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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개혁을 위해 성서를 다시 본다
I. 새로 보이는 성서
성서의 '영'(靈)이란 무엇인가
1. 구령운동(救靈運動)?

우리에게 구령운동이란 말이 있다. 또 교회에서 설교를 '영의 양식'이라는 말을 잘 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구령운동만이 선교운동이며 그리스도교는 영혼을 구원하는 종교라고 한다. 최근에 밖에서부터도 종교의 한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제 할일이나 하라고 한다. 무엇이 그리스도교의 본연의 임무인가? 역시 '영'의 운동이나 하라는 것인가?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파생된 잘못에 기인한다.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틴 이후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천여 년을 권력의 권좌에 올랐다. 이때부터 정치, 사회와 그리스도교는 한 지붕 안에 살게 됐다. 그러는 동안 정치는 종교의 이름 밑에서, 종교는 권력의 권좌 밑에서 부패해 갔다. 법왕과 카이자 사이에는 세력 싸움이 계속됐고 한 지구의 감독은 동시에 그 지구의 통치권의 장(長)이 되었다. 이로써 '현재" 기존질서'의 주인이 됨으로써 성서의 본 모습은 완전히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성서에 대신하여 법 이상의 통제 규칙으로 삼게 됐다. 이때는 정교분리가 아니라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는 이론만이 있었다.

루터는 이같은 현상이 빚어내는 모순을 통열히 느껴 궐기했다. 그가 내세운 것 중에 중요한 하나는 정교분리라는 슬로건이었다. 그것이 정교분리의 발단이다. 정(政)은 일반 국민의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것이요 그러니 자연 교회는 그것 아닌 고차원적인 것을 영적이라고 하여 그것을 관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게 됐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한 미국은 퓨리탄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영국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대륙에서 시작된 새 나라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라는 대전제 아래서 나라를 세웠다. 같은 뜻을 가진 저들은 일의 효율을 위해 그 역할을 분담했다. 살림살이를 맡는 자들과 기관을 정치인이요 정부로, 정신적내적인 문제를 담당하는 것은 교회라고 했다. 그래서 한 가지 목표 아래서 두 기능을 나눈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리가 아니라 분담이다. 이러한 전통을 그대로 안고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이란 전혀 다른 풍토인 것을 전제하지 않고 저들의 분담의 일부인 이른바 구령운동만이 전도라는 전통을 세웠다.

그런데 서구는 정교분리에서 정치나 사회문제에 오불관(吾不關)하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동안 다른 한 부분을 담당한 저들이 무엇을 했으며 어떤 사회를 만들었는지를 통 보려고 하지 않았다. 마침내 히틀러와 같은 정권이 그렇게까지 횡포하되 그때는 이미 교회란 아무 힘 없음을 알게 됐다.

이 점에서는 미국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 마당에 우리 교계는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도 아닌 이 땅에서 구령운동만이 그리스도교의 본분이라는 주장은 도대체 무얼 뜻하는가? 도대체 영은 무엇이며 무엇에서 구한다는 것인가? 죄에서 구한다는 것인가? 죄란 어디서 생기는가? 가만히 혼자 있는 로빈슨 크루소에게서 생기는 것 같은 쥔가? 아니면 이 '세상'(성서의 표현)이 죄를 강요하지 않는가? 예수는 '악하고 음난한 세대'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그렇다면 죄란 개인의 책임 이전에 이 사회구조에 있으며 그 개인을 죄에서 구하려면 이 사회문제를 시정해야 할 게 아닌가?

2. 영육의 이원론은 성서적이 아니다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에서도 인간을 전체로서 하나님 앞에서 보았지 이분법적으로 영육으로 갈라서 한 부분만을 상대로하지 않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주장을 보자. 어디에 그렇게 인간을 둘로 쪼개는 데가 있는가? 저들은 인간을 전체로 보았다. 그런데 그 인간이란 막연히 여기 있는 정적인 본질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역사적 존재로 봤다. 즉 상황 속에서 봤단 말이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개개인의 윤리적 죄를 책망하기 전에 부패한 권력자 그리고 지배층의 악정에 공력을 퍼부었다. 그것은 바로 죄의 사회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영을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촉구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저들을 사로잡은 구조악과 싸운 것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영육이라는 이원적 용어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그리스도교회의 선교지로 된 헬레니즘의 용어다. 오늘 우리는 육체와 정신이라는 말을 쓰듯 저들은 영적육적이라는 말을 썼다. 바울이나 요한은 바로 그 시대, 그 상황의 용어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다. 그러나 그 용어를 빌어왔을 뿐이지 의미는 전혀 다르게 썼다. 헬레니즘에서는 이원론적 우주관 아래서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인간 구원이란 바로 물질계에(육체까지 포함해서) 포로된 영을 탈출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이나 요한은 이것으로 인간을 이분한 것이 아니라 존재양식을 말한 것이다. 즉 물질에서 궁극적 생의 보장을 찾는 삶을 육을 따른 삶, 그리스도를 삶의 궁극적 보장으로 삼는 삶을 영에 의한 삶이라고 했다. 신약에서의 '영'은 구약에서 쓴 '루아하'라는 개념과 같다. 그것은 인간 전체를 포괄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중심적 삶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가리켜,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라고 했다(고전 15:45).

