이렇게 정의하면 제도적 국가 따위를 전제한 정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제도적 국가의 규범이 아니라 윤리의 이성적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가 이상으로 하는 정치현실은 바로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다.4)Demokratische Tradition im Protestantismus, 1969.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란 제도적 사회가 아니라 이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무대 이상의 의미가 없다. 슈라이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렌도르프는 이 세계를 무신론에 넘겨주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절대적 조건이라고 하며 기독교를 바로 참 민주주의의 모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견해의 뒷받침으로 그는 '부활'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부활은 바로 종교를 제도적인 데서 해방시키고 인간을 인간되게 한 사건인 것이다.

또 하나의 정치신학으로서 중요한 논제는 이른바 정치적 그리스도론 논쟁이다. 슈미트(H. Schmidt)는 '정치적 그리스도론'5)Concilium 4/1928.을 규명했다. 그는 서구사에서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대신하면서부터 이른바 정치적 그리스도론이 대두했다고 본다. 카르타고의 치투리안은 로마의 평화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내세웠다. 그런데 로마의 쇠퇴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주권의 세계가 대두했다. 결국 그리스도를 정치화한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비잔틴주의에 있어서 묵시묵학적인 종말 사상과 결부되어 전권적 그리스도론이 형성됐다. 이것을 근거로 카이저는 하늘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계를 지배했으므로 이 국가는 바로 현존의 그리스도가 된 셈이다. 슈미트는 이러한 정치적 그리스도상이 정치적 신학에 언제나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에 대해서 그는 오늘의 기술과학적 세계 사회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론으로는 정치적 책임을 다할 수 없다고 하며 교회는 현금의 사회성을 재확인함으로 예수가 세상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정치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와 이 기술사회와의 관계를 주종관계에서 관련한다는 것인지 또는 이 세계를 섬기는 그리스도라는 관계를 말하는지 불투명하다.

현재 서구 정치신학은 성서적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를 구분하고 이른바 '말씀의 신학'은 전자를 그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세계성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면서 역사의 예수에서 행동의 거점을 찾으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불트만계의 슈미트할스(W. Schmithals)는 이 같은 구분에서 세계성의 유무를 가리려는 것을 비판하면서 역사의 예수의 세계성은 단순히 구원의 약속만 말함으로써 '율법적 세계성'을 그대로 지니는 데 대해서 성서적 그리스도는 구원의 현재적 선언으로서 '복음의 세계성'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6)"Gesellschaftliche Engagement der Christen-aber wie", Ev Kommentare 4/1971. 따라서 그는 오늘의 정치신학에는 복음의 세계성이 아니라 율법의 세계가 문제될 뿐이라고 한다(Jesus und Weltlichtseit des Reich Gottes: 동상).

슐체7)H. Schultze. Zee 13/1969.는 정치신학이 역사의 예수에게 거점을 찾으려는 해석학적 근거를 비판하면서 역사의 예수가 열심당과의 관계를 의식적으로 거부한 사실을 상기시칸다. 세금문제에 대한 예수의 긍정적 태도는 바로 열심당의 입장과 정면으로 충돌된다. 또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 또는 의를 결코 구체적인 정치적 요청과 일치시키려는 움직임을 거부했으며 그것을 결코 정치적 틀 속에서 본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았다고 밝히면서 정치신학의 큰 잘못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세계의 정의를 무언중 일치시키는 데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슐체는 슈미트할스와 같이 법률적 세계성과 복음의 세계성을 구별하고 정치신학은 법률의 영역 안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른바 '정치적'이란 규정에서 혼선을 일으키는 견해다. 슐체는 정치적인 경우에 어쩔 수 없이 혁명에로 진행돼야 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실상 정치신학은 혁명의 신학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기독교사상』, 197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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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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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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