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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예배
정치신학(3)
1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의식은 기존의 체제에 대한 도전을 불가피하게 한다. 도전은 행동(Aktion)이다. 그러나 새로운 행동은 언제나 새로운 언어(Wort)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또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상황과의 엄숙한 대결없이 탄생되지 않는다. 이같은 요청에서 이 시대의 모든 분야가 그 체질개선을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등은 새 언어의 모색이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교회 밖으로 향하는 탈출의 외침이요, 이미 수천년을 간직한 교회의 전통적인 것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소홀히했다. 기존 교회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버리라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하나의 종교인 한 그 핵심은 예배이다. 그런데 예배는 모든 것과 구분된 성역일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 변화는 시대의 말과 행동을 외면할 수 없다. 이러한 요청에서 재창된 것이 이른바 정치적 예배다.

그같은 예배를 모색한 이론과 실제를 엮어 낸 책이 '예배와 공개성'이다.1)P. Comchl-H.E. Bahr, Gottesdienst und Offentlichkeit. Zur Theorie und Didaktik neuer Kommunikation, 1970. 그 안에 엮은이의 한 사람인 코넬은 『공개적 예배—예배의식(Liturgie)의 구조적 변화』라는 제목으로 정치적 예배운동을 소개했는데 이번 『신학과 교회』(ZThk)지에 그것에 관해서 로이엔베르거(R. Leuenberger) 교수의 평론이 나왔다.2)"Politischer Gottesdienst", ZThK, 1972.3. 이 소개는 이것에 의존한다.

2

유럽(특히 독일)에 이같은 운동은 교회대회, 종교개혁축제 등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됐고 또 일부 새로 세워진 교회에서도 시행됐다. 그런데 그러한 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은 현대 정치시인 브레히트(Brecht), 카르데날(E. Cardenal) 등의 저항 또는 혁명적 기독교 시(詩)들이며 밖으로부터는 미국의 정치 사회적 여건과 직결된 그리스도인들의 운동—가령 베트남 전쟁, 흑백의 싸움 등—이다. 독일 교회는 베트남, 희랍, 앙골라 사건 때, 그리고 원자탄에 대한 항거, 병역의무에 대한 저항, 제3세계 그리고 독일의 수백만의 외국인 노동자 처우문제 동을 들고 일어섰던 일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산발적인 운동은 곧 예배와 직결된 것은 아니고 하나의 사회참여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난번 유럽을 휩쓴 대학가의 혁명적 선풍 이래로 예배의 방향을 정치화하는 일이 의식적으로 젊은 세대간에 유포됐다. 그러한 운동이 구체화해서 크게 사회의 이목을 끈 것은 1967년 베를린의 한 큰 교회에서 진행되는 성탄의 자정예배에 젊은 그룹들이 플래카드와 유인물을 살포하고 구호를 외치면서 몰려들어와서 재래적인 예배 분위기를 수라장으로 만든 사건이다. 저들의 주장은 베트남 전쟁 반대를 위해서 궐기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이 운동은 오늘의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번지어 그것은 예배의 설교와 그것에 따른 행동에로 이끄는 운동으로 변모해 갔다. 이 선풍은 한동안 폭력적인 교란운동으로 번져 나갔으나 그것은 잠깐 동안 일어난 현상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재래의 교회예배에 대해서 외면하던 젊은 세대가 기독교 이름으로 적극 참여함으로 교회와 사회 사이의 담을 헐고 공동의 관심사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젊은 세대를 잃은 것은 기독교 자체보다 기존의 예배형식과 내용을 위시한 제도 자체에 대한 소외감 때문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교회의 일부 세력이 예배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예배의 단순한 형식상의 변동이 아니라 신학적 자각 위에 추진된 것으로 대표적인 것은, 오늘 날 독일에서 젊은 세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던 도로테 죌레(D. Sölle)와 그의 남편인 가톨릭계의 스테펜스키(F. Steffensky)가 이끄는 이른바 '정치적 밤기도'(Politische Nachtgebet in Köln)다. 이들의 움직임은 많은 모방운동을 일으켜서 독일, 폴란드,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 등에 퍼져 나가고 있다.