바울 당시에 초대교회 안에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이른바 영적인 기현상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이같은 현상의 도가니가 된 고린도교회에게 이른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논한다. 이른바 영파 둘은 5장 39절 등을 내세워 바울은 방언을 인정한 것만이 아니라 권고한다고 하며 그것도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마치 그것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기준처럼 내세운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신비주의에 말려들지 않고 바울이 하려고 하는 말의 뜻을 겸손하게 들으려고 하는 자면 바울의 권고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방언의 가능성을 시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고' '사람은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고 하며 결국 개인을 위한 행위라고 한다(4절). 그런데 사람 앞에 말하는 것은 '결국 허공을 향하여 말하게 된다'(9절)고 하며 '이성'에는 아무 소득이 없다고 하며 자신은 '영으로도 기도하겠으나 이성으로도 기도하겠다'고 하며 영으로 찬미하겠으나 '이성으로도 찬미하겠다'(15절)고 한다. 이성이란 물론 희랍적인 의미로 쓰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되는 말'이라는 뜻이다. 여기 주목할 것은 '영으로'라는 것을 '이성' 또는 '이해'와 병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영은 결코 이해를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바울은 '영'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이라 그의 관심은 그런데 교회라는 공동체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방언 따위를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는 '목회자적' 권고로서 '교회에서는 내가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도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싶다(19절)고 하며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하며'(33절) 마침내 형제들이여 생각하는 데는 아이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악에 대해서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20절)고 하므로 그러한 이른바 '영적 현상이 얼마나 유치한 단계임을 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성령의 중요한 역할은 이미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표명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는 주시다'라는 고백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돈 자유인이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13절)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3장에서 이른바 영적 은사로 '방언', '예언', '신비를 깨닫는 능력', 나가서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마침내는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사라진다고 하므로 그 상대성을 말한다. 그 다음에 영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실은 빨리 그런 것을 지양하라는 간절한 권고다.

바울은 성령은 인간 영역을 탈출하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으로 보는 상대의 그릇된 사고에 대해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갈 5:22) 등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기', '싸움', '시기', '분노', '당파심', '분열', '분파', '질투', '술주정', '연락' 등과 대립시키고 있다. 이런 것으로 그는 낡은 세계를 표상하므로 성령의 삶은 바로 그런 삶의 혁명임을 말한다. 그런데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의한 역사 속에서의 새로운 인간, 새 세계를 위한 싸움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에는 이미 바울에게서 보는 것 같은 어떤 초자연적인 신비한 힘, 또는 능력으로 영을 말한 데가 전혀 없다. 그도 이원론적인 용어로써 영을 말하나 그 역할을 바로 예수의 사건과 직결시키고 있다. 그는 영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는데(14:26; 16:13) 진리란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뜻한다.

요한은 성령을 parakletos라고도하는데 14-16장의 송별설교에서 다섯 번이나 반복된다. 그런데 이 영의 역할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역할을 계속할 뿐이다. '보혜사 즉 아버지가 내 이름으로 보낸 이가 모든 것을 모두 생각나게 하리라'(14:26; 15:26; 16:13).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예수가 성령을 보낸다는 것과 그가 다시 오리라는 것과 그 역할을 병행시켜 약속하고 있는 점이다(14:16-27; 14:18-21; 16:12-25; 16:16-24). 이것은 성령의 역사는 바로 예수의 역할의 현재성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와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밝힐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해서 죄란 '세상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함으로, 역시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을 때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죄란 윤리의 상반개념이 아니라 믿음의 상반성임을 말하며 의와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얼른 알 수 없는 정의를 내리고 있으나 하여간 그리스도가 왔다가 가는 것이 의를 확립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며 심판이란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는다'고 함으로써 마침내 종말적 결단을 말하는데 이것도 현존의 그리스도가 '지금이야말로 세계의 통치자(ὁ ἄρχων τοὒ κόσμου τούτου)가 심판받고 쫓겨날 때'라고 한 말(12:31)과 상통한다.

결국 그리스도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 바로 성령이요 보혜사다. 그리스도가 역학자에서 세계의 주권자에게 처형되면서 '다 이루었다'고 한 그 종말적 심판을 완수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다.