3

모든 정치적 예배에는 다음 네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정보, 명상, 토론 그리고 행동이 그것들이다. 단 처음 셋의 순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분명한 체계를 가지며 모든 것은 행동에로 옮기도록하는 데 호소(Anrede) 찬동에 의해서 행동에로 옮겨지기 위한 합리적 정열적인 요소를 동원한다. 정보를 통해서 정치적인의 지와 목적을 분명히한다. 그것에 맞는 성서에 대한 명상기도, 노래 그리고 경험 등을 말함으로써 마침내 사회적 여건을 개혁하려는 행위에 이르게 한다. 설교는 대부분 대화형식이다.

정보: 스테펜스키가 정보 제공 없이 기도는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이 예배에 중요하다. 정보는 세계문제에서 국내 정치 문제 심지어는 도시계획 같은 것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의 주체자로 서의 정부 정당 또는 개인의 이름도 주저없이 내세운다. 물론 이 정보제공은 벌써 어떤 결론과 행동에로 이끌어 갈 목표가 그룹의 사전 토론에 의해서 설정된 것이다. 가령 한 예배의 제목이 '도시계획'이었는데 그 부제는 '자본의 독재'라고 붙어 있음이 그 예다.

명상: 성서 본문을 원칙으로 하나 때로 그밖의 글도 텍스트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서를 사용하는 경우 그 번역은 완전히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옮기어 현재의 말로 바꾼다. 가령 전 수상 키신저와 국방상 슈트라우스를 비판하는 정보를 제공한 다음 마태복음 23장 23절 다음과 같이 옮긴다.

이것이 오늘 말하는 것은,
화가 있으라 우리 위선자여!
……
파렴치한 자, 국회를 속이는 자,
사람을 금수라고 하는 자가
장관이 될 수 있다.
이미 히틀러를 섬기던 자가
장관이 될 수 있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어떻게할 수 있는지 안다.

또 교독을 위한 텍스트나 공동 기도문도 완전히 현재의 컨텍스트의 틀에 넣고 있다.

사회 : 법과 정의의 주님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당신과 얘기하렵니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도 적게 의식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거의 수고하지 않은 한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잘못 알고 있던 우리를 용서하소서.

모두: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용서하는 것처럼 그렇게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

……

사회 : 우리의 자아와 무관심을 용서하소서. 아직도 전처럼 혈족에 매여있는 우리를 풀려나게 하소서.

모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진 자를 용서하는 것처럼 그렇게 용서하지 마소서.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 살고 함께 살렵니다. 우리를 당신 곁에 머물게 하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3)Politisches Nachtgebet in Köln, Dorothee Sölle 편.

또 신앙고백으로서,

우리는 이 세계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냄으로써 그에게 세계의 구원이 있음을 최종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와 죽음과 부활로써 이 땅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웃 사랑은 정치적 행동에서 만큼 강하고 효과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데가 없습니다…4)동상.

이상의 예에서 보는 대로 저들은 되도록 교회 전통과 연결시키면서 그것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물론 저들은 다른 문서도 사용하나 교회 전통적인 것과의 연결이 가장 정열적일 수 있다는 심리적 효과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반면에 텍스트를 현대의 컨텍스트와 직결시킴으로써 텍스트는 오히려 컨텍스트를 그 위치를 바꾼다는 문제가 있다.

행동: 정치적 예배의 목적은 행동에로 옮기는 데 있다. 그런데 말씀과 행위, 예배와 세계 사이의 긴장된 관계가 문제다. 그런데 가톨릭 출신인 스테펜스키는 이 행동의 가능성을 '미사참여'와 연결시켜 정당화한다. 그는 참된 예배는 성체배령(Kommunion)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사크라멘트의 참여는 경험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는 여기서 신앙과 정치적 행동의 유비를 본다. 또 다른 하나는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 중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는 바로 정치행동의 명령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행동은 절대 불가결하나 실제로는 상징적인 한계를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같은 운동을 일으키는 스위스의 마르티(K. Marti)는 이같은 성격을 강조한다. 사실상 행동이라고 해도 정말 무엇을 할 것이냐는 문제 앞에서 그 한계는 극히 제한된다. 가령 어느 나라가 비인도적인 경우 그곳에 있는 그 나라 대사관에 건의문을 보내는 일, 투옥자를 돕기 위해서 거기 참여한 자들에게 그 진상을 알리는 책을 소개하는 일, 선거기에 각 정당을 방문해서 그들의 뜻을 전하는 일 등이 그 행동의 예다. 이 제한된 행동반경에 저들은 고민한다. 가령 스위스의 그같은 그룹이 희랍에서 일어난 불의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결론은 고작 신문사에 그 사정을 더 많이 보도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스테펜스키는 행동가능성을 보이지 못하는 예배는 체념에 이끌 뿐이라고 했는데 행동해야 할 것은 알리고 구체적 행동은 못할 때 절망은 더 클 수 있다. 이로써 저들은 그들의 금력 앞에 고민하고 있다. 죌레는 이 사실을 시인하고 이것은 시초이고 점차로 이 그룹의 회원 자체가 변화되기 위해서 공동 생활에로 옮겨져야 할 것을 시도하고 있다.