요한에 있어서 '지금'은 종말과 현재다. 지금은 바로 성령의 때로 본 것은 종말적 심판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피안에서 되는 일이 아니라 바로 이 역사 안에서 진행되는 사건이다.

3. 영과 해방

육에 대해서 영이라는 것을 대립시킨 것은 비록 구약의 전통이 아니고 헬레니즘의 영향 아래에서 얻어진 것이나 그것은 중요한 현실을 표상하는 개념이다. 육 또는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객관화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정착적인 측면을 말한다. 물질주의가 첨단에 선 현실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합리적' 또는 '실제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에 기존적인 것을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할 뿐 아니라 그것만이 실재라는 전제 때문이며 이 주장은 '현재'라는 것을 영원히 정착시키려는 설득이다. 그런데 이 설득은 기존질서를 구조화하고 그 권좌에 앉아 지배하는 계층이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물질문명은 바로 그 첨단을 걸으며 이른바 과학적인 입증이라는 것이 이러한 세계관과 세계상을 뒷받침한다. 이런 마당에서 영과 같은 이질적인 것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은 비단 물질주의를 표방하지 않은 세계에서도 있을 수 있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는 하나님을 절정으로 내세우고 율법을 그에게서 받은 영원불변의 것으로 신봉했다. 하나님의 뜻이 교조화되어 고착되고 그것으로 사회를 계층적으로 조직하고 그것을 조종 지배하는 계층은 '율법에 합당하게'라는 이름 아래서 현 질서를 수호하는 기수적 역할을 했다. 예수 당시의 제사장 족속, 사두개, 바리새파 등이 그런 계층이다. 그런데 그러한 저들은 비록 말로는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영을 말하나 실은 그런 것이 개입할 틈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질서의 유지요 고정된 율법에 따라서 일사불 난(一絲不亂)의 체제를 고수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됐다. 그러므로 '성령'이라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정말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비록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율법적 체제도 자유하게 변동하고 기존적인 것을 변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들은 그러한 것을 사실상 배제해 왔다.

예언자란 바로 성령의 인도로 움직이는 일군이었다. 저들은 성령의 이름으로 돌연히 기존질서의 밖으로부터 뛰어 들어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 좌절되어 체념 속에 있거나 또 만족하여 포화된 상태를 만끽하므로 타락되어 가는 상태에서 혁명의 불길을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는 이런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다. 그것은 기존질서의 구조와 그것을 조종하는 자들이 이겼다는 것을 뜻한다. 이럴 때 예수가 나타났다.

그런데 예수가 출현할 때에 예루살램을 중심한 '예언자를 죽이고 비석을 세우는' 무리들이 지배하는 예루살렘을 떠나서—어쩌면 몰려 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갈릴리 등 주변 지역에 이동해서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는 이른바 '영적' 일군들이 있었다. 에세네, 쿰란 등으로 불리는 무리들이 바로 그들이며 세례 요한도 그러한 일군의 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바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이 갈릴리 지방에서 그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첫 성명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서 그것은 바로 성령의 운동이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도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심은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다
주께서 나를 보내심은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고
눌린 자들을 놓아주고
주의 은총의 은혜를 선포하게 하심이라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등을 해방하러 온 것이 그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구체적 행위다. 그것은 바로 '성령'은 해방의 역사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눌린 자 등을 이른바 '종교적'인 의미로 국한시킨 흔적은 전혀 없다. 만일 이것을 죄에 눌리고 포로된 자 등으로 해석하고 이른바 구령운동만이 영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영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당시의 지배층, 그들이 수호하는 기존적인 것에 대한 정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 선언을 만일 당시의 유대교를 전제한 것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것은 저들의 전제하에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영의 역할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 전혀 새로운 현실을 선포하며 그 낡은 압제적인 것에서의 해방이 바로 성령을 받은 예수의 임무다. 그러므로 예수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바로 기존질서의 틀에 영합한 자들인데 대해 '죄인'이란 바로 구조화된 기존질서에서 몰려난 무리들인 것이다.

누가는 교회의 구체적 성립을 바로 오순절의 성령의 강림에서 비롯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역할을 지방이나 민족이나 간에 어떠한 인간 사이에 가로 막힌 담을 헐어 버렸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바대사람, 메대사람, 엘람사람, 메소포타미아사람, 유대와 가바도기와 본도와 아시아와 부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애굽과 구레미 근방의 리비아지방, 로마사람, 그레데사람, 아라비아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이 헐렸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언어사건(言語事件)이라고 하며 이들이 같은 이해를 할 수 있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나 그것은 한 상징에 불과하다. 요는 네 것 내 것으로 기득권을 자명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경계와 권리를 주장하므로 유지된 기존질서에 큰 이변을 일으킨 운동이 성령의 운동이다. 이것은 종말적 사건이다. 이것은 '젊은이들은 환산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며', '하늘에서는 기이한 일들을 나타내며', '땅에서는 표징이 보일 것이며', '해는 변하여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하여 피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묵시문학적 표현이나 성령은 기존질서의 전면적인 종식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생활로 옮긴 것이 믿는 사람들은 다함께 지내면서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게 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인 평면에서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 소유권에 의해서 삶의 보장을 찾는 낡은 질서의 부패를 의미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저들의 성령운동은 바로 낡은 세계에서의 탈출과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한다.