그 평가

로이엔베르거는 죌레 등이 주도하는 정치적 예배란 결국 하나의 회개운동이라고 본다. 그 신학적 배경은 부한 자, 기득권자들의 죄를 짊어지는 수난이다. 그들의 목적은 안면(安眠) 속에서 양심을 깨워 일으킴으로써 과학과 기술로 풍요해진 세계에서 다른 민족과 사회계급을 배제한 죄를 깨우침으로 바른 세계가 되게 하자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현대판 세례요한적 운동으로 본다. 저들은 교회를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까닭은 교회를 그 '지배자들'에게 내맡겨서는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평화나 사랑의 문제를 정치적 권력층에게 내 맡길 수 없다고 한다(Sölle), 이것은 바로 회개운동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죌레 등의 정치적 예배에 대해서 스위스의 랑나우산(Langnau)에서 거행된 정치적 예배는 좀 다른 모습을 지닌다. 저들이 내세운 예배의 제목은 '이방인'이었다. 스위스에는, 독일에서와 같이, 이태리에서 온 수많은 객원 노동자들이 있는데 스위스 시민은 저들을 멸시한다. 그런데 랑나우의 그룹이 '정보', '명상'의 순서도 없이 이른바 '아가페 축제'를 개최해서 스위스인, 이탈리아 노동자들을 초청했다. 각 사람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어 서로 즐기는 동안 이태리어, 독일어 등이 오고 가며 웃음과 노래로 화기에 찬 분위기를 형성하며 마치 오순절을 연상하도록 했다. 그 모임은 마침내 서로 자기비판과 용서를 비는 분위기로 전향됐으며 피차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과 동정의 대화가 오고 가게 됐다.

로이엔베르거는 미래지향적이므로 현재에서는 사회비판적 분노만 일으키게 하는 죌레 등의 운동보다 평화의 그 나라를 앞당겨서 현존 화할 뿐 아니라 또한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 참된 예배라고 한다. 거기에는 사랑, 평화 그리고 정의에 대해 각성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 같은 정치적 예배도 상징적인 한계를 넘지는 못한다.

그러나 저들의 운동은 이 날까지의 신학이 인간을 지배하는 정치를 외면한 데서 깨우쳐서 정치적 실천을 뺀 신학적 사고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밝혔으며(로이엔베르거), 예배를 정치적 현실과 유리하는 낡은 사고를 지양하게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로이엔베르거는 결론으로 신학과 정치는 예리하게 구분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들은 유리될 수 없으나 동시 혼동하는 경우에는 정치적 실천은 양심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며, 또 신학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고 말므로 마침내 더 희망이 없는 수라장의 세계를 만들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것은 아마 정치적 신학 또는 예배에 대한 유럽의 신학계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기독교사상』, 1972. 9)


List of Articles
동양의 한 시각에서 본 서구신학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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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참여의 신학
정치신학의 동향
혁명의 신학
정치적 예배
민중신학을 묻는다
 
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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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있어서 결혼과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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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성서 본문과 설교
성서와 설교
성서 해석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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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학의 현황과 과제
한국 교회의 예수 이해
한국 그리스도교와 종교개혁
한국 그리스도교의 자기혁명
한국 교회의 구미신학의 유산과 그 한계
 
제5부 도피냐 구원이냐
기독교의 본의(本義)
도피냐 구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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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구원이냐 사회구원이냐
공관서의 구원론
부활신앙과 혁명
대담 | 기가 막힌 세상
 
제6부 하느님의 선교와 새로운 공동체의 모색
목회론
평신도의 목회
선교신학의 성서적 핵심
하느님의 선교
새로운 공동체
전달자와 해석자
프로테스탄트 교회관과 일치운동
1980년대 교회의 선교적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예수공동체의 신앙고백
한국 교회는 민족의 과제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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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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