바울은 비록 헬레니즘의 영역에서 이른바 영의 현상을 목도하면서 '목회자'적 영론을 펴고 있는 일면이 있으나 놀랄 만한 영의 궁극적 의미를 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로마서 8장이다.

그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피조물들이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이 소원은 인간들 자신도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이로써 성령의 의미가 높은 차원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것은 우주적인 해방운동이다. 이 우주 전체가 옳지 못한 인간들 때문에 허무한 것에 굴복해서 신음하기에 참된 인간들이 나타나서 그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희망하며 성령은 바로 이 우주적 해방을 위해 참 인간(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대한 텍스트를 단순한 종교적 환상으로 해석해 버려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우주적 부조리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혁명 또 새로운 인간이 탄생되야 하며 그들의 임무는 바로 이 부조리의 근인과 원인을 혁명할 의무와 과제가 있음을 전제하는데 그속에 사회, 정치, 경제의 부조리는 제외된다는 어떤 단서도 붙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성령이란 그야말로 전체적 '폭발'을 뜻하지 어느 부분에 국한한 것일 수 없다.

4. 결론

이상에서 성서의 '영'이란 이 세계에 대한 피안적 현상, 물질에 대한 상반개념 따위의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분화되어 그것을 합법화시킨 세계를 하나로하려는 힘인 것을 볼 수 있다. 영은 결코 역사 밖으로의 도피처가 아니라 바로 이 역사와 피안의 통합의 운동이며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경제, 정치, 사회적 사건과 인간의 내적인 문제를 하나의 문제로 다시 보게 하는 운동이며 마침내 부조리를 합법화하여 절대적으로 고수하려는 기존의 모든 것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려는 하나님의 창조적(종말적)인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예언자들을 아끌던 '영'의 운동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예언자들은 언제나 민족공동체를 대상으로 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저들은 윤리, 정치, 경제분야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과 관여를 주저없이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 안주한 종교가 자기의 할일을 망각한 것을 통열이 비난할 뿐 아니라 저주하는 데까지 주저하지 않았으며 인과율적인 하나님의 파악을 무자비하게 파괴하여 자유자재한 하나님을 역설했으며 유대민족을 사랑하면서도 저들의 기득권을 자명적으로 아는 저들은 망할 것을 주저없이 선언할 수 있었다. 이것이 기득권자의 이권을 유린하는 것이기에 그들 손에 박해와 죽음을 당했든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궁극적인 우주적인 통체적인 미래를 보았기 때문에 현재에 대해서 그토록 파괴적이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살찐 짐승과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의 미래상이다. 바로 바울이 성령이 그렇게 되기 위해 간구하는 그 종국의 세계다.

(『세계와 선교』, 197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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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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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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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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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옳은 민족 옳은 역사
서양사람 한국사람
구라파에서 본 조국
사상의 주체성
세계 속의 한국
   
제2부 한국의 민족 감정
민족 감정
아키히토 방한과 민족 감정
히로히토가 엄존하는데
민족적 염원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민족 정신 문화 불식시키는 외래 종교
   
제3부 한국의 민족 운동
3•1절과 민족사적 고백
8•15와 해방
3•1 운동과 기독교
민중 운동의 새 기원
4•19혁명과 민주주의의 갈망
4•19의 혼
4•19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제4부 한국 민(民)과 종교
민족적 과제와 교회
그리스도교와 민족 공동체
개화기의 한국 교회의 위치
한국 사회와 기독교 대학의 방향
주체성과 신앙
더 이상 종교는 침묵일 수 없다
   
제5부 민족 자결
민족 자결의 민족주의
민족 문제와 민중신학
혼선된 역사
   
제6부 분단과 평화
해방은 통일로써만
한국전쟁과 평화
6•25전쟁은 언제 끝나나!
이 땅에 평화를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
   
제7부 통일의 주체
민족 통일 문제의 성서적 조명
통일 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통일은 민(民)의 손으로
씨알과 민족 통일
   
제8부 평화의 길
평화와 칼
아시아 평화와 일본
함석헌의 평화 사상
통일을 위한 민족 교육의 방향
평화의 실현
분단 극복과 평화
새 국면에 선 민족 통일과 기독교
희년 선포와 통일 헌법
   
판권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